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현세귀환록
161. 재회(2)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한수아가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목소리처럼 익숙한, 그리고 너무나 아름다운 유리엘의 얼굴이 보였다.
“언니!”
한수아는 놀란 목소리로 유리엘을 부르며 반가움이 가득한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그런 한수아의 반응에 유리엘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금 물었다.
“그래, 듣자 하니 연애를 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 말을 듣자, 유리엘의 등장 덕분에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조금 전의 대화가 떠올라서, 한수아는 다시금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게…… 연애는 아니고요…….”
더듬거리는 한수아를 놀리듯이 유리엘은 한 번 더 말했다.
“강호라는 것 같던데…… 그때 그 백강호 말하는 거 맞지?”
“마, 맞긴 하는데요…….”
한수아는 아직도 당황스러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여전히 더듬거렸는데, 그런 그녀를 보며 강민이 옆에서 한 마디 더 거들었다.
“지금 그 녀석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으니 직접 물어보면 되겠네.”
“오, 오빠!!”
한수아는 백강호가 온다는 소리에 한층 더 얼굴이 빨개지며 강민을 외치듯 불렀다.
백강호 역시 마스터의 경지에 있었기에 기감이 느껴진 이후 이곳까지 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똑똑똑.
“수강아, 강호 형이야.”
백강호가 문 앞에 온 기척을 내자, 한수강 역시 짓궂은 표정을 하고선 현관문을 열었다.
“형님, 어서 오세요.”
“그래, 별일 없지?”
집 안으로 들어온 백강호는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집 안을 살피다가 평소에 보이지 않던 두 사람을 보고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둘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 인사를 하였다.
“아! 은인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시일은 많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둘을 생명의 은인으로 깍듯이 대하는 백강호는 꾸뻑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그런 백강호를 가만히 보던 강민은 그에게 불쑥 말을 던졌다. 언제나 그렇듯 단도직입적이었다.
“너, 우리 수아랑 사귀고 있는 거냐?”
강민에게 한수아는 핏줄로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몇 년째 같이 살면서 지금은 친동생과도 같이 여기고 있었기에 마치 친오빠와 같은 태도로 백강호에게 물은 것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강민의 물음에 백강호는 잠시 얼어붙었지만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 재빨리 대답했다.
“그, 그게…… 아,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그게 무슨 말이지?”
역시 뭔가 있어 보이는 한수아의 태도처럼 백강호의 대답 역시 둘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수아 일행이 백두산으로 온 이후 건물을 올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인근을 정리하는 것까지 모두 백강호가 담당하여 일을 진행했다. 그런 그의 위치라면 충분히 지시만 하고 직접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백강호는 은혜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모든 일을 직접 했다.
그러면서 백강호는 한수아, 한수강 남매와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한수아에게 마음이 쓰이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수아 역시 매번 얼굴을 붉히면서도 백강호와 함께 있는 시간을 피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에게도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 판단한 백강호는 자신감을 느끼고 그녀에게 접근하였다.
그러던 중 저번 주에 백강호는 한수아에게 정식으로 만날 것을 제의하였는데, 한수아는 절대 싫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말로 유예하였었다.
그래서 백강호는 일주일 뒤에 다시 물어본다고 하였고, 그 일주일째 되는 날이 공교롭게도 바로 오늘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서로의 이런 반응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강민의 거듭되는 질문에 버벅거리는 백강호를 도와주기나 하려는 듯, 유리엘이 끼어들어 강민에게 말했다.
“이제는 이런 것도 좀 알아차려요. 딱 보면 모르겠어요? 전에 서영이와 강훈이랑 판박이잖아요. 호호호.”
유리엘의 말은 백강호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쐐기를 박는 말이었다. 유리엘의 대답에 강민은 한동안 뚫어지게 백강호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백강호였지만, 계속되는 강민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그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한 번 마주친 이상 강민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강민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짙은 검은빛의 눈동자였는데, 그 속에 담긴 기운은 여느 누구와도 달랐다.
검은 두 눈 속은 마치 깜깜한 밤하늘, 아니,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와도 같은 느낌이었고, 그 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백강호는 자신의 혼이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만! 그만 해요, 민. 이러다가 애 하나 잡겠네.”
유리엘의 말에 강민은 그를 보는 시선을 거두었는데, 백강호는 그때까지도 멍한 표정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십여 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십여 초가 백강호에게는 몇 시간보다도 길게 느껴졌었다. 즉, 강민의 기파에 휩쓸려 현실감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이었다.
강민의 시선이 떨어졌음에도 아직도 멍하게 있는 백강호의 모습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한수아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제야 백강호는 정신을 차린 듯 머리를 흔들며 자신이 괜찮음을 표시하였고, 한수아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에서 안도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강민은 그런 한수아의 표정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유리엘에게 말했다.
“그래도 마스터이니 이 정도는 버틸 줄 알았지.”
강민의 대답에 가볍게 눈을 흘긴 유리엘은 이번에는 심어로 강민에게 말했다.
[심연의 눈길은 그랜드 마스터가 받아도 버티기 쉽지 않을 거예요.]
[뭐, 십 초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는걸.]
[그래도요. 어쨌든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네. 시스템이 없었다고 해도, 마나만 갖춰진다면 몇 년 안에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을 것 같아.]
강민이 백강호의 재능을 언급하자 유리엘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강민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으이그, 그게 아니라 성품이 어떤 것 같냐구요.]
[아, 그렇지. 좋은 놈 같아.]
[그게 다예요?]
[의지가 강하고 한 번 마음 준 것에 대한 책임감도 강하고, 휘어질 바에야 부러질 것 같은 녀석이야.]
[흐음, 수아 짝으로 괜찮으려나…….]
[글쎄, 재능이나 성품이나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강훈이와 비슷한 느낌의 녀석이네. 무에 대한 재능이라는 부분에서는 강훈이를 앞서겠어.]
[호오. 그 정도인가요? 어디 보자…….]
강민이 백강호를 최강훈보다 더 높이 평가하자, 유리엘은 호기심에 백강호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백강호의 등급은 SS등급으로 벌써 마스터의 극에 달해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깨달음만 있다면 세 자리 등급인 그랜드 마스터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강민 역시 백강호와 연결된 시스템의 끈을 잡고 그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심어를 보냈다.
[역시, 재능 부분에서 강훈이를 앞서는군.]
[그래도 정신능력은 강훈이가 낫잖아요.]
[뭐, 아무래도 이 녀석은 강훈이에 비하면 편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으니 그런 점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강민과 유리엘이 자신을 품평하는지도 모른 채 백강호는 여전히 붉은 얼굴로 한수아만을 바라보았다.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였는지 유리엘이 슬쩍 말을 건넸다.
“고백하는 분위기인데 남자답게 말해야지. 안 그러면 우리 수아 안 보내준다?”
유리엘의 말이 신호나 된 듯 둘은 고함치듯 외쳤다.
“언니!”
“수아야! 내 마음을 받아줘!!”
백강호의 말에 한수아의 얼굴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붉어졌는데, 푹 숙인 그녀의 고개가 아래위로 살짝 흔들렸다. 긍정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채 한수아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백강호는 그 움직임을 보지 못했고, 그런 둘의 모습에 유리엘은 짓궂은 미소를 띠며 한수아에게 말했다.
“수아야. 강호는 지금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네가 어떻게 했는지 안 보일걸?”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둘은 서둘러 고개를 들었고, 눈빛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지 백강호는 한수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백강호의 박력 있는 모습에 유리엘은 고개를 끄덕였고, 강민은 뭔가가 맘에 안 드는지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한수강은 박수까지 치며 둘을 응원하였다.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한수강의 눈을 자세히 보았다면 그 눈 깊은 곳에 서려 있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래도 몇 년 동안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가사 상태로 누워만 있는 자신의 연인이 생각난 것 같았다.
딱~!
그런 한수강의 눈빛을 읽은 유리엘은 뜬금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강민을 제외한 모두는 유리엘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모두가 모여 있는 거실 뒤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 수강아…….”
다른 사람들에게는 처음 듣는 생소한 목소리였지만, 한수강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한수강은 평소보다 두 배는 눈이 커진 채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두 눈에는 한줄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유…… 키…….”
더듬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부른 한수강은 갑자기 풀쩍 뛰어 그녀의 옆에 섰다. 방문의 난간을 잡고 있던 유키가 비틀거리며 쓰러지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한수강이 매일같이 기를 이용하여 근육이 사라지지 않도록 추궁과혈을 하였다 하더라도, 몇 년을 누워 있었던 유키는 단순히 서 있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쓰러지려는 유키를 붙잡은 한수강은 뜨겁게 그녀와 포옹을 하였다. 그리고 유키 역시 힘없어 보이는 가냘픈 팔을 올려 그를 마주 안아주었다.
그녀의 팔이 자신의 등에 올라온 것을 느낀 한수강은 그간의 기다림이 모두 보상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다시는 그녀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한수강은 더욱 힘을 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
하지만 유키의 허약해진 몸은 그런 포옹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녀의 약한 신음에 한수강은 서둘러 팔을 풀고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여전히 그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둘을 보고 있던 모두가 따뜻한 표정으로 둘의 재회를 축복해 주었다. 특히, 한수아는 그간 한수강의 기다림을 곁에서 보며 함께했기에 다른 누구보다 기뻐했는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까지 흘리며 함께 기뻐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유키가 한수강의 품을 벗어나자, 유리엘은 그녀의 원기를 회복할 수 있도록 마법을 사용해 주었다. 유리엘의 마법에 유키는 이내 기운을 차렸고, 그런 그녀에게 한수강은 그녀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났기에 간략히 설명하는 대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대화가 정리되자 강민이 입을 열었다.
“이제 수아와 수강이는 한국으로 돌아가야지. 물론 저기 유키도 함께 가야지.”
강민의 말에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짓고 백강호는 잠시 한수아를 바라보더니 강민에게 말했다.
“형님, 저도 함께해도 되겠습니까? 본가에 하산한다는 말씀만 드리고 바로 뒤를 따르겠습니다.”
조금 전의 대화에서 강민을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고 하지만, 백강호는 마치 오래전부터 강민을 형님으로 대한 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마음속 깊이 승복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 이제 서로 마음을 확인했는데 굳이 떨어져 있을 필요는 없겠지. 네가 머물 곳 정도는 마련해 주지.”
“감사합니다. 형님.”
“그리고 어차피 네 할아버지께 볼일이 있으니 뭐 같이 올라갔다가 가면 되겠군.”
“할아버지라면…….”
“네 할아버지가 백무성 가주 맞지? 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한 백 가주 말이야. 뭐 이제는 해체되었으니 위원이라는 이름은 의미가 없긴 하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