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현세귀환록
162. 광검(1)
“어, 어떻게…… 그 사실을…….”
백두일맥이 위원회의 멤버라는 것은 이미 이능 세계에서 그리 큰 비밀은 아니었다. 누구나 아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이능 세계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조사를 한다면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위원회가 없어졌다는 것은 위원회의 위원들 그리고 그들이 속해 있는 집단의 지도부가 아니면 아직은 알 수 없는 정보였다.
백강호는 백두일맥의 후계자이기에 위원회의 해체에 대해서 얼마 전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을 강민이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그의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 아직 완전히 알려진 정보는 아닌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위원회를 공개적으로 해체하라고 하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네? 그게 무슨…….”
백강호가 여전히 못 알아듣는 눈치이자 유리엘이 한마디 거들었다.
“올림포스의 메르딘 의장에게 위원회 해체를 요구한 것이 민이야.”
유리엘의 그 말에 백강호는 놀라움을 넘어 경악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부릅떴다. 그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저번의 구함을 받을 때 들어 강민이 퍼니셔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백강호가 생각하는 퍼니셔의 무력은 다른 이능력자들이 그렇듯 그랜드 마스터 정도였다. 그 때문에 단신으로 위원회의 해체를 요구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만일 위원회의 의장인 메르딘이 살아남기 위해 극도의 저자세를 취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백강호는 더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강민은 굳이 그런 사소한 일들에 대해서까지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놀란 그의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또 다른 일을 말하며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뭘 그렇게 놀라? 표정을 보니 제니아 시스템을 만든 것이 유리라고 말하면 기절할지도 모르겠군.”
이번에는 백강호뿐만 아니라 모두가 유리엘을 보며 경악하였다.
“헉! 저, 정말 누님이 만드신 거예요?”
“헐…… 대박…… 진짜 언니가 만든 거예요?”
아직 제니아 시스템에 대해서 체감하지 못하는 유키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깜짝 놀라며 한마디씩 했다.
강민은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던졌지만, 제니아 시스템은 그렇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업적이었다. 신의 이적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큰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뭘 그런 이야기까지 해요. 호호호. 어쨌든 다들 잘 사용하고 있지? 그래도 꽤나 신경 쓴 시스템이야. 잘 사용해서 얼른얼른 성장하렴. 호호호.”
“어쨌든 이런 이야기는 됐고, 우리는 백 가주를 만나러 갈 테니 너희들은 한국으로 돌아가 있어. 궁금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말이야.”
다들 시스템에 대한 질문을 하려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지만 강민은 말은 끊고 상황을 정리하였다.
궁금증이 많은 일행은 다소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지금은 그런 질문을 할 상황이 아님을 깨닫고 강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으로의 귀환은 너무도 간단하였다. 꼼꼼하게 자신들의 짐을 정리한 한수강과 한수아가 캐리어를 끌고 거실로 나오자, 유리엘이 가벼운 손짓으로 한국으로 보내 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국으로 보낸 그 인원에는 유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 우리도 출발하지.”
한수아 등을 보낸 후 강민은 백강호에게 말을 건넸고, 강민의 말에 백강호는 앞장서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순간 이동으로 목적지까지 갈 수도 있겠지만, 백두일맥의 본가에는 기이한 결계가 펼쳐져 있어 순간 이동으로 가려면 결계를 힘으로 파훼하고 가야 했다.
한 번에 원리가 파악되는 결계라면 파훼 없이 스며들 수 있었겠지만, 지금 백두일맥 본가의 결계는 아직 그 원리까지 파악하지 못하여 굳이 결계 안으로 가려면 강제로 뚫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굳이 순간 이동을 사용하려면 결계의 외각까지 갔다가 거기서부터 뛰어가도 되겠지만, 결계의 범위가 넓어 사실 의미가 없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강민과 유리엘은 망설이지 않고 백강호의 뒤를 따랐다.
* * *
“무성!! 정신 차리게!!”
흰색 도포을 넉넉하게 입은 흰 머리의 노인에게 회색 가사를 입은 흰 수염의 노스님이 내공까지 실어서 크게 외쳤다. 불문의 사자후(獅子吼)였다.
순간 맑은 기운을 머금은 엄청난 소리가 무성이라 불린 노인을 덮쳐갔다. 살기는 없어 크게 다칠 리는 없었지만, 별다른 방비 없이 정통으로 맞는다면 정신이 번쩍 들 것만 같은 큰 소리였다.
하지만 백두일맥의 가주인 백무성은 마치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대각. 아까나 지금이나 내 정신은 멀쩡하다네. 갑자기 무슨 정신을 차리라는 것인가?”
노스님은 백무성의 오래된 친구로 바로 금강선원의 원주 대각선사였다. 천기를 의논하고자 오랜만에 백두일맥을 방문한 대각선사는 친우인 백무성과 대화하던 중 생각에 잠긴 백무성에게서 뭔가 이상한 기운이 나오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일깨우는 사자후(獅子吼)를 펼친 것이다.
하지만 백무성은 대각선사의 사자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까 전보다 더 강하게 사이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런 백무성의 기운에 당황한 대각선사는 평소 그가 말하던 순리를 언급하며 백무성이 제정신을 찾게 하려고 하였다.
“무성! 어찌 된 것인가! 언제나 순리(順理)를 말하던 자네가 어쩌다 이런 역리(逆理)에 빠져들었나?”
“순리? 역리? 대각, 마음을 따르면 순리이고 마음을 거스르면 역리 아니겠나? 난 과거에도, 지금도 언제나 순리, 내 마음을 따르고 있다네.”
“허어…… 자네는 인도(人道)가 천도(天道)라며 언제나 인간으로 살아가길 원했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모습이 자네가 원하던 모습인가!”
대각선사의 안타까움이 가득 찬 목소리에도 백무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치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태도였다.
“대각, 지금 내 모습이 어떻다는 말인가?”
“자네는 지금 자네에게서 나오고 있는 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불길하고 상서롭지 못한 기운들이 자네에게서 나오고 있다네!!”
대각선사의 말에 백무성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였지만, 스스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되려 너무도 상쾌한 기분이 들어 뭔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만 같았다.
“불길한 기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아, 혹시 지금 내 마음가짐이 바뀌면서 내 진전을 가로막던 구태의연한 생각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것이 아닌가?”
“음?”
“지금 자네와 대화 중에 알게 되었다네. 내가 그간 너무 갑갑하게만 살았어. 순리라는 이름으로 동생도 내치고, 친인들도 희생시키면서 말이야.”
“그, 그건…….”
친인을 희생시켰다는 그의 말에 대각선사가 뭔가를 말하려고 하자, 백무성은 손을 들어 대각선사의 말을 막더니 이야기했다.
“아, 무슨 말을 할지 잘 알고 있으니 굳이 이야기할 것도 없네. 어쨌든 그 당시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으니 후회는 없네만,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한다네.”
“그럼 어떻게 살겠다는 것인가? 자네도 천기를 읽어서 알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어둠에 잠길 시기가 멀지 않았다네. 지금까지 그걸 준비해왔지 않는가! 왜 이제야…….”
“이보게 대각, 자네가 보기엔 내가 이상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지금의 난 자신이 있다네.”
“무슨 자신을 말하는 건가?”
백무성은 대각선사가 되묻는 것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가만히 대각선사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생긴 침묵에 대각선사도 백무성을 마주 바라보았는데, 백무성이 그 전과는 달라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단지 성품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성취가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대각선사의 짐작을 확신시켜 주는 듯 백무성의 대답이 들려왔다.
“내가, 우리 준비한 그 안배와는 관계없이 나 혼자 힘으로 그 어둠을 걷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야.”
“허……. 어찌 그런 만용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가……. 자네도 천기를 읽지 않았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 전부가 어둠으로 물들지도 모르는 일일세!!”
“그래도 보는 것에는 남다른 자네라면 알아차릴 줄 알았건만…….”
“무얼 말인가?”
“나는 얼마 전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났다네. 이제 오롯이 홀로 서는 사람이 되었단 말일세. 선인으로 승천할 수도 있었지만, 승천을 포기하고 나는 하계에 남았네. 하계를 구원하고 덕을 쌓는 적덕선(積德仙)이 되고자 하는 것일세.”
적덕선을 언급하는 백무성에게서는 더 이상 사이한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드러났던 심마가 골수로 파고들어서 숨어든 것이지만, 대각선사는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백무성이 이야기한 대로 자신이 본 것은 백무성의 잘못된 생각이 사라지면서 발현했던 나쁜 기운의 잔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차피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서 승천할 기회를 잡았었다는 백무성의 충격적인 말에, 조금 전 사이한 기운에 대한 생각은 대각선사의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저, 정말인가!!!”
“그렇다네. 그 증거를 보여주지.”
증거를 보여준다던 백무성은 가만히 오른손을 들어 올려 가만히 기를 끌어올렸다. 백무성은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던 것도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었기에 검 없이 검강을 만들어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백무성이 보여주려는 것은 빈손으로 검강을 만드는 것 따위의 술수가 아니었다.
잠시 기를 모으던 백무성의 손이 눈부시게 빛나더니 그의 손 위로 태양과 같은 빛을 뿌리는 소검(小劍)이 한 자루 떠올라 있었다.
“이, 이건!!!”
대각선사 역시 무인이었기에 이 소검이 단순한 검강에다 빛을 발하도록 만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검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미증유의 힘이 이 검에 서려 있는 것을 깨달은 대각선사는 감격스러운 눈으로 백무성을 바라보았다.
그런 대각선사의 눈빛을 본 백무성은 담담히 그에게 물었다.
“보았는가?”
“자, 자네…… 등선(登仙)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것이 사실이었구만.”
“그래, 나는 이 힘으로 앞으로 다가올 어둠을 살라 버릴 것이네. 그래서 이 검의 이름을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빛나는 검, 광검(光劍)으로 이름 지었다네.”
과거 우연한 기회에 먼 훗날의 천기를 읽은 이후 수십 년간을 다가오는 어둠을 막고자 노력했던 백무성과 대각선사였다. 둘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힘을 쌓느라 조국이 타국에 침탈당하는 수모도 그냥 보아 넘겼다. 또한 개개인으로 보아도 그들의 희생은 남달랐다.
백두일맥의 가주가 된 백무성은 스스로가 필사의 수련을 하는 것을 넘어, 가문의 결사대까지 선발하여 지옥의 수련으로 몰아넣어서 지금도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시간의 경계에서 미친 듯 수련만 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하나뿐인 동생마저 실망하여 가문을 떠나는 것도 바라만 보았다.
대각선사 역시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여 금강선원을 만들었기에 그 희생의 정도가 결코 작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런 둘에게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백무성의 광검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백무성의 과도한 자신감은 심마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은 둘 다 모르고 있었다. 광검은 분명 이 세계의 마나 문명 수준, 아니, 마나 문명이 발달한 곳을 보더라도 이루기 힘든 경지임은 분명하였다.
다만, 광검보다 더 높은 경지도 몇 단계씩이나 있는 상황에서 광검을, 그것도 초입의 광검을 이루었다고 이렇게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는 것은 과도한 일이었다.
백무성의 원래 성향을 본다면 만일 심마의 영향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때, 그런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고작 초입에 든 광검으로 지금 세상을 구하겠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