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현세귀환록
166. 등장(2)
둘이 해체를 하는 동안 검은 구체는 점점 더 커졌고, 기분 나쁜 기운 역시 구체가 커지면서 같이 퍼져갔다. 거의 직경 2미터에 이를 정도로 커진 구체는 더 이상 커지지는 않았는데 기분 나쁜 기운은 점점 더 짙어졌다.
이쯤 되자 구체를 등지고 작업을 하던 진성과 수철 역시 이 구체의 등장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구체에서 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먼저 구체를 알아차린 것은 그래도 조금 더 강한 수철이었다.
“어? 뭐야 저건?”
수철의 말에 진성 역시 뒤를 돌아보았고, 당연히 구체의 등장을 파악하였다.
“뭐 말이에요? 어? 저런 건 처음 보는데…….”
“웜홀 탐색기에 잡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웜홀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요. 뭔지 기분 나쁜 느낌이네요.”
진성의 마지막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잠시 구체를 바라보던 수철은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진성에게 말했다.
“야, 얼른 정리하고 빨리 뜨자. 왠지 기운이 심상치 않아.”
“알겠어요. 어차피 레드 맨티스의 핵심 부분인 마정석하고 칼날 부분은 챙겼으니, 얼마 안 하는 외골격은 단단한 등 부분만 챙기고 가요.”
“그래.”
말을 마친 둘은 완만한 곡선을 가진 소검으로 레드 맨티스의 등 부분을 서둘러 절개하여 갔다. 하지만 그 크기가 있다 보니 등만을 잘라내는데도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러던 중 지금까지 기분 나쁜 기운만을 풍겨내던 검은 구체가 터지는 듯한 모습으로 흩어지며 사라졌고, 그 구체가 사라진 곳에서는 2미터가 넘어 보이는 사람 형태의 무엇인가가 나타나 있었다.
“헛!”
레드 맨티스를 분해하면서도 구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수철은 갑자기 나타난 인영(人影)에 놀라 신음성은 내었고, 진성 역시 그 소리에 놀라서 인영을 바라보았다.
사람 모습의 인영은 정확히 말해서 사람은 아니었다. 검붉은 피부는 둘째 치더라도, 머리에 달린 손가락만 한두 개의 뿔은 그가 사람이 아님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 인간형 마물인가 봐요, 형!”
“마물은 아냐, 마나 충돌이 없잖아.”
마나장 통합이 진행되며 마나 충돌이 약해져 가고는 있지만, 아직도 분명히 마나 충돌은 있었다. 그렇기에 웜홀에서 튀어나오는 마물들은 그들의 표면에 마나 충돌로 인한 불꽃이 튀는 것이 아직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온 마물은 그런 마나 충돌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당황한 얼굴로 대화하는 수철과 진성을 흘깃 본 뿔 달린 마물은 입맛을 다시더니 입을 열었다.
“흐흐. 운이 좋군. 이곳에 오자마자 이런 별식이라니 말이야. 크크크.”
당연하게도 둘은 마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마물의 표정과 행동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알 수가 있었다.
“야. 심상치 않다. 전투준비해.”
“네. 근데 우리끼리 가능할까요?”
“일단 부딪혀보고 안 되면 플랜B다.”
“알겠어요.”
플랜B라는 말은 도주할 때 하는 행동에 대해서 사전에 둘이 정해 놓은 룰이었다. 가끔 등급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진 마물이 등장할 때가 있었기에 부득이하게 정해 놓은 절차였다.
일반적으로 마물이 등장할 때 웜홀 탐색기에서 그 마물의 등급까지 측정해서 미리 알려줬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능가하는 마물을 잡으려 하는 헌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갑자기 튀어나온 이 마물은 그런 절차가 없었기에 어느 정도 급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둘은 플랜B까지 가정하면서 마물을 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휘익-! 퍽! 퍽!
순식간에 달려든 마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둘의 심장을 뽑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둘의 심장을 양손에 든 마물은 피가 뚝뚝 흐르는 심장을 보며 입맛을 다시더니 게걸스럽게 두 심장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우적우적.
이런 일은 이곳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 수백여 군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KM그룹 회장실에서 집무를 보고 있는 강민과 유리엘의 앞에 순식간에 반투명한 금발의 미녀가 나타났다. 바로 제니아였다.
갑작스러운 제니아의 방문에 유리엘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니아. 정기 보고 시간이 아닌데 웬일이야?”
[유리 님. 긴급 보고 사항이 있어서 내려왔습니다.]
“긴급 보고? 무슨 일이야?”
[말씀드리는 것보다는 영상으로 보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제니아는 강민과 유리엘의 앞으로 커다란 스크린을 띄워서 영상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제니아가 보여주는 영상은 다양한 모습의 마물들이 헌터를 먹어치우는 장면들이었다. 대다수의 마물들은 인간 형태와 흡사한 마물이었지만, 일부는 무엇을 닮았다고 딱히 정의하기 어려운 괴이한 형태의 마물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마물들은 하나같이 마나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흠. 저건…….”
“이차원(異次元)의 마물이 아니라 현 차원의 악마들이네요.”
“어쩐지 균열이 닫히지 않고 계속 지속되는가 싶더니, 어디서 악마 한 마리가 올라왔나 보군.”
“보아하니 꽤나 고위 악마인가 봐요. 이렇게까지 소환 의식을 벌인 것을 보니 말이에요.”
“고위 악마 한 마리로 보기에는 지금 소환구(召喚球)의 개수도 너무 많고, 그것이 펼쳐진 범위도 너무 넓은 것 같은데?”
“음……. 지금 정도의 균열에서 여러 마리가 한 번에 튀어나오긴 힘들었을 테고, 그렇다면 균열을 뚫고 올라온 최고위 악마가 고위 악마를 불렀고, 그 악마들이 각자의 부하들을 소환한 것이겠군요.”
“그런 것 같아. 그리고 아무래도 다수를 대상으로 소환 의식을 펼치다 보니 의식의 장악력이 떨어져서 이렇게 소환구가 전 세계에 퍼져서 나타난 것이겠지.”
“인간들의 공포를 조장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일 수도 있겠죠.”
굳이 마나 위성으로 낱낱이 지켜보지 않더라도 장구한 세월 동안 별의별 경험을 다 해본 강민과 유리엘은 대화를 통하여 정답에 가까운 추론을 해내었다.
“최고위급 악마라. 어느 정도 수준일까요? 볼테르 수준까지 기대해 볼 수 있을까요?”
“글쎄, 볼테르는 마나 문명이 발달한 그곳에서도 수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녀석이니 그 정도는 안 될 것 같은데.”
“음……. 그럼 리카도?”
“이로스트 차원의 마왕 말이지?”
“네, 그 녀석요. 상당히 지저분하게 싸웠던 것이 기억나네요.”
“뭐 그 정도 수준이라면 이곳에서도 가능성이 있겠지. 어쨌든 고위 악마라면 오랜만에 손맛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호호호, 민이 손맛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상대나 될까요?”
마신이 등장한다면 또 모를까, 고작 마왕급 마족쯤을 처리하는 것은 둘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의 인간들에게는 달랐다. 마왕급, 아니, 마공작급만 등장하여도 세계적인 규모의 재앙이 벌어진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런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강민은 유리엘에게 대응 방안을 물었다.
“뭐 그 최고위급 악마는 우리가 처리한다 하더라도, 밑의 녀석들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최고위급 악마만 없다면 다른 녀석들은 이 세계의 이능력자들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할 것 같은데요? 시스템을 통해서 보니 최근에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녀석도 세 명이나 되고 마스터급은 두 자릿수가 넘으니 말이에요.”
“그 정도야? 내가 이들을 과소평가했나 보군.”
제니아 시스템이 가동된 지 아직 1년이 채 안 되었는데, 나온 결과물은 최초의 예상을 월등히 초과한 것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비인부전(非人不傳)의 원칙이 깨어진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제니아 시스템이 생기기 전에는 대부분의 무공이나 마법 등의 비전(秘傳)은 도제식으로 비밀리에 전수가 되었다. 그래서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인연이 닿지 않으면 제대로 된 비전을 익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니아 시스템의 등장은 그런 비전에 대한 제한을 모두 날려 버렸다. 능력만 있으면 언제든지 자신에게 맞는 무공과 마법과 이능을 배울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정체되어 있던 능력자들의 극적인 성장이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어쨌든 능력자들은 충분히 있으니 그들에게 적절한 동인(動因)만 제공한다면 처리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요.”
“어떤 동인을 주려고 그래?”
강민의 물음에 유리엘은 웃으면서 대답하더니 제니아를 불렀다.
“호호호, 다 방법이 있지요. 제니아.”
강민과 유리엘이 대화하는 동안 가만히 선 자세로 대기하고 있던 제니아는 유리엘의 부름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유리 님.]
“악마 척살 퀘스트를 공지해.”
유리엘이 생각한 동인은 바로 퀘스트였다. 그리고 그 퀘스트에는 당연히 보상이 뒤따를 것이었다.
[퀘스트라면…….]
“지금 웜홀 탐지 시스템처럼 악마 탐지 시스템을 만들어서 배포하고, 악마의 등급별로 포인트를 부여해서 카르마 포인트와 연동하면 되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공지를 하겠습니다.]
유리엘의 말에 제니아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려 하였으나, 이어지는 유리엘의 말이 그녀를 잡았다.
“아, 한 가지 더. 최고 득점자에게는 아이란 차원에 있던 전설의 드워프 지그문이 만든 성검 히페리오네를 준다고 해.”
[타 차원의 마법기를 이 차원으로 가져오면 단지 튼튼한 검의 효능밖에는 없을 텐데요?]
마나 충돌은 생명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기에 제니아의 그런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그 튼튼한 검의 효능만 해도 대단한 것이지만 마나 능력을 쓰지 못한다면 그 가치는 반토막, 아니, 반토막보다 더 떨어질 것이었다.
“어차피 기존의 술식이 짜여져 있으니 마나만 이곳의 마나로 대체해서 주입하면 비슷한 효능이 나올 테니 걱정하지 마.”
히페리오네는 아이란 차원의 전설적인 영웅인 드리시스의 애검으로, 폭풍과 벼락을 부르는 검이라는 뜻으로 스톰브링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던 검이었다.
하지만 폭룡 케르빈이 드리시스 제국을 통째로 삼키면서 같이 넘어가게 되었는데, 훗날 강민이 케르빈을 해치우면서 유리엘의 창고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강민은 히페리오네를 언급하는 유리엘의 말에 새삼 생각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히페리오네라. 최소 검강지경은 되어야지 그 검에 담긴 경력을 감당할 수 있겠네.”
“뭐 어차피 최고 포인트 득점자는 그랜드 마스터급은 되지 않겠어요?”
“그렇겠지. 아, 그럼 만일 마법사나 초능력자면 어쩌려고?”
“음. 아마 검사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겠지만, 만일의 경우도 있으니 준비는 해놓아야겠네요. 마법사는 토니우스의 지팡이면 될 것 같고, 초능력자면 마시리카의 증폭 팔찌 정도면 되겠네요. 뭐 상황 봐서 준비해주죠. 호호호.”
어차피 유리엘의 창고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법 물품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몇 개 꺼내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대로 쓸 수는 없는 것이, 마법 물품에 담긴 마나의 성질이 차원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 차원에서 쓸 수 있게 하려면 히페리오네처럼 그녀가 별도로 가공을 해주어야 한다는 수고로움은 있었다.
유리엘의 지시사항이 다 끝나자 제니아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후 스르륵 사라졌다.
그리고 제니아 시스템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별 퀘스트다. 그리고 월드 퀘스트지. 아는 사람은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마계의 악마들이 물질계로 기어 올라왔다. 어차피 그놈들은 너희들을 노리고 있으니 당연히 싸워야 하겠지만, 특별히 주인님께서 너희들에게 그놈들의 척살을 퀘스트로 부여하라 하셨다. 자세한 내용은 시스템의 퀘스트창을 확인하도록 해. 그럼 건투를 빈다.]
퀘스트 창의 내용은 유리엘이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악마의 등급별 지급 카르마 포인트가 있었고, 1등을 한 자에게는 특별한 무구가 수여된다는 내용까지 명시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