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165화 (165/203)

# 165

현세귀환록

165. 등장(1)

오 분여의 시간이 지나자 백무성의 머리 위쪽으로 거무스름한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마봉의 고통에 활성화된 심마가 극도로 분노하며 실체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허어…… 저게 대체 무엇인가?”

실체화된 심마는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었기에, 대각선사 역시 그 심마의 실체를 확인하고 곁에 있던 유리엘에게 말을 건넸다.

“저게 백 가주를 홀린 심마의 실체지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전체가 다 빠져나오면 민이 처리할 테니까요.”

유리엘의 말처럼 검은 안개 형체의 심마는 아직 백무성의 몸을 다 빠져나온 것이 아니었다. 꼬리라 할 수 있는 하단부가 아직 백무성의 정수리와 맞닿아 있었던 것이었다.

실체화된 심마는 자의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보여주기나 하는 듯 심마는 지속적으로 꿈틀거리면서 백무성의 몸으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강민의 사용하는 제마봉에 무언가 특수한 기운이 있는지 다시 돌아가지는 못하고 계속해서 백무성의 백회혈 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다시 삼 분여의 시간이 지나자 검은 심마의 형태는 처음보다 두 배는 더 커져 백무성의 머리통만 한 크기까지 커졌다. 그리고 그 꿈틀거림은 더 격렬해졌다.

이윽고 백무성과 심마가 완전히 분리되었다. 심마의 꼬리와 백무성의 정수리가 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을 확인한 강민은 지금까지 백무성을 두들기던 제마봉을 하늘을 향해 세우더니 그대로 그의 머리를 향해, 정확하게는 심마를 향해 내려쳤다.

휘이잉!!

화려한 빛을 뿌리며 백무성의 머리를 부술 것 같은 기세로 떨어지던 제마봉은 정확히 그의 정수리에서 멈춰 섰다. 즉, 심마만을 꿰뚫어버린 것이다.

심마는 실체가 없는 존재라 박살 나서 흩어졌지만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만, 백무성이 털썩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심마가 빠지면서 생긴 허탈감 때문인지, 아니면 강민의 제마봉에서 나온 경력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백무성은 의식마저 잃어버린 상태였다.

“무성!!”

친우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대각선사는 서둘러 백무성에게 다가가서 그를 부축했다. 하지만 백무성은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일시적인 탈력감 때문이니까요. 우선 방으로 눕히지요.”

대각선사가 백무성을 안아 방으로 옮겼고, 일행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백두일맥의 일원들은 아무도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오지 않았다.

그것은 애초에 대각선사와 백무성이 이야기를 나누던 담화청(談話廳)이 본가의 중심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었고, 대각선사와 긴밀한 대화를 하기 위해서 수발을 하던 인원까지 백무성이 다 물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투가 일어나며 큰 소음이 발생하여 충분히 알아차릴 수도 있었을 것이나, 강민이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전투의 시작과 동시에 차음강막을 펼쳐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치하였기 때문에 아직 백두일맥에서는 가주가 쓰러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강민과 유리엘이 자리를 잡자,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백무성을 바라보던 대각선사가 입을 열었다.

“무성은 괜찮은 건가?”

“괜찮을 겁니다. 다만.”

“다만?”

“섣불리 광검지경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자제를 해야겠지요. 아무래도 한 번 발현한 심마라 다시금 같은 방식으로 발현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만약 스스로 심마를 극복해 냈다면 완전히 광검지경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나, 백무성은 강민의 도움을 통해서 심마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그 말은 심마가 발현한 원인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이 상태에서 같은 방식으로 또다시 광검지경으로 들어가고자 수련을 한다면 다시금 심마에 장악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영영 수련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대각선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강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수련을 해야겠지요. 지금 백 가주의 상태는 검강지경과 광검지경의 사이에 있는 정도의 경지라 할 수 있지요. 정확히 말하면, 정신은 검강지경인데 신체적 경지는 광검지경의 초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상태를 계속 둔다면 정신과 신체의 괴리로 인하여 또다시 심마가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니 수련을 서둘러야겠지요.”

“음? 앞의 말과는 다르지 않은가?”

앞서 강민은 광검지경의 문을 두드리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고 하였기에 대각선사는 이를 지적하며 말했다.

“경지를 넘는 수련을 자제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수련 자체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검강지경의 수련을 거듭하다 보면 다시금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때의 길은 지금 갔던 길과는 다른 길이겠지요. 아무래도 신체는 광검지경에 들어가 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말이군…… 알겠네. 내 그리 전해 주겠네.”

“그럼 저희는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제 할 말을 마친 강민과 유리엘을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는데, 대각선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기다려 주게나!”

“무슨 일이시지요, 선사님?”

무언가 이야기하려던 대각선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음…… 아닐세. 아. 자네, 혹시 우리 금강선원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했던 일 기억하는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탁할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과거 강민이 금강선원을 떠날 때, 금강선원의 대제자였던 진운이 강민에게 나중에 부탁할 것이 있다는 언급을 했었다. 그리고 망각을 모르는 강민은 당연히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나중에 부탁할 테니 외면하지 말아주시게나.”

“네, 그리하지요. 선사님.”

그렇게 강민과 유리엘은 자리를 떠났고, 의식을 잃은 백무성과 대각선사만이 방에 남았다. 대각선사는 가만히 백무성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였다.

‘무성, 너무 급하게 마음먹지 말게나. 지금껏 우리가 준비한 것들이 틀리지 않았어. 그 오랜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이 아니란 말일세. 천기가 극도로 어지러운 것을 보니 조만간 일이 터질 것 같은데 그때까지 힘을 내시게나…….’

* * *

“진성아! 화염구!!”

30대 정도로 보이는 장검을 든 사내가 뒤에 있는 20대 청년의 이름을 부르며 외쳤다. 장검을 든 사내의 전면에는 대략 5미터 정도 크기의 마물이 날카로운 팔을 위협적으로 휘두르고 있었는데, 생긴 모습이 붉은색의 사마귀와 흡사하였다.

“네, 수철이 형!”

진성은 수철에게 대답하며 빠르게 정신을 집중하더니 전면을 향해 양손을 내밀었다. 별다른 수인도 영창도 없었지만, 진성의 손 앞에는 축구공만 한 화염구가 나타났다. 마나의 발현 형태로 보아 마법이 아니라 초능력 계통의 이능으로 보였다.

그렇게 나타난 화염구는 진성의 손짓에 따라 사마귀의 머리통을 향해서 날아갔다. 사마귀는 자신의 전면에서 검을 휘두르는 수철에게 집중한다고 아직 화염구에 대해서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퍼--엉!

당연히 화염구는 마물에게 적중하였는데, 진성이 사용한 화염구는 일반적인 화염구와 전개 양상이 달랐다.

보통의 화염구는 폭발과 동시에 사라지지만, 지금의 화염구는 마물의 머리에 들러붙어 지속적인 화염 피해를 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건 마치 휘발유를 담은 화염병이 터진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계속해서 피어오르는 불꽃에 마물의 시야가 제한되었는지, 수철을 노리고 팔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와우! 좋은데? 그럼 끝내 보자고!”

불타오르는 마물의 모습을 보던 수철은 진성을 보며 한마디 던지더니 짧게 짧게 스텝을 밟아가며 마물이 휘두르는 팔을 피해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만일 마물이 제대로 시야를 확보하고 있었다면 접근하는 것도 조심스러웠을 테지만, 지금의 마물은 아직까지 불타고 있는 화염 때문에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상태였다.

그렇게 마물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수철은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이미 자신의 장검을 샤이닝 상태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윽고 마물이 크게 오른팔을 휘두르며 빈틈이 생기자, 수철은 망설이지 않고 마물의 목을 향해 검격을 날렸다.

샤아악~!

샤이닝 상태의 수철의 검은 어렵지 않게 마물의 목을 베어냈고, 목을 잃은 마물은 몇 차례 버둥거리다 털썩하고 쓰러져 버렸다.

쓰러진 마물에게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기에 죽은 것이 분명하였지만, 그때 뒤쪽에서 다급한 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조심해요!”

이미 마물이 죽었는데 진성은 수철에게 경고의 말을 던졌고, 수철 역시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대답을 하였다.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새삼 경고야. 엇차!”

수철은 진성의 말에 대답하면서 뒤로 풀쩍 뛰었는데, 수철이 자리를 피하자마자 마물의 복부 부분이 터지면서 녹색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퍼억!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튄 체액은 단순한 녹색 액체가 아니었다.

치이이이익-

마물의 체액은 강력한 독성이나 산성을 머금고 있는지 타는 소리를 내며 주위의 나무를 한동안 녹였다.

수철이 마물의 체액을 안전하게 피해낸 것을 확인한 진성은 다시금 수철에게 말했다.

“저번에 깜빡한 건 잊었나 봐요?”

“야. 그때는……. 에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래 고맙다, 고마워.”

“그러니까 나한테 잘하라고요. 히히.”

둘은 장난스러운 말을 주고받으면서 뒤쪽에 준비했던 배낭에서 푸른색 약품을 꺼내더니 마물의 체액이 떨어진 곳에 뿌렸다.

약품은 마물의 체액을 중화시켜주는 역할을 하는지 약품이 뿌려진 자리에는 더 이상 타는 듯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약품을 꺼내서 뿌리는 모습이 익숙해 보이는 것이, 한두 번 해본 솜씨는 아닌 것 같았다.

대강 상황을 마무리한 수철은 사마귀의 사체를 살펴보고 있는 진성에게 말을 건넸다.

“진성아. 고생했다. 근데 화염구가 전과는 다른데? 어떻게 된 거야?”

“아. 얼마 전에 얻은 카르마 포인트로 화염 지속에 관한 능력을 배웠어요. 거기에 150포인트나 썼다구요.”

150포인트가 적은 수치는 아니었는지 수철도 약간 놀란 얼굴로 진성의 말을 받았다.

“150포인트? 무리했는데? 근데 얼마 전에 배웠는데 벌써 이렇게 실전에 쓸 만큼 수련한 거야?”

“아무래도 지금 쓰는 화염구와 상성이 맞아서 그런가 봐요. 그래도 아직 숙련도는 5밖에 안 돼요. 안내 영상을 보니 숙련도를 올릴수록 화염의 범위도 넓어지더라구요. 쓸 만한 것 같아요.”

“쓸 만한 정도가 아니지. 최고네 최고! 하하하하.”

수철의 칭찬에 진성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형도 카르마 포인트가 200 정도 있었잖아요. 뭐 배운 것 없어요?”

“그게…… 200포인트짜리 맹호검법을 배우려고 하는데, 능력 등급에 제한이 있어서 아직 보류 중이야.”

“어디에 제한 걸린 거예요?”

“신체등급 쪽인데 아무래도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서는 민첩성 쪽을 올려야 할 거 같아.”

수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진성은 레드 맨티스의 팔을 들어 올리며 지겹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렇구나. 어쨌든 레드 맨티스는 이제 그만 잡는 게 어때요? 돈도 별로 안 되는데 말이에요.”

“야, 그래도 우리 둘이서 잡기에는 이 녀석만큼 편한 게 없어. 괜히 무리하다가 비명횡사한다. 그리고 돈 안 된다고 하지만 잘만 팔면 일억까지는 받잖냐.”

“에이~ 언제적 이야기예요? 요즘 시세는 오천만 원 정도밖에 안 되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만…… 에휴. CD급 마물이 5천이라니, 세상이 좋아진 건지 안 좋아진 건지…….”

차원 통합이 본격화되기 전만 하더라도 C급 마물의 사체는 보통 5억에서 많이 받으면 10억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나장의 통합이 진행되며 웜홀의 출현 빈도가 급속하게 많아졌다. 웜홀이 많이 나타났다는 말은 마물의 출현 역시 많아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되다 보니 마물 사체의 가격은 급속도로 떨어졌다.

물론 아직 B급 이상의 고급 마물은 상당한 가치가 나가지만 C급 이하의 중·하급 마물의 가치는 폭락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떨어져 버렸다.

더군다나 이런 마물들을 잡을 수 있는 헌터의 숫자 역시 제니아 시스템의 등장으로 폭증하자 마물의 공급이 수요를 월등히 초과하면서 가격 하락을 가중시켰다.

“어쨌든 형도 이제 B급에 들어섰고, 나도 CA급까지 올라왔는데 계속 이런 CD급 마물만 노릴 필요는 없잖아요. B급에도 도전해보는 게 어때요?”

“아서라. 진짜 비명횡사하고 싶어? 저번에 진호 형 팀에서 B급 잡으려고 하다가 팀원 다섯 명 중에서 세 명 죽고 진호 형하고 승찬이만 간신히 살아남았다더라.”

“진짜요? 진호 형이라면 BD급일 텐데…….”

“BD가 아니라 BC래. 근데도 그랬다더라고. 여튼 네 말 알겠으니 CA급 마물까지는 사냥 범위에 넣어볼게.”

“헤헤. 그래요, 형.”

그렇게 수철과 진성이 특이하게 생긴 칼을 꺼내서 레드 맨티스를 해체하는 동안 그들의 뒤에서는 왠지 모를 기분 나쁜 기운이 풍겨 나오더니, 갑자기 검은색 구체가 나타났다.

하지만 둘은 레드 맨티스의 해체에 집중하느라 아직 이 구체의 출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