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현세귀환록
163. 광검(2)
강민의 목소리였다. 강민과 유리엘은 백무성과 대각선사가 한창 대화를 하는 중에 도착했지만, 적이 아닌 손님의 입장으로 왔기에 먼저 온 선객을 무시할 수 없어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심마가 발현한 것을 느끼고 그 심마가 골수로 파고드는 것까지 확인한 마당에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서 끼어든 것이었다. 더군다나 심마에 사로잡혀서 하는 말 자체가 강민의 헛웃음을 자아냈기에 끼어들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누구냐!!”
차음강막을 뚫고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기에 백무성은 경호성을 내며 방문을 열었다.
백무성과 같이 있던 대각선사는 밖의 강민을 보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강민이 누군지 알아본 눈치였다.
강민을 기억해 낸 대각선사는 백무성에게 뭔가 말을 전하려고 했으나 강민의 말이 더 빨랐다.
“그렇게 보고 싶어 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나타나니 불청객 취급이군.”
강민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초대를 했다는 것인데, 근자에 백무성이 초대한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 말은…… 당신이 퍼니셔?”
“그렇소. 당신 손자를 구해줬다는 말도 들었을 텐데, 이런 불청객 취급인가?”
“아…… 미안하오. 차음강막을 뚫고 대화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못해서, 내 당황했던 것 같소. 이리로 드시오.”
백무성은 심마가 골수에 파고들었지만, 아직 심마에 완전히 장악당하지는 않았는지 폭급한 성격까지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강민과 유리엘까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대각선사가 강민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시오. 그때 그 청년이 이렇게 퍼니셔라는 이름을 달고 이능 세계를 좌지우지할 줄은 몰랐다오. 대각이라 하오.”
“기운을 보니 예전 금강선원에 계셨던 것 같습니다만.”
대각선사의 기운은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강민이 이 차원으로 귀환하여 처음 방문하였던 이능 단체인 금강선원에서 느껴본 적이 있는 기운이었기 때문이었다.
“맞소이다. 당시에는 이 늙은이가 수행 중이라 제자들만 내려보냈지요. 이리될 줄 알았으면 그때 인사라도 나누는 건데 아쉽구려.”
“인사야 지금 하면 되지요. 반갑습니다. 강민이라고 합니다.”
강민의 인사에 옆에 있던 유리엘도 같이 인사를 하였다.
“유리엘입니다. 당시에 보여주신 후의 잊지 않고 있습니다.”
“허허. 후의라 할 게 뭐 있소이까?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오.”
당시 금강선원에서는 강민과 유리엘을 위해 상당한 편의를 제공한 바가 있었다. 제자 중 한 명의 목숨을 구해주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을 생각하더라도 금강선원에서는 둘에게 많은 후의를 보여주었다. 분명 대각선사의 입김이 들어갔을 부분이었다.
그렇게 대각선사와 강민 일행이 인사를 나누는데 백무성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며 강민에게 질문을 던졌다.
“말씀 중에 미안하오만, 아까 전의 말을 더 듣고 싶소이다. 광검으로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말 말이오.”
아직 완전히 폭급한 성정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벌써 상당히 조급한 모습이 보이는 백무성이었다. 그런 백무성을 바라보던 강민이 입을 열려고 할 때 유리엘의 심어가 들려왔다.
[과연 광검지경에 도달하긴 하였군요. 대단하긴 하네요.]
유리엘이 대단하다는 것은 광검지경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광검지경이 이능력자 중에서도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할 정도의 경지는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말은 백무성이 시스템을 이용하지도 않고 홀로 광검지경에 도달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건 지구의 열악한 마나 환경에서 광검지경이라는 상당한 수준의 경지가 탄생했다는 것에 대한 치하였다.
실제로 그녀가 만든 제니아 시스템을 이용해서 극도로 수련하다 보면 광검의 경지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백무성은 시스템의 도움도 없이 광검을 이루었다. 그 사실은 분명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유리엘의 대단하다는 말에 강민 역시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건넸다.
[대단하긴 하지만…… 글쎄 아직 완전한 광검지경이라 하기도 힘든 상태이지. 더군다나 저 심마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경지에 안착하기도 전에 심마에 먹혀서 마인이 되고 말겠지.]
[하긴 그렇죠. 광검지경 초입의 마인화라…….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불쌍하다고 해야 하나…….]
[뭐 둘 다겠지.]
대단하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대단한 것이었다. 광검지경 자체가 이곳에서 드문 경지인데, 그 경지에서 마인화가 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었다.
마족으로 쳐도 광검지경이면 꽤나 상위권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니, 마족과 달리 힘의 사용에 제약이 없는 물질계의 인간이 광검지경의 상태에서 마인화가 된다면, 자칫 잘못하면 전 세계를 파멸에 몰아넣을 수 있는 강대한 힘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반면 불쌍하다는 것은 광검지경에서 마인화가 된 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완전한 죽음이 되는 것이었다. 광검지경 이상의 경지에 들어서면 윤회의 고리가 끊어져서 죽음을 맞는다 하여도 다른 영혼들처럼 영혼이 명계(冥界)로 가지 않게 된다.
대신, 자격을 유지하고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신선들의 땅인 영계(靈界)로 들어설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지에 안착하지도 못하고 마인화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만일 광검지경에 완전히 안착한 뒤에 마(魔)에 빠져든다면 마선(魔仙)이 될 수도 있었다. 마선 역시 신선의 일종으로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 영생을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백무성의 경우처럼 갓 광검지경에 들어서고 아직 그 경지에 안착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인화가 된다면 명계에도, 영계에도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그냥 물질계에서 사그라질 뿐이었다. 유리엘이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강민이 유리엘과 심어를 나누는 동안에도 참지 못하겠는지, 백무성은 강민에게 한 번 더 물었다.
“내 말 안 들리오? 무슨 의미냐고 물었소.”
“우선 말을 정정해 주지요. 초입의 광검으로는 지금 이 세상을 구할 수 없다고 말이죠. 즉, 평소 이 차원의 마나 문명 수준이었다면 광검, 뭐 초입이라 해도 광검이니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 평소가 아니지 않소?”
평소 지구의 마나 문명 수준은 그랜드 마스터 정도가 최강자였기에 광검지경이라면 독존(獨尊)을 외쳐도 될 만큼 높은 경지였다.
하지만 강민의 말처럼 지금은 평소가 아니었다. 몇 년 안에 차원 통합의 전조현상인 마나장 통합이 일어날 것이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다른 차원에서 수천수만의 마물이 들이닥칠 가능성이 컸다. 그 마물들 중에는 그랜드 마스터도 우습게 알면서 광검지경을 넘나드는 마물이 있을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아직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이 세계로 현현한 아바투르라는 악마도 수많은 부하를 풀기 위해 준비하에 있었다.
마계의 삼마왕 중 하나인 아바투르 역시 초입의 광검지경으로는 힘든 상대라 할 수 있었다.
백무성 역시 한때 위원회의 위원이었기에 아바투르에 대한 것은 몰라도 차원 통합에 관련한 정보는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었다.
“이 광검이 어떤 것인지 알고나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하군. 내 자네를 보고 싶어 했던 것은 이 검을 얻기 전이지, 이 검은 얻은 지금은 더 이상 자네의 도움은 필요 없네. 보아하니 그랜드 마스터의 끝에 있는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이 광검을 가늠할 수는 없을 걸세.”
만일 백무성이 심마에 빠지지 않았다면 강민의 무위를 그 정도로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분명 심도 있는 탐색을 통해서 그의 무위를 일말이라도 파악했을 것이지만, 지금 백무성은 심마에 빠져 신중함을 잃고 단순히 표면적으로 강민이 보여주고 있는 무위를 전부로 알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백무성의 판단력은 그랜드 마스터급이었던 메르딘보다도 훨씬 떨어지는 것이었다.
백무성의 어이없는 말에도 강민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게 보인다면 그렇게 생각하도록. 어쨌든 만나자고 한 쪽이 이제 의미 없다고 하니 이번 만남은 여기서 끝내지.”
강민은 그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유리엘에게도 심어를 보냈다.
[결계는 다 살펴봤어?]
강민과 유리엘이 처음 이곳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곳에 펼쳐진 독특한 결계 때문이었다. 그래서 강민은 유리엘이 목적을 달성했으면 미련 없이 떠나려고 그녀에게 물었다.
[네, 이 건물 뒤쪽 건물 지하에 결계의 핵이 있는 것 같은데, 대강 어떤 원리인지는 알겠네요. 특이한 것은 그 핵이 하나의 결계가 아닌 두 개의 결계를 동시에 관장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 열어봐야 할까?]
[음……. 한 핵에 두 결계를 연동하는 것이 드물긴 하지만 뭐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니 괜찮아요. 다 파악했어요. 굳이 뜯어볼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면 됐군. 그럼 가지.]
강민의 가자는 말에 유리엘은 잠깐 망설이더니 심어를 보냈다.
[……그런데 저 심마를 두고 그냥 갈 거예요? 만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강호의 할아버지잖아요. 잘못된다면 강호가, 아니, 수아가 힘들어하지 않을까요?]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닌데, 지금 저 노인의 상태가 치료를 받을 상황이 아닌 것 같군.]
[음……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겠네요.]
[그래, 아직 완전히 잠식되지는 않았으니 앞으로 한번 지켜보지.]
강민은 지켜볼 것이라 말했지만, 지켜볼 시간은 길지 않았다. 강민과 유리엘이 심어를 나누는 동안 백무성의 표정은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렇게 분노하는 이유는 사실 별것도 아니었다. 강민의 마지막 말이 묘하게 짧아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뿐이었다.
지금까지 대화에서 강민은 그래도 백무성이 백강호의 할아버지라 최소한의 존대 정도는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말에서는 그것마저 생략한 채 짧게 말을 하였다. 이미 심마에 먹혀 더 이상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이 백무성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였다.
이미 백 세에 가까운 삶을 살아오고 있는 자신에게 이제 서른이 약간 넘어 보이는 강민이 반말지거리를 하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이 또한 평소의 백무성이라면 별로 개의치 않았을 일이었다. 애초에 나이로 사람을 판단할 정도로 그의 수행이 낮지 않았고, 생각이 깊은 평소의 백무성이라면 필시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하였을 것인데, 지금 그는 그런 생각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강민의 말에 반응하는 그의 대답도 곱지가 않았다.
“이놈! 네놈이 약간의 강함을 얻었다고 이렇게나 오만방자한 것이냐! 내가 너를 징치하여 장유유서의 법도를 세우겠다!”
강민은 그냥 놓아두고 떠나려는데, 결국 백무성이 벌떡 일어나며 강민을 잡는 형국이었다.
“허참…… 운이 좋은 것인지 운이 없는 것인지.”
“뭐라?!”
“뭐 이것도 당신의 복이겠지. 일단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