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현세귀환록
172. 확전(3)
“누구냐!”
파루스의 공격을 받아낸 나라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파루스에게 외쳤다.
“허. 싸움은 좀 하는데 머리는 모자란 놈인가? 이 상황에서 누군지가 중요해? 그리고 딱 보면 누군지 모르겠어?”
용의 머리를 한 파루스는 특유의 이죽거리는 말투로 나라크에게 대답했다. 파루스는 호전적이기도 했지만 상대를 도발하는 것에도 조예가 깊은 편이었다.
예상대로 파루스의 말을 들은 나라크는 다소 화가 치미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파루스에게서 느껴지는 기파가 심상치 않았기에 섣불리 덤벼들지는 못하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네가 이 악마들의 대장이냐?”
“크크. 뭐 이곳에서는 내가 대장이라 할 수 있겠지.”
뒤에 비슷한 급의 케일라가 있지만 무력만 놓고 보았을 때는 자신이 한 수 위였기에 파루스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이곳에서 대장이라면 악마들 전체의 우두머리는 아니라는 말인가?’
당연한 추론이었다. 사실 파루스 역시 그런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저렇게 말한 것이었다.
파루스의 말에 나라크의 머리가 복잡해진 듯하자 파루스는 대검을 돌리며 전투 자세를 잡은 뒤, 나라크에게 말했다.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은 붙어보자고!”
말을 마친 파루스는 마치 대포알과 같은 검격을 나라크에게 날렸다. 나라크 역시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대검에 검기를 두른 채 파루스의 검격을 막아갔다.
콰앙!
아까 전의 기습 공세와는 달리 제대로 힘을 실은 공격이기에 파열음의 크기는 더 컸다. 그 파열음을 신호로 파루스는 폭풍과도 같은 검세를 펼쳐나갔다.
쾅쾅쾅쾅쾅!
일격 일격이 필살의 검세인 듯 엄청난 폭음과 함께 나라크의 몸이 밀려났다. 나라크 역시 마스터의 경지에 있었지만, 확실히 파루스가 한 수 위였다.
후작급의 나라크는 당연히 검강지경의 강자였다. 아직 광검지경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검강지경에서는 극에 달한 이해도를 갖고 있었다.
숙주 없이 물질계로 나오느라 전력의 50% 정도밖에 발휘하지 못하고는 있었으나, 지금도 충분히 검강은 사용할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파루스는 전투를 즐기느라 굳이 검강까지는 펼치지 않고, 검기만으로 나라크를 상대하고 있었다.
‘으윽! 이대로라면 안 되겠어. 저자는 마스터의 경지를 뛰어넘은 자야!’
나라크는 한참 동안 파루스의 공세를 받으며 빈틈을 찾아 전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노렸으나, 한 수 위의 파루스의 빈틈을 찾기란 요원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파루스가 자신보다 윗줄의 무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라크 역시 한 수가 있었다. 아무리 한 수 위의 상대라고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기엔 블러디 투스 리더의 체면이 서지 않았다.
수세에 몰린 싸움을 계속하던 나라크는 진혈을 깨우기 위한 틈을 보고 있었다. 마스터에 이른 나라크가 뱀파이어 종족의 특성인 피의 격노를 사용한다면 순간적이나마 검강지경에 맞먹는 힘을 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라크를 얕보고 있는 파루스가 본신의 힘을 사용하기 전에 진혈을 깨운 힘을 일격에 실어 파루스를 처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루스 역시 수백 년간 전투를 해왔던 전투의 베테랑이었다. 나라크의 바뀐 분위기를 감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만,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크 정도의 능력자가 갖고 있는 비장의 무기 정도로는 파루스에게 위기감을 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 비장의 무기가 뭔지 궁금하였고, 그래서 일부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틈을 만들어주었다.
파앙~
연속해서 몰아치던 파루스의 검격 중 한 공격이 허술한 흐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잡아낸 나라크는 눈을 빛내며 그 검격을 쳐냈다. 지금까지처럼 공격에 밀려서 방어만을 굳혔던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격을 받아내어 파루스의 틈을 만든 것이었다.
화아아악!
그와 동시에 준비했던 피의 격노를 발동시켰다. 진혈을 깨운 것이다. 마스터에 이른 만큼 사전 준비시간은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튕겨 나간 대검을 다시 돌려 이어지는 공격을 하려던 파루스는 전방에서 발현하는 뜻밖의 강렬한 기세에 놀라 전면의 방어를 굳혔는데, 그 방어막 위로 엄청난 충격이 전해져왔다.
콰앙~ 콰앙~ 콰앙!!
나라크의 대검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붉게 물들인 나라크는 핏빛으로 변한 눈을 흉폭하게 빛내며 새빨갛게 타오르는 검기를 머금은 대검으로 파루스의 방어막을 연신 때려댔다.
분명 파루스 스스로 보여준 틈이었지만, 나라크의 변신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더군다나 파루스는 나라크를 숙주로 삼기 위해서 그의 목숨을 빼앗을 공격은 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의 격노 상태인 나라크를 상대하기는 더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파루스는 나라크보다는 한 수 위의 상대였다.
‘크윽. 생각보다 숨겨둔 칼이 날카로운데? 약간 다치겠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결심한 파루스는 검은 마기가 불타오르던 대검에 더 많은 마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루스의 대검은 불타오르는 마기가 아니라 정제된 칼날과도 같은 마기가 뒤덮이기 시작했다. 바로 검강이었다.
파루스의 검강 발현을 본 나라크는 마음이 더 급해졌다. 피의 격노를 일깨워 제대로 된 이성적 판단을 하기가 힘들긴 하였으나 검강의 흉험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할 수 있었다. 나라크의 공세를 어렵지 않게 막아가는 파루스의 대검에는 불길한 검은 칼날이 이미 나타나 있었다.
파슥~!
검기가 강하다 하더라도 검강을 버텨낼 수는 없었다. 검기를 머금은 나라크의 대검을 어렵지 않게 잘라낸 파루스의 대검은 연속 동작으로 나라크의 머리를 노려갔다.
다만 칼날 부분으로 자르는 것이 아닌 검면으로 치려는 행동에 가까웠다. 숙주로 사용하기 위해서 살려두려는 것이었다.
채앵~!
그러나 파루스의 그 공격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그의 공격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그만! 네놈은 내가 상대해 주지.”
조금 전 침실을 떠나 전장으로 온 벨리알의 로드 드레이크였다. 드레이크가 파루스를 막는 사이 같이 온 이레인은 재빨리 나라크를 챙겼다.
“호오. 이제 대가리가 나온 것인가? 흐음…….”
쩌릿쩌릿한 기운이 드레이크 역시 검강지경의 강자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만일 마계에서라면 충분히 상대할 만한 수준이었지만, 능력이 떨어져 있는 지금은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그런 생각은 파루스만 한 것은 아니었다. 드레이크 역시 한 번 검격을 나눠보고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감 있게 외쳤다.
“네놈들이 우리를 쉽게 본 것 같은데, 네놈들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지!”
“크크큭. 마계에서 만났다면 재미있는 싸움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군. 어쨌든 나도 임무를 받은 상황이라 굳이 일 대 일의 대결을 고집하진 않겠다. 케일라!”
케일라 역시 후작급으로 충분히 검강을 사용할 수 있는 강자였다. 그런 케일라와 같이 상대한다면 충분히 이자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파루스는 케일라를 불렀다.
“호호호. 안 그래도 내려오려고 했어!”
파루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케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제 케일라는 그녀의 말처럼 파루스가 부르기도 전에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드디어 쓸 만한 숙주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바로 드레이크와 함께 나타난 이레인을 두고 한 생각이었다.
[이놈은 같이 처리해야겠어. 생사결을 펼친다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결국은 살려서 가야 할 거 아냐? 그러니까 합공을 하자.]
[흐응. 좋아. 지금 이 녀석을 보니 반반한 얼굴도 그렇고 바스라 공작님과 딱 어울리겠군.]
[크큭. 그래 난 어차피 저 뒤에 대검 쓰는 놈만 있으면 되니까.]
[그래, 그럼 한바탕 해볼까?]
하늘에서 내려온 케일라와 파루스가 텔레파시를 나누는 동안, 드레이크의 생각도 복잡해졌다.
용머리 악마 한 놈이라면 충분히 할 만할 것 같은데, 저 여자 악마 또한 비슷한 수준으로 보이기에 두 명을 한 번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큭. 어쩔 수 없이 히든카드를 써야겠는데? 일단 뒤탈 없는 녀석부터 사용해야겠지.’
생각을 마친 드레이크는 마나를 일으켜 자신의 침실이 있던 쪽으로 그 마나를 쏘아 보냈다.
갑자기 마나를 끌어 올리는 드레이크의 모습에 파루스와 케일라는 살짝 긴장했지만, 그것이 자신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님을 알고 긴장은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성격 급한 파루스는 드레이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궁금증이 생겨 그에게 물었다.
“뭐냐? 저기 뭐라도 있는 것이냐?”
사실 지금 싸우고 있는 적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우스울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드레이크 역시 지금 부른 자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기다려 보면 알겠지. 네놈들이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야.”
드레이크의 대답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마나를 보낸 쪽에서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에 마나를 두르고 날 듯이 달려오는 것을 보니 최소한 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오른 강자임이 분명해 보였다.
쿠웅~!
날 듯이 뛰어온 자는 헐렁한 로브를 걸친 백발의 노인이었는데 뜻밖에도 동양인이었다. 그리고 들고 있는 무기도 서양식 장검과는 다른 동양식의 환도였다. 그는 바로 사라졌던 천왕가의 태상가주 이극민이었다.
드레이크가 숨기고 있던 카드 중의 하나가 이 이극민 태상가주였다. 몇 해 전 이극민을 사로잡은 드레이크는 오랜 시간 그에게 종속자로 만드는 대법을 시전했었다.
마스터의 정신력을 제압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이극민의 정신은 드레이크의 대법에 장악되고 말았고, 지금 이극민은 드레이크의 종속자로 거듭난 상태였다.
게다가 종속자로서 피의 의식까지 치러주어, 제압 당시의 이극민은 마스터 초입 정도였지만 지금은 무력만으로 따지면 그랜드 마스터 초입에 맞먹은 상태였다.
물론 정신이 제압당한 만큼 검강지경에 걸맞은 깨달음을 갖춘 상태는 아니었지만, 극도로 집중된 검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검강에도 다소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리! 이레인, 키로스탄과 함께 저 여자 악마를 상대해라. 이 용머리 악마는 내가 맡을 테니 말이야. 하하하.”
나라크는 조금 전 파루스의 공격에 내상을 입었는지 아직 제 컨디션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무리하면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드레이크의 판단에 저 세 명이면 여자 악마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드레이크의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는 않았다. 만만치 않아 보이는 이극민의 등장에 파루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이거 참. 머릿수로 하자 이건가? 그런데 어쩌지? 머릿수로 하면 우리가 불리할 것이 없다고. 하얏!!”
말을 마침과 동시에 파루스는 메시지를 담은 기파를 전장 전체로 뿜어내었다. 그리고 그 기파에 전장의 이곳저곳에서 마스터급으로 보이는 악마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이곳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악마들은 이곳 전장의 중심으로 다가왔는데, 그 숫자는 8명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쉽게 가려고 했더니, 그렇게 놓아두지를 않는군. 그냥 처리한다면 모를까, 아무래도 생포하려 하다 보니 너희들의 손을 좀 빌려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후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