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현세귀환록
160. 재회(1)
강민의 집 정원에는 여전히 반투명한 상태의 제니아가 유리엘에게 일일 보고를 하고 있었다.
심령이 통하는 정령이었기에 굳이 현신(現身)하지 않고 충분히 심어로 말을 전달할 수 있었으나, 제니아는 꼭 유리엘 앞에 나타나 보고했다.
그것은 강민과 유리엘 주변에 있는 순도 높고 밀도 높은 마나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받아들이고 싶어서였다. 마나 위성에 머무르면서 지금도 상당한 마나를 흡수하고는 있지만, 사람으로 치자면 맛집을 찾아가는 것과도 같은 논리였다.
그렇게 유리엘에게 보고를 하는 제니아의 모습은 마치 신을 받드는 신도와도 같은 모습이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정령과 정령사 간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에 정령과 정령사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둘은 상하관계가 아니라 서로 동등한 협조관계라 할 수 있었다. 정령은 정령사에게 자신의 능력을 제공하고, 정령사는 정령에게 성장의 발판이 되는 마나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리엘과 제니아의 관계는 달랐다. 유리엘이 제니아를 문자 그대로 창조하였기에 제니아에게 유리엘은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의식이 강한 제니아의 성향상, 자신을 만든 유리엘에게 느끼는 경외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는 마치 신이나 천사와 같은, 그리고 가끔은 악마와 같은 취급을 받는 제니아였지만, 언제나 유리엘 앞에서는 순한 양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제니아가 오늘의 보고를 하고 스르륵 사라지자, 강민이 유리엘에게 말했다.
“제니아 말을 들어보니 이제 시스템도 어느 정도 안정화 된 것 같은데, 백두산이나 한번 다녀올까? 지금쯤이면 유키의 상태도 나아졌을 것 같은데 말이야.”
“음. 지금쯤이면 그렇겠네요.”
“어차피 그 일이 아니더라도, 전에 그쪽 결계가 궁금하다고도 말했었잖아.”
과거 위원회가 존재하고 있을 때, 백두일맥의 가주인 백무성이 강민과 만남을 요청했었다. 당시 강민은 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굳이 만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었는데, 유리엘이 그곳에 펼쳐진 결계에 대해 호기심이 있다고 하여 한 번쯤은 방문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지금 가 보기로 했다는 것은 그때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강민이 말하는 그 일이라는 것은 백강호의 구출과 유키의 상태에 관련된 일이었다.
몇 달 전 강민과 유리엘은 혈마단에게 쫓기는 백두일맥의 후계자인 백강호를 우연히 구해준 적이 있었다.
백강호를 구하고자 움직인 것은 아니었지만, 둘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구한 백강호는 꼭 은혜를 갚고 싶다고 말하며 거듭 인사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천왕가의 후계자인 이유성까지 구해주었기에 백강호의 고마움은 더욱더 컸다.
다만 둘에게 백강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미 절대의 무력과 금력, 권력까지 가지고 있는 둘에게 백강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감사의 인사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어떤 식으로든 은혜를 갚고 싶어 했던 백강호는 고민을 거듭하다 옆방에 설치된 마법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식의 원리인지까지 알 수는 없었으나, 마법진의 목적이 가공되지 않은 자연 상태 그대로의 마나를 집적하여 대상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백강호는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그건 백두산의 가장 영기가 깊은 곳에 마법진을 설치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리산이 영산(靈山)이기는 하지만 그 영기는 백두산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만일 백두산에 저 마법진을 설치하여 유키를 치료받게 한다면 영혼의 안착까지 걸리는 시간이 훨씬 단축될 것이기에 유리엘은 그의 제안을 승낙하였다.
이후 유리엘은 제니아 시스템의 구현에 집중하느라 엘리아가 유키를 이동시켜 마법진을 설치했고, 한수강과 한수아는 유키의 보호자를 자청하며 같이 백두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몇 달째 생활 중이었다.
“그래요. 결계도 그렇고, 애들도 어떻게 있는지 궁금하네요. 민의 말대로 이제 어느 정도 시스템도 안정화 된 것 같으니 한 번 다녀와요.”
“그래. 그럼…… 아, 그런데 아직 찾지는 못한 거지?”
“아, 그것 말이군요.”
“그래, 지금도 지속적으로 미미하게 마나 농도가 변하는 것을 보니 분명 어디선가 균열이 발생한 것 같은데 말이야.”
강민이 언급하는 균열이란 한 차원 내에서 천계나 마계 등과 같은 다른 계(界)로 갈 수 있는 통로를 의미하였다.
균열은 웜홀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것으로, 부연하자면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수평적인 통로인 웜홀과는 달리 균열은 한 차원 내에서 이동하는 수직적인 통로라 할 수 있었다.
균열과 웜홀의 차이처럼 차원 간 이동과 계간 이동 역시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우선 차원 간의 이동은 전혀 다른 마나 구성을 가진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으로,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마나 충돌이 뒤따랐다.
그래서 강민처럼 해당 차원의 마나로 마나 구성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동 당시 가진 마나만이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전부가 될 것이었다.
즉, 마나가 전혀 회복되지 않고 오히려 마나 충돌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소모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계간 이동은 한 차원 내의 이동이었기에 이런 마나 충돌이 뒤따르지는 않았다. 물질계의 마나와 천계, 마계의 마나는 겉으로 보이는 성질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한 차원 내에서 존재하기에 그 근본은 같기 때문이었다.
다만, 계간의 이동을 막는 차원의 벽 때문에 별도의 소환 마법이나 소환술을 시전하지 않는다면 일반적인 균열로는 천족이나 마족이 물질계에 현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지금 강민은 이런 균열이 발생하지 않았냐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보통은 이런 균열은 시간이 가면 자연히 봉합되어 사라지게 마련이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차원 통합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균열로 인하여 차원 통합의 속도가 미세하게 빨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리엘에게 마나 위성을 통해서 한번 찾아보라고 했지만, 균열의 위치가 좋지 않은 것인지, 아직 원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한 마나 위성으로는 제대로 된 탐색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게요. 저도 느껴지는 정도이니 그리 작은 규모의 균열은 아닌 것 같은데, 위치가 좋지 않은지 기본 검색으로는 아직 보이지 않네요. 이를 찾으려면 지구 전역을 범위에 넣고 세부적인 스캔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지금의 마나 위성의 상태로는 힘들 것 같네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아요.”
시간이 걸린다는 유리엘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강민은 말을 이었다.
“흐음…… 뭐 지금까지 소란이 없는 것으로 보아 딱히 뭐가 튀어나온 것 같지는 않으니 급할 건 없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계속 둔다면 예상보다 일 년 정도는 더 빨리 통합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일반적인 균열로는 마족이나 천족이 나타나긴 힘들었으나 드물게 균열이 크거나 마나 컨트롤이 좋은 마족이나 천족이 나타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하지만 균열이 발생한 지도 꽤 지났지만 별다른 소란은 없었기에 강민은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짐작하였다.
“1년이라……. 그래도 대략 2년 정도의 시간이 있으니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전력을 갖출 수 있을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럼 그 부분은 차후에 생각해보고, 아까 말한 대로 백두산으로 가 보자.”
“그래요.”
강민과 말을 마친 유리엘은 언제나 그렇듯 손가락을 튕기며 순간 이동을 시전했다.
딱!
* * *
“……언제쯤이면 다시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
“음…… 괜히 누나한테 미안하네. 난 괜찮으니 누나 먼저 한국에 돌아가 있지 않을래?”
“아, 아냐. 그냥 해본 말이야. 신경 쓰지 마.”
통나무를 통째로 이어 만든 목조 건물 안에는 하얀 무명옷을 입은 한수강과 한수아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수아가 무심코 던진 말에 한수강은 괜히 미안해서 먼저 가라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녀는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급하게 수습하려고 하였다.
“아냐, 지리산에서부터 생각해 보면 집 떠난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 누나를 이렇게 잡고 있으니 누나한테도 미안하고, 누나를 딸처럼 대해주신 아주머니께도 미안하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나 혼자서도 충분해. 수련하다 보면 금방 시간이 갈 거야.”
한수아는 자신의 말에 동생이 상처받지는 않을까 싶어 다시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네 말처럼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내가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못 가겠어! 유키가 일어나면 어떻게 네 마음을 훔쳤는지 꼭 물어봐야지. 호호호.”
“훔치긴 뭘 훔쳐…….”
한수강은 쑥스러워하면서도 그녀의 말을 굳이 부인하지는 않았다. 유키 혼자 두어도 괜찮을 상황이었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분명 유키에게 온 마음을 빼앗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방금 말은 실수니까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요즘은 제니아인가 뭔가 하는 사람…… 사람이라고 하긴 그런가? 아무튼 그 사람이 만든 시스템에서 수련하는 것만 해도 충분히 하루가 기니까 말이야.”
“하긴, 나도 그 시스템 덕분에 요즘 하루가 짧을 지경이야. 더군다나 상점창을 보니 과거 우리 백록원에서 실전되었다던 무공들도 많이 있더라구. 그러니 어서 카르마 포인트를 쌓아서 무공들을 배워야겠어.”
한수아와 한수강 역시 제니아 시스템을 통해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누가 이런 마법을 사용했는지 전혀 감도 못 잡고 있었다. 둘의 실력으로는 강민이나 유리엘의 강함의 일부도 짐작하기 힘들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강훈 오빠가 드림시티 안에 백록원을 새로이 열었다고 하니까. 우리도 얼른 배워서 백록원의 재건에 도움이 되어야지.”
한수강과 같이 지리산에서, 그리고 백두산에서 같이 생활하며 한수아의 성격은 꽤나 많이 변했다. 그 전까지는 인간관계와는 담을 쌓고 조용히 공부만 하는 학생에 가까운 이미지였지만, 지금은 무공을 배우는 것에도 적극적으로 변했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모두 한수강 덕분이었다. 의지할 수 있는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고, 동생과 함께 지내면서 활발한 한수강의 성격도 많이 배울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잘 생각했어, 누나. 유키만 낫고 나면 우리도 얼른 드림시티로 가서 사범을 해야지. 근데 그러려면 지금 누나 실력으론 힘들 것 같은데?”
“뭐?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나도 지금 CA까지 올라왔다고! 흥!”
“벌써? 대단한데?”
한수강이 놀라는 것도 당연하였다. 한수아는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지 불과 1년여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거 강민이 한수아의 병을 치료한다고 임독양맥의 타통과 세부 기맥까지 깨끗이 청소해둔 것을 감안한다면, 그녀의 이런 성장 속도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지금까지는 무공을 배우려 하지 않아서 그랬지만 배우기로 마음먹은 이상, 누구보다도 빨리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무시하지 말라고!”
“설마…….”
“설마, 뭐?”
“강호 형한테 따로 배운 거 아냐?”
한수강이 백강호를 언급하자, 한수아는 갑자기 얼굴이 빨갛게 물들면서 말을 잇지 못하였다.
너무나 당황하는 한수아의 모습에 한수강이 되려 당황할 때, 그들의 뒤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수아도 연애하는 거야?”
그건 바로 유리엘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