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현세귀환록
159. 시작(4)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20세 청년 르브론은 평소에는 한 번 잠이 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이 드는 수면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꿈을 꾸는 것은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잠이 들었는데, 그리 피곤하지도 않았는데 웬일로 오늘은 잠을 자면서 꿈을 꿨다.
처음에는 뭔가 보이는 꿈은 아니었고 목소리만 들리는 꿈이었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았던 꿈속의 목소리는 르브론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강해지고 싶은가?]
평소 마물을 잡는 헌터를 동경하고 있던 르브론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꿈속의 르브론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그의 대답은 그의 생각 속에서 존재했지만, 누군지 모를 목소리는 르브론의 의사를 알아들었는지 이어지는 질문을 했다.
[좋다. 그럼 수련할 준비는 되었나?]
어떤 수련이 준비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르브론은 꿈속에 있었기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그렇기에 강함을 동경하던 르브론은 당연히 수련을 하겠다고 선택하였다.
그렇게 수련하겠다고 마음을 먹자 이제 르브론의 꿈은 목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처럼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변했다.
르브론은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과도 같이 명료한 상태였는데, 아직 꿈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나 하는 듯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끝없이 펼쳐진 하얀 대지 위였다.
하얀 하늘을 머리 위에 두고 하얀 대지에 발을 딛고 있는 르브론은 잠이 들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치 백야의 설원에 혼자만 있는 듯한 느낌으로 서 있는 르브론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약간 당황하고 있었는데, 그때 아까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금껏 올바르게 살아온 네 삶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너에게 10포인트의 카르마 포인트를 지급하겠다. 이 포인트를 이용해서 네가 원하는 비전(秘傳)을 익혀서 강해지도록 해라.]
카르마 포인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제야 르브론은 이 목소리를 언제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다, 당신은…….”
그건 바로 낮에 들었던 제니아의 목소리였다. 당시 제니아는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하며 오늘 밤에 일어날 일을 기대하라는 식의 언급을 했는데, 지금 이 상황이 그녀가 말한 그 상황인 것 같았다.
“제니아! 제니아군요!”
르브론은 깜짝 놀라며 제니아의 이름을 불렀지만, 제니아는 그의 말과 상관없이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네가 EF등급에 도달하면 다른 수련으로 이어질 것이니 그때까지 수련에 정진하도록.]
이 말을 끝으로 제니아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이후로도 르브론은 몇 차례 제니아를 불렀지만 제니아는 반응이 없었다. 그제야 그녀가 떠났음을 인지한 르브론은 더 이상 제니아를 부르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상태창에 정신을 집중하였다.
이미 낮에 제니아가 개괄적인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했기에 르브론은 대략의 시스템 사용법을 알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기에 어색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카르마 포인트라고 했지?’
상태창을 자신의 전면에 띄운 르브론은 카르마 포인트 부분의 숫자가 바뀐 것을 확인하였다. 분명 낮에는 0포인트였는데 지금은 제니아의 말처럼 10포인트가 생겨 있었던 것이었다.
포인트를 확인한 르브론은 카르마 포인트라 쓰인 부분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상태창은 사라지고 카르마 포인트 상점창이 나타났다.
상점창은 다양한 카테고리에 엄청난 양의 목록이 있었는데, 그 목록만 확인하는 데만 몇 시간은 걸릴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각각의 목록에는 이능의 이름과 필요한 포인트와 최저 요구 등급 등이 표기되어 있었다.
현재 목록에서 가장 높은 포인트가 10포인트인 것으로 보아 10포인트 이상의 이능은 아예 목록에도 나타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10포인트 이하의 이능만 하더라도 수천, 수만 가지가 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이능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이능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았다.
다만, 시스템은 이런 르브론과 같은 사람을 배려해서인지 상점창의 목록 중 자신의 상성과 맞는 이능일수록 짙은 푸른색을 띠고 있어 그런 이능만을 찾는다면 검색하기가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찾은 것이 지금 르브론이 보는 투르식 격투술이었다. 어려서부터 주짓수를 배운 르브론은 맨손 격투술에 관심이 많았다.
상점창에서 파랗게 빛나는 투르식 격투술을 보고 호기심을 느낀 르브론은 격투술에 대한 시전 영상과 설명을 확인하였는데, 자신이 딱 원하는 타입의 무술임을 알 수 있었다.
투르식 격투술은 FA등급의 이능력이었는데, 제한사항은 신체등급 FC뿐이어서 지금 르브론이 충분히 익힐 수 있는 능력이었다.
실전 격투기인 주짓수와는 달리 고대로부터 전승되었던 투르식 격투술은 정해진 투로에 따라서 움직이며 호흡을 하다 보면 미약한 마나까지 습득할 수 있는 일종의 동공(動功)이었다.
상세 설명까지 보고 난 르브론은 이 투르식 격투술이 더 마음에 들었다. 다만,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상점창에서 표시하고 있는 투르식 격투술은 8포인트의 비용을 지불해야 구입할 수 있었다. 1포인트짜리 저렴한 이능도 있는 상황에서 8포인트는 나름 비싼 비용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르브론은 망설이지 않고 포인트를 지불했다.
상태창에서 포인트가 줄어들면서 르브론은 하얀빛 속에 파묻혔다. 빛 속의 르브론은 투르식 격투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십 수백 차례 반복해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빛은 걷혔고, 다소 멍해 보이는 표정의 르브론이 나타났다. 이내 정신을 차린 르브론은 자신의 머릿속에 투르식 격투술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게임의 스킬을 사용하듯이 스킬명만 외치면 이 격투술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투르식 격투술의 모든 정형화된 동작부터 그 동작에 따르는 미세한 호흡법까지 모든 것이 르브론의 머리에 들어 있었지만, 그건 단지 관련 지식이 머리에 들어 있는 것뿐이었다.
이 격투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몸을 움직여 수련을 해야 할 것이었다. 그제야 르브론은 수련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원래 운명대로라면 절대 접할 리 없는 투르식 격투술을 배울 수 있게 한 카르마 포인트였지만, 그것을 실전에 사용할 정도로 수련하는 것은 자신의 노력에 달린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수련을 통해서 다르마 포인트를 올리게 된다면 자신의 능력 또한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즉, 선순환의 사이클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르브론은 눈을 빛내며 지금 그의 머릿속에 있는 투르식 격투술의 가장 기초부터 수련하기 시작했다.
이런 꿈을 꾼 사람은 르브론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밤 13세 이상의 사람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인종을 불문하고, 성별을 불문하고 모두 꿈에서 제니아를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상당수의 사람은 카르마 포인트를 받는 대신에 제니아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네놈은 이 시스템의 혜택을 얻기에는 너무 악기(惡氣)가 강하군. 지금과 같은 악기를 가지고 있다면 영원히 시스템의 혜택을 보지 못할 것이야. 단지 상태창을 보는 것이 네가 얻을 수 있는 것의 전부겠지.]
이것이 유리엘이 말한 조치였다. 전 지구인을 대상으로 시스템을 구현했지만, 악인에게까지 시스템에 대한 혜택을 줄 그녀가 아니었다.
아마 이 상태로 몇 년의 시간이 흐른다면, 시스템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악한 이능력자들은 도태가 될 것이 자명하였다. 그것이 유리엘이 노리는 것이었다.
* * *
제니아 시스템의 출현은 세상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몇 년 전 마물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이능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렸을 때보다도 훨씬 큰 충격이었다.
마물과 이능은 이능력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일반인 중에서도 사회 지도층은 상당수가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제니아 시스템은 그것을 만든 유리엘을 제외하고는 시스템이 가동될 때까지 그 누구도 몰랐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언제나 그랬듯이 빠른 속도로 적응해 나갔다. 불과 한 달여가 지났을 뿐인데, 제니아 시스템을 이용해서 대여섯 등급을 올린 사람도 출현하는 등 세상은 이능 세계, 일반 세계를 가리지 않고 빠르게 시스템에 적응하였다.
특히, 제니아 시스템 가동을 기점으로 유니온은 이능 세계를 넘어 일반 세계에서도 UN을 능가하는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유리엘이 벤자민에게 등급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세부등급은 확인이 불가능했고 이름과 전체 등급만 확인할 수 있는 장치였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이것은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사람의 능력이 계량화·수치화되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단지 마나의 양만을 가지고 개략적으로 평가하는 시스템과는 달리 제니아 시스템을 통한다면 정확한 능력평가가 가능하였다.
이것은 사람을 등급화 서열화를 시키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국적, 성별, 인종을 불문하고 능력에 따라 정확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긍정적 효과도 분명 있었다.
이를 캐치한 유니온은 이 장치를 활용하여 시스템 ID카드를 발급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로써 이제는 자신의 등급을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관의 공증을 받아 그것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ID카드 발급 이전에는 사람들은 자신의 등급은 알 수 있었으나, 타인의 등급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상대가 거짓으로 등급을 속여서 말하면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ID카드가 나옴으로써 객관적으로 판단 받은 자신의 능력 등급을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ID카드를 발급해 주는 유니온의 위상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3개월이 지나자 드디어 시스템을 통한 마스터, 즉 SF등급이 탄생하였다. 그 주인공은 미국의 초능력자인 에이브릴 르빈이라는 여성이었다.
에이브릴은 원래 바람을 다루는 BD급 능력자였다. 시스템이 시작할 때에는 B급 초반에 불과한 그녀였지만 주어진 카르마 포인트로 마인드 컨트롤에 관한 비전을 습득한 다음부터 그녀의 등급은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특히, 두 달 전 마물 사냥에서 약혼자를 잃어버린 그녀는 꿈속의 수련에서도 미친 듯이 몸을 혹사하며 자신의 능력 등급을 올려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전에 있었던 마물 사냥에서 깨달음을 얻은 에이브릴은 아직 정련되지는 않았지만 유형화된 마나의 바람을 뿜어내며 마물을 산산조각으로 잘라내 버렸다.
이후 그녀는 유니온의 인증을 받아 자신이 S급에 올랐음을, 마스터가 되었음을 온 세상에 명명백백히 알렸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제니아 시스템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고 있었지만 아바투르는 과거 이형태의 몸, 즉 현재의 몸에 적응하며 자신의 부하들을 이곳으로 불러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