# 173
현세귀환록
173. 확전(4)
8명에 달하는 마스터급 악마의 등장은 전세를 완전히 악마 쪽으로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크윽…… 결국은 이 카드까지 써야 하는 것인가……. 웬만하면 쓰고 싶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남겨둔 카드는 양날의 검과 같이 드레이크에게도 상처를 줄 수 있는 카드였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둘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반면 고뇌하는 드레이크를 비웃기나 하는 듯 파루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타난 부하들을 향해 공격을 명령하였다.
“쳐라! 목숨만 붙여놓으면 되니까 마음껏 휘저어라!”
파루스의 명령에 따라 새로이 나타난 악마들은 적극적인 공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원래 드레이크의 계획은 이극민과 이레인, 키로스탄으로 케일라를 막고, 자신은 파루스를 빨리 해치워 전권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살아남기에도 급급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부상을 당한 나라크까지 일어서서 그들을 맞아갔지만 수적인 열세에 전황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챙챙~ 콰지직~ 콰앙~
이곳저곳에서 마스터급 악마들과 마스터급 뱀파이어들간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아무래도 2 대 1로 싸우는 뱀파이어가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라 할 수 있는 대장전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흐흐흐, 우리도 슬슬 끝내는 게 어때?”
파루스가 음흉한 웃음소리를 내며 드레이크에게 다가섰고, 케일라도 어디서 뽑아 들었는지 팔뚝만 한 단도 두 자루를 빼 들고 전투태세에 나섰다.
그때였다.
쾅~! 콰르르륵~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전장의 한편에 있던 건물 벽이 통째로 무너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인영이 튀어나오더니 빠른 속도로 전장에 접근하였다.
다가오는 속도가 보통은 아닌 것이 최소한 마스터 이상의 경지는 되어 보이는 강자였다.
다만 뱀파이어들도 그 괴인의 정체를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고, 파루스 역시 갑자기 튀어나온 강자가 누군지 궁금했기에 괴인에게 말을 건넸다.
“네놈은 누구…… 엇!”
챙~
하지만 괴인은 그런 대화에 관심이 없는지 문답무용식의 공격을 펼쳤다. 그리고 그 공격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챙, 챙- 채챙-
몇 차례의 공격을 날리던 괴인는 그의 공격을 파루스가 잘 막아내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뒤, 이번에는 자신의 검에 마나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파스스스~
검의 마나가 대기 중의 마나와 충돌하며 약한 파열음이 발생하였고 이내 그의 검은 핏빛 수정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역시 그랜드 마스터급이군!”
파루스는 괴인이 그랜드 마스터급이었다는 것을 예상했다는 듯한 말을 하며 자신의 검에도 역시 검강을 드리웠다.
그렇게 파루스가 괴인과 싸우고 있는 사이, 케일라 역시 드레이크와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마계에서의 경지를 보면 결코 드레이크에게 밀릴 케일라가 아니었으나, 현재 전력을 다 보일 수 없는 케일라는 다소 드레이크에 밀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케일라 역시 한 수가 있는 악마였다. 아니, 작위마 이상급 되면 자신만의 한 수가 없는 악마를 찾는 것이 더 힘들 것이었다.
지금 상태에서는 자신이 밀린다는 것을 인정한 케일라는 뭔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눈으로 마기를 집중하더니 광선과도 같은 마기를 쏘아 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싸우고 있는 드레이크였는데, 그녀의 시선을 받은 드레이크는 무엇엔가 홀린 듯한 모습을 보이며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런 드레이크의 모습에 회심의 미소를 짓던 케일라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혹의 눈길을 맞고도 죽음을 당하지 않는 것은 네가 처음일 것이야.”
케일라의 한 수는 그녀의 특성을 잘 살린 유혹의 눈길이었다. 그녀가 마계에서 살아남으며 후작급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도 이 유혹의 눈길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드레이크는 아마 엄청난 황홀경에 빠져 있을 것이었다. 만일 드레이크가 보통의 악마였다면 케일라는 황홀경을 통해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를 전부 흡수하여 종내에는 미이라로 만들어버렸겠지만, 지금 드레이크는 살려야 할 필요가 있는 제물이었다.
그래서 드레이크에게 다가간 케일라는 몇 군데 급소를 찔러 단순히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려고 하였다. 뚜벅뚜벅 드레이크에게 다가간 케일라는 그에게 가벼운 동작으로 손을 휘저었는데, 그 순간 드레이크의 멍한 눈동자에 다시금 활기가 차올랐고 케일라의 마무리 공격 역시 손쉽게 피해 버렸다.
그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케일라는 깜짝 놀라며 뒤쪽으로 몸을 피하려 하였는데, 드레이크의 검격이 조금 더 빨랐다.
휘익~! 스샥!
“으윽!”
드레이크의 검은 하단에서 상단으로 크게 휘둘러졌고, 이를 피하지 못한 케일라는 우측 어깨에서 좌측 옆구리 부분까지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드레이크의 공격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드레이크는 케일라를 벤 방향으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다시 크게 검을 휘둘러 끝내 케일라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통~통~ 데구르르르~
후작급의 악마인 케일라는 자신의 한 수인 유혹의 눈길을 너무 믿고 있었기에 결국 그녀답지 않은 죽음, 아니, 강제 귀환을 맞이하고 말았다.
애초부터 유혹의 눈길에 걸리지 않았다면 모를까, 걸렸다가 이렇게 풀리는 경우는 없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드레이크의 앞에서 힘없이 쓰러지는 몸뚱이와 저 멀리 날아간 그녀의 머리는 잠시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검은 연기로 변해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마계로의 강제귀환이었다.
그렇게 케일라를 해치운 드레이크는 마치 자신이 꾸민 함정에 그녀가 빠져들었다는 듯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상황이었다.
‘휴…… 블러드 코어가 아니었다면 꼼짝 못 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겠군.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는군.’
드레이크가 유혹의 눈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본신의 능력이라 할 수는 없었다. 과거 그가 흡수했던 블러드 코어 덕분이었다.
블러드 코어가 드레이크의 상태이상을 해제해 주었기 때문에 케일라의 그 기술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전장에 있는 뱀파이어들의 시선은 케일라를 죽인 드레이크에게 모이는 것이 아니라 파루스와 괴인의 전투 쪽에 쏠려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괴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급의 전투에 괴인이 펼치고 있던 인식 장애 마법이 깨져 버려 괴인의 진면목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뱀파이어들은 인식 장애가 해제된 괴인이 누군지 알아보는지, 전투 중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에서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빅토르 님!!”
“오! 빅토르 님이 돌아오셨어!”
“그렇다면 해볼 만하겠는데?”
“이제 됐어! 빅토르 님이 오셨으니까!”
빅토르라 불린 자에 대한 신뢰가 높았는지 많은 뱀파이어들은 다시금 힘을 얻은 듯 악마들과 싸워나가기 시작했다.
빅토르는 드레이크가 벨리알의 로드에 오르기 전의 로드였다. 공식적으로는 수련을 위해서 드레이크에게 로드의 자리를 물려주고 은둔했다고 알려졌는데, 이렇게 벨리알의 위기 상황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벨리알의 뱀파이어들은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뱀파이어들의 환호를 받는 빅토르를 보는 드레이크의 시선은 곱지 못하였다.
‘휴……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군. 이렇게 된다면 빅토르를 더 이상 사용하기 힘들겠는데?’
사실 빅토르는 또 다른 드레이크의 종속자로, 드레이크가 가진 마지막 카드라고 할 수 있었다.
벨리알의 다른 뱀파이어들은 빅토르가 수련을 위해 은퇴를 하고 은둔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블러드 코어의 힘으로 드레이크가 자신의 종속자로 만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위가 지위인지라 공식적으로 빅토르를 사용할 수는 없었기에, 드레이크는 그를 암중살검(暗中殺劍), 즉, 자객과도 같은 형태로 운용하고 있었다.
물론 인식 장애 마법을 걸고는 있으나 다른 뱀파이어들의 이목을 숨기고 어느 정도는 활용 가능하나, 지금처럼 강자와 싸우다 보면 인식 장애 마법 정도는 쉽사리 깨어지기 때문에 그를 사용하는 것은 늘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루시페르와의 항쟁에도 빅토르는 굳이 사용하지 않고 이극민만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나중에 블라디미르를 칠 때 사용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버려야 하다니 아깝게 되었군. 뭐, 하긴 어차피 자주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이렇게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이렇게 빅토르의 정체가 알려진 이상 더 이상 그를 사용하기는 힘들었다. 빅토르가 자신의 종속자인 것이 알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느 정도 통제가 되는 이극민과는 달리, 그랜드 마스터급의 경지에 오른 빅토르는 종속자임에도 불구하고 잘 통제가 되지 않았다.
블러드 코어의 힘이 많이 남아 있을 때는 어느 정도의 통제가 되지만, 통제를 하면 할수록 빅토르 내에 있던 코어의 힘이 약해져 갔고 통제력 또한 같이 약해져 갔다.
아직 그런 적은 없었지만, 만일 코어의 힘이 모두 소진된다면 종속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우려도 있었다. 따라서 드레이크는 빅토르를 활용하고 나면 꼭 다시 대법을 시전하여 코어의 힘을 채워놓곤 하였다.
이런 이유로 지금 드레이크는 이번 기회에 빅토르를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악마와의 항쟁에서 장렬히 전사하면 모양새도 좋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 용대가리는 뭔가 있는 듯하더니 아직도 빅토르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있군. 지금 빅토르가 보일 수 있는 능력은 반쪽짜리밖에 안 될 텐데 말이야.’
아무래도 종속된 입장이기 때문에 빅토르는 그랜드 마스터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지금 드레이크가 반쪽짜리라는 것도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검강의 기세만 따지면 파루스에 비해서 빅토르가 우세한 편이었기에, 파루스가 압도하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파루스는 지금 케일라의 강제귀환에 다소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허…… 케일라가…….’
빅토르와 박빙의 대결을 펼치고 있던 파루스는, 케일라의 강제귀환에 잘못하다가는 아바투르가 지시한 일을 이행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아직도 마스터급 뱀파이어와 싸우고 있는 작위마들에게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
“어서 지금 상대하는 놈들을 처리하고 케일라를 해치운 저놈에게 모두 붙어라! 필요하다면 목숨을 끊어도 좋다!”
아까 전 나타났던 악마들은 수적으로 유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뱀파이어들과 싸우는 중이었는데, 그것은 뱀파이어들이 피의 격노를 사용하면서 순간적인 출력을 높여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쉽사리 제압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목숨만을 붙여놓는다고 말을 해놓은지라 뱀파이어들의 동귀어진 식의 공격에도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하고 있었는데, 이제 죽여도 좋다는 파루스의 지시가 떨어진 이상 더 이상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케일라를 처리해서 자유로운 상태의 드레이크가 전장에 뛰어들자 전황은 뱀파이어들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애초에 드레이크의 말처럼 결국은 강자간의 싸움에서 결판이 나는 것이었다. 만일 드레이크가 여기 있는 마스터급 악마들만 다 처리한다면 A급 이하의 악마들 정도야 적은 수의 뱀파이어로도 충분히 지워 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드레이크가 다시 하나의 악마를 강제귀환시키고, 또 다른 악마를 노릴 때였다.
“거기까지 하지.”
다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