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현세귀환록
169. 통일(3)
그렇게 강민과 유리엘이 조금 전 있었던 대통령의 대국민담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장태성 실장이 보고를 위해서 대기 중이라는 연락이었다.
필요하다면 하루에도 몇 번씩 회장실을 방문하는 장태성 실장이기에 통상적인 보고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들였는데, 장태성 실장의 표정이 일상적인 보고인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장태성은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강민을 불렀다.
“회장님!”
“무슨 일인가요, 장 실장님?”
“백산그룹의 백 회장이 자신이 가진 재산의 절반을 통일 대책기금으로 출현한다고 합니다!”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인 백무산 회장은 대체로 윤강민 대통령과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을 보여주기나 하는 듯 과거 윤강민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에도 백무산 회장은 적극적으로 윤강민 후보를 지지하며,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도왔던 전례가 있었다.
이번에도 윤강민 대통령의 담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정책을 지지한다는 의사표명을 자신이 가진 재산의 절반을 내놓으면서 하고 있는 것이었다.
현재 백산은 무제한적인 물량 공세를 펼치는 강민의 KM그룹에 밀려서 국내 2위의 재벌이 되었지만, 역사와 전통을 따지면 KM그룹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재계에 발휘할 수 있는 기업이었다.
더군다나 유현승 회장이 갑자기 비명횡사한 뒤, 사분오열된 현승그룹의 계열사 일부도 매수하여 합병하였기에 그 덩치는 과거보다 훨씬 더 커진 상황이었다.
그 기업의 총수인 백무산 회장이 이렇게 한다는 것은 다른 재벌 그룹들에게 상당한 압박으로 돌아올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자녀에게 넘어간 것을 제외한다면, 지금 백 회장의 개인 재산은 드러난 것만 따지면 대략 30조 원 정도 되지 않나요?”
이미 개괄적인 재벌가들의 소유구조나 재산 상황에 대해서는 다 파악한 상태이기 때문에 강민의 물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백 회장은 다른 재벌들에 비해서 불법적인 증여를 한 부분이 없어서 자녀들에게 넘어간 부분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다른 재벌들은 이미 경영권의 승계 등을 위하여 불법적인 증여를 통해 상당 부분의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지만, 백산의 백회장은 달랐다. 자신의 사후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상속세를 내고 사업을 승계해 줄 생각으로 일체의 불법적인 증여를 진행하지 않은 상태였다. 과연 스스로 떳떳하다고 자부하는 백 회장다운 선택이었다.
“그런데 백 회장의 재산 대부분은 백산그룹의 주식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일시에 처분한다면 경영권의 유지에도 문제가 되지 싶은데요?”
강민의 지적은 타당하였다. 취지야 좋지만 일시적으로 지배주주의 지분을 대거 매도해 버린다면 경영권 자체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백산에서 일을 진행했을 리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 대책에 대해서 장태성 실장이 대답했다.
“그 부분은 별도의 재단을 설립하여 그 수익금과 배당금을 기금으로 편입하는 식으로 처리한다고 합니다.”
“흠…… 백산에서 머리를 썼군요.”
“그렇습니다. 그 방법이라면 명분과 실리를 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만 풀어간다면 그 재단을 통해서 차기 경영권 승계까지 해결할 수 있겠지요. 표면적인 재산이야 줄어들겠지만, 충분히 실리를 가질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재단을 설립하여 수익금과 배당금을 납부한다면 재산권의 행사에는 제약이 있을지 몰라도, 재단만 장악하고 있으면 경영권의 유지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경영권을 자연스럽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장태성 실장의 판단이었다.
“다른 재벌사들은 어찌한다던가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각자 내부 논의를 해봐야겠지만, 대통령의 의중이 분명하고 백산에서 저리 나오니 최소한의 성의 이상은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장 실장님은 우리 그룹의 대응에 대해서 방침을 들으러 오신 것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
장태성 실장이 그룹 내 대부분의 사안을 자의적으로 처리할 권한이 있다고 하지만, 이런 문제는 그가 판단할 영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히 강민의 지시를 받아서 이행해야 할 사안이기 때문에 이렇게 헐레벌떡 회장실로 온 것이었다.
사실 외부에는 강민의 재산 대부분이 KM재단에 묶여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장태성 실장은 그게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확실한 지시를 받기를 원하였다.
“그럼 지금 백산에서는 15조 원 규모의 재단을 설립하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우리는 그 두 배를 출연하는 것으로 하지요.”
“두, 두 배라면…… 30조 원 말입니까?!”
표면적으로 알려진 강민의 추정 재산은 대략 50조 원 정도 되었다. 하지만 강민은 최초 유니온과의 황금 거래를 통해서 이미 100조 원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초기 KM그룹을 만드느라 그 돈의 상당 부분을 사용하였지만, 몇 년간의 KM그룹 운영을 통해서 다시 그 정도의 현금은 확보하고 있었다.
즉, 남은 황금이나 귀금속들을 제외하고도 즉시 동원 가능한 현금이 100조 원이라는 이야기였다. 그중 30조면 적은 비율은 아니지만, 충분히 감내할 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장태성 실장은 강민의 재산을 표면적으로 알려진 재산인 50조 원 정도로 알고 있었기에 그 놀라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백산에서 50%의 재산출연을 한 것도 엄청난 금액이라 세상이 놀라고 있는데, 그보다 훨씬 부자인 강민이 60%의 재산을 출연한다고 하면 그 놀라움은 배가 될 것이었다.
“그래요. 30조 원. 물론 우리도 백산과 같은 방식으로 하면 되겠지요. KM재단 산하에 통일 대책기금 파트를 마련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아. 물론 백산과는 달리 저는 KM의 주식에 손대지 않고, 제 사재를 출현하는 방식으로 하지요.”
“그, 그 정도로 동원 가능한 자금이 많이 있었습니까?”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사업을 하는데 자금적인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말을 하라고 말이죠.”
“그, 그렇긴 하지만…….”
실제로 강민은 장태성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였었다. 그래서 장태성도 신규사업의 참여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일부 실패했던 결정도 있었지만 많은 투자가 성공하여 지금 KM그룹은 국내 1위, 세계적으로도 명망 있는 거대 회사로 성장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렇게나 많은 자금이 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장태성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알고 준비해주세요. 그래도 1위 기업인데, 2위 기업보다 적게 투자할 수는 없겠지요. 어차피 기금조성에 도움을 주는 만큼 재건사업에 우선권을 준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하였으니 우리도 과감하게 해봅시다.”
지금 북한은 내전과 통일 전쟁으로 반쯤 폐허에 가까울 정도로 황폐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몇 년의 시간만 지나도 북한 자체가 엄청난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이 기회를 제대로 살린다면 국내 1위를 넘어서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초거대 기업으로 성장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강민이 또 한 번 엄청난 자금을 지원하여 준다고 언급하자, 장태성 실장은 다시금 의욕에 타오르는 눈빛을 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네! 회장님!”
그렇게 장태성 실장이 나가고 나자, 유리엘은 강민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슬슬 악마들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었잖아요.”
단도직입적인 유리엘의 질문에 강민은 잠시 생각하다 그녀에게 대답했다.
“음……. 그렇긴 하지만 아직 좀 부족한 것 같지 않아? 지금 제대로 대응 체계를 마련해 놓아야 나중에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유리엘은 강민과 악마들을 조기에 퇴치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놓아둔 것은 향후 있을 마나장 통합을 대비한 훈련의 성격이 강하였다.
물론 훈련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희생이 동반되었다는 문제가 있지만, 그런 희생도 나중에 마나장 통합 때를 가정해 보면 정말 얼마 되지 않을 희생이었다.
십만 년 가까운 삶을 보낸 강민과 유리엘에게도 차원의 통합은 몇 차례 보지 못한 희귀한 일이었다. 그래서 차원 통합에 대한 경험적 데이터는 적은 편이지만, 몇 가지 분명한 점은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차원 통합의 전조인 마나장 통합이 일어나면 일시적으로 웜홀의 폭주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나의 성질이 동일하게 되어버린 두 차원 간의 마나 밀도를 맞추기 위한 자연스러운 흐름인데,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마나 밀도가 낮은 지구 쪽으로 통합될 차원의 마물들이 쏟아져 들어올 가능성이 컸다. 아니, 확실했다.
지금도 거의 모든 웜홀이 타 차원에서 지구를 향해서 발생했지, 지구에서 타 차원으로 가는 웜홀은 극히 드물게 발견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지구의 마나 밀도가 통합될 차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상당히 낮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나장의 통합이 일어난다면, 지금까지 웜홀의 수백 수천 배가 넘는 웜홀이 일시적으로 폭발하듯이 발생하며 마물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 자명하였다.
물론 웜홀의 폭주는 계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저수지의 물이 터지면 한순간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오지만 고여 있던 물이 다 쏟아지고 나면, 그 뒤로는 천천히 물이 흘러나오듯이 웜홀의 폭주는 한순간만 발생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지구에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어쩌면 이 웜홀의 폭주를 견디지 못하고 인류의 대부분이 사멸해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더군다나 마나장 통합이 일어났기 때문에 마물들에게는 더 이상 마나 충돌 또한 없었다. 즉, 지금까지는 시일이 지나면 알아서 소멸했던 마물들이 이제는 그 수명대로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악재인 상황들이 겹친다는 이야기였다.
이 상황을 이미 예상했던 강민과 유리엘은 지금 악마의 창궐을 나중에 있을 웜홀의 폭주를 대비하는 훈련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중에 웜홀의 폭주가 일어나더라도 지금 악마를 상대했던 경험을 토대로 체계적으로 외부의 침략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 문제 때문에 악마들의 등장에 따라 마나장 통합의 시기가 단축되고 있음에도 이들은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유리엘은 강민이 악마를 정리하자는 말에 다소 부정적으로 반응하자 다시 한번 말을 건넸다.
“그렇지만 아직 성장 가능한 이능력자들이 이 사건으로 너무 많이 희생되어 버리면 나중에 더 문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천만 명의 희생은 인류 전체로 보아 큰 숫자는 아니지만, 그중 이능력자들의 희생 비율만 따지면 전체 이능력자의 수에 비해 그 비율이 너무 컸다.
만일 희생된 이능력자들이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 자들이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망자는 성장의 가능성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자들이었다.
일반인들도 제니아 시스템 덕에 이능력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열려 있긴 하였지만, 그 성장 속도는 이미 이능력자가 된 사람들에 비해서는 당연히 느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유리엘은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긴 하지. 유리, 그럼 고위 악마들은 다 찾은 거야?”
과거 악마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마나위성이 세부 스캔을 할 여력이 없어서 두고 본 측면이 강했는데, 유리엘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강민은 이 소동의 원흉인 고위 악마들을 찾았는지 질문하는 것이다.
“아뇨. 아직 마나 위성이 세부 스캔까지 할 여력은 없어서 놓아두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더 두고 보는 것보다 빨리 처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 잠시 시스템을 중단하고라도 색출하는 것이 낫겠지요.”
제니아 시스템은 이제 완전히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아직도 마나 위성에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시스템의 사용자인 유저들의 수준이 조금 더 올라가면 마나 위성의 마나를 사용할 필요가 없이 자체적인 마나의 수급으로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을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리엘의 대답에 잠시 생각을 하던 강민은 그녀에게 말했다.
“흠……. 이제 어느 정도 안정화된 시스템을 그런 일로 중단할 것까진 없을 것 같아.”
“그럼요?”
“나중에 있을 웜홀 폭주에 대비해서 훈련한다 생각하면 되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자. 어차피 이런 난리를 피우는 것은 다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시일이 지나면 이번 일의 핵심 악마들이 알아서 기어 나올 거야. 그때 제대로 응징해 버리면 되겠지.”
“민의 생각이 그렇다면야…… 알겠어요. 조금 더 기다려 보죠.”
그리고 강민의 생각처럼 그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