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158화 (158/203)

# 158

현세귀환록

158. 시작(3)

“누님도 조금 전에 목소리 들으셨죠?”

최강훈의 목소리에 다소 멍하게 있던 엘리아와 정시아가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들은 강민의 집 인근 야산에서 함께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들려온 제니아의 목소리에 수련을 멈춘 상태였다.

최강훈의 질문에 엘리아는 정신을 수습하고 그에게 대답했다.

“그래, 모두에게 들린 것 같아.”

벌써 함께한 지 몇 달이 넘었기에 최강훈과 엘리아는 처음의 격식을 버리고 서로 말을 편하게 하는 상태였다.

“말을 들어보니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마법 같은데, 누가 이런 마법을…….”

“누구긴 누구겠어. 유리 님이시겠지.”

엘리아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었다. 유리엘을 제외하고는 이런 이적(異蹟)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최강훈 역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유리엘이라면 전능(全能)의 여신(女神)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것을 행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둘이 대화하는 동안, 함께 있던 정시아는 평소와는 다르게 대화에 끼어들지도 않고 무언가에 집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정시아는 생각이 끝났는지 갑자기 최강훈과 엘리아를 돌아보며 둘에게 물었다.

“그런데 언니, 오빠들은 등급이 어떻게 나왔어?”

정시아가 집중하던 것은 그녀 자신의 상태창이었다.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상태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글쎄, 상세 정보까지는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일단 등급은 SB급이네.”

“SB? 와…… 역시 높네.”

제니아의 공지에 따르면 등급은 최하 FF부터 최고 SSS까지 있다고 하였다. SB 등급이면 상당히 높은 등급임은 확실하였다.

최강훈의 대답에 엘리아 역시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SA급이야.”

최강훈이 빠르게 성장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엘리아가 한 수 위에 있는 것은 확실하였다. 하지만 엘리아 역시 그랜드 마스터급이라 할 수 있는 세 자리 문자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아의 대답까지 들은 최강훈은 정시아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네 등급은 뭐야?”

“난 SE등급이네”

“역시 마스터가 되어야 S등급을 주는가 보네.”

“그런가 봐. 히히히.”

정시아는 최강훈의 말에 대답하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뭐가 좋아서 그리 웃어?”

“저 등급을 보니까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나서 말이야.”

정시아는 지난번 독고패의 습격 이후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해서 싸우던 중 죽음을 직면한 순간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 직후 정신을 잃어버려 당시의 전투에서는 마스터의 능력을 전혀 보일 수 없었지만, 정시아는 빠른 속도로 익숙해지며 그 이후의 전투에서 많은 활약을 했었다.

“참나. 일루미나티와 싸울 때 이미 유형화된 마나를 그렇게 사용해놓고선 이제 와서 실감 난다는 거야?”

정시아는 일루미나티와의 대전 때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천지를 뛰어다니며 활약을 했었는데, 최강훈은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몇 달 전 강민과 유리엘이 올림포스의 메르딘을 만나러 간 사이, 엘리아와 최강훈, 정시아는 일루미나티를 상대하러 갔었다.

일루미나티는 엘리아의 숙적으로, 그녀가 꼭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녀 혼자서는 버거운 상대였기에 최강훈과 정시아가 함께했었다.

물론 세 명이 함께한다 하더라도 세 명으로 하나의 단체, 그것도 위원회 소속인 거대 단체를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강민이 더 이상 위원회의 이름으로 함께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자, 엘리아는 숙적인 일루미나티와 승부를 내기로 결심했다.

예상대로 전투는 쉽지 않았다. 일행은 일반 마법사들을 무시하고 수뇌부만 공략하기 위해서 일루미나티 본부를 돌파하였는데, 그 일반 마법사들의 마법이 수십 수백이 뭉쳐지자 생각보다 운신의 폭이 줄어들었다.

이때 정시아가 맹활약했다. 정시아는 뱀파이어 종족의 특성상 일루미나티에서 시전한 상당수의 흑마법에 대해서 내성이 있었다.

특히, 마스터에 오르면서 고위급 마법이 아니면 웬만해서는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흑마법에 대한 내성은 더 커진 상태였기에 그런 일반 마법사들에게는 천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정시아가 일반 마법사들을 정리하는 사이, 최강훈과 엘리아는 본부의 최상층에 올라가 일루미나티의 회주인 아담을 비롯한 두 명의 호법과 상대하였다.

세 명 모두 마스터의 경지였지만, 회주 아담과는 달리 두 명의 호법은 마스터에 오른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들은 고위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직은 어색한지 상당한 딜레이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아와의 대련을 통해서 마법사와의 전투에 익숙해진 최강훈은 그런 허점들을 노리고 두 명의 호법들을 잡아 놓을 수 있었고, 그사이 엘리아는 아담과 독대했다.

과거 아담과 박빙이었던 엘리아는 유리엘에게 새로운 마법과 마법 이론을 배우며 아담보다는 한 단계 위의 성취를 보이고 있었기에 그를 이기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결국 격전 끝에 아담을 격살한 엘리아는 그 여세를 몰아 최강훈이 상대하던 호법들마저 일수에 해치워 버렸다. 그 둘도 마스터였지만, 최강훈에게 집중하느라 뒤에서 갑작스럽게 오는 공격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고위층을 모두 처리한 엘리아는 십수 개의 광역 마법을 연환해서 시전해 일루미나티의 본부 자체를 완전히 세상에서 지워 버렸다.

일반 세계에서 미사일 저장고가 터졌다고 알려진 것도, 이 광역 마법들이 연속적으로 폭발하는 것을 보고 나온 추측이었다.

그렇게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대적을 상대로 싸웠던 세 명은 무척이나 친해진 상태였다. 특히, 둘의 도움으로 자신의 복수를 마무리한 엘리아는 이후로 둘을 동생처럼 챙기는 모습까지 보이며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그 고마움을 표현하였다.

즉, 세 명은 전쟁을 같이한 전우와도 같은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최강훈의 이런 핀잔에도 정시아는 장난스럽게 발끈하며 따지고 들었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내가 그렇다는데 오빠가 뭐 보태준 거 있어? 흥!”

최강훈과 정시아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엘리아는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유리 님이 정말 대단한 마법을 만드셨구나……. 그렇다면 전에 말씀하신 차원 통합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나도 이 시스템을 활용해서 더 빨리 강해져야겠어.’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엘리아는 아직도 장난스러운 말을 주고받는 둘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이제 유리 님이 말씀하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스스로를 제니아라고 하는 자의 말에 따르면 마물을 잡으면 카르마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고 하니까. 당분간은 마물 사냥에 집중해 보자. 우리가 강해져야지 나중에 있을 차원 통합에서도 유리 님과 강민 님께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겠지.”

폐를 끼쳤다는 말에 최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누님. 더 이상 저번과 같은 일은 없어야지요. 알겠습니다.”

정시아 역시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

* * *

한편, 유리엘의 마법 시전 이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탁천군이 예전에 머물렀던 숙소에 작은 변화가 발생했다.

탁천군이 지켜보던 정원의 바위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 것이었다. 거대한 바위가 이유 없이 갈라진다는 것이 기이한 일이었으나, 지금 탁천군의 숙소는 방치되어 아무도 드나드는 이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쩌쩌적!

처음에 미세했던 바위의 균열은 곧 파열음을 내며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위는 완전히 갈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알몸의 20대 청년이 들어 있었다.

알몸의 청년은 바로 몇 년 전 사라진 이형태였다. 하지만 껍데기가 이형태일 뿐 지금 풍기는 기도와 마나를 볼 때 그 속은 절대 이형태라고 볼 수는 없었다.

특히 흰자위가 보이지 않는 온통 검은 눈은 공포감마저 자아내고 있었는데, 이것 하나만 하더라도 과거의 이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이형태는 바위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크게 호흡을 몇 차례 하였다.

“후읍, 하. 후읍, 하.”

‘듣던 대로 물질계의 공기는 다르군.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나올 수 있다니, 의외인걸.’

여전히 알몸의 이형태는 고개를 젖히고 팔을 돌리는 등의 준비운동을 하며 생각을 이어갔다.

‘좋아, 좋아. 생각했던 대로군. 악기가 골수까지 쌓인 몸이라 그런지 본신의 능력을 대부분 가져올 수 있었군. 반푼이 사스투스가 말했던 그 연놈들만 처리하면 더 이상 방해꾼은 없겠지.’

사스투스를 생각하는 알몸의 이형태는 바로 그 사스투스의 주인인 마왕 아바투르였다. 이형태의 몸을 제물이자 숙주로 사용해서 이 땅에 강림(降臨)한 것이었다.

반쯤 포기했다는 그의 생각처럼, 아바투르는 알지 못했지만 그가 이곳에 강림할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운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아바투르 강림의 시작은 몇 년 전 탁천군이 한창 활동할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과거 탁천군의 부하들은 한국에서 악기가 골수까지 쌓였던 이형태를 납치해 왔다. 그런 이형태를 본 탁천군은 매우 기뻐했는데, 그것은 이형태 정도로 악기가 넘치는 제물은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몇 차례 악인을 제물로 하여 악마를 소환해 보았던 탁천군이지만, 이 정도의 제물이라면 더 강한 악마를 소환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를 하며 그때 대규모 술법을 펼쳤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큰 기대를 하며 술법을 시전했지만 악마 소환 술법진은 탁천군과 그를 지원하는 술사들의 마나만을 빨아먹고는 어떤 악마도 토해내지 않았다.

오히려 술법진은 이형태의 몸을 감싸는 커다란 돌덩이만 생성하여, 이형태를 제물로조차 다시 쓰지 못하게 해버렸다.

당시 탁천군은 몰랐지만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은 이형태의 악기에 반응한 아바투르가 너무 과도한 마기를 물질계로 전송하려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이형태는 골수까지 쌓여 있는 악기 덕분에 마왕이라 불리는 아바투르의 마기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숙주였는데, 그가 보내는 마기는 물질계의 벽을 뚫기에는 너무 강렬하고 거대하였다.

만약 탁천군의 술법 수준이 더 높았다면 벽 자체를 더 얇게 만들어서 아바투르를 바로 강림시킬 수도 있었을 테지만, 탁천군의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결국 아바투르의 마기는 차원의 벽을 뚫지 못하고 그냥 굳어버린 것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탁천군은 처음에는 이 바위를 어떤 알로 생각하여 마나를 주입하거나, 바위를 중심으로 마나집적 술법진을 펼치기도 하였으나 몇 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바위는 그냥 바위로 남아 있었다.

결국 그렇게 이형태와 바위를 포기한 탁천군은 위원회에 투항하려다가 강민의 손에, 아니, 사스투스에게 목숨을 내놓으며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이후 이 바위는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는데, 두 가지 요인이 이 바위를 깨운 원인이 되었다. 한 가지는 물질계에서 죽은 사스투스의 마기였고, 다른 하나는 마나장을 뒤흔든 유리엘의 마법이었다.

강민이 사스투스를 해치운 이후 갈 곳을 잃은 사스투스의 마기는 자연스럽게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 이 바위로 날아와서 흡수되었다.

이 마기는 아바투르의 마기와는 반대쪽에서 차원의 벽을 충격하였고, 이로 인하여 차원의 벽은 상당히 얇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미 고착화되어 아바투르의 마기를 막고 있는 차원의 벽을 뚫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이를 해결한 것이 유리엘의 마법이었다. 유리엘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마법은 마나장 전체를 뒤흔든 거대한 마법이었기에 약해진 차원의 벽 또한 그녀의 마법에 흔들렸다. 그 순간 미세한 균열을 눈치챈 아바투르가 균열을 통해서 차원의 벽을 깨고 나온 것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유리엘이 펼친 마스터 오브 퍼펫 마법으로 인하여 마나 위성이 거의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어서 마나 위성에도 잡히지 않았다.

만약 마나 위성이 멀쩡했다면 이 정도 마기의 발현을 놓칠 리가 없었다. 관제 정령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마기를 뿜어내는 마왕의 출현이라면 그 즉시 알아차렸을 것인데, 지금의 마나 위성은 웜홀 탐색과 기초적인 기능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기에, 아바투르의 출현을 잡아내지 못했다.

이런 여러 가지 운이 작용하여 아바투르는 이 땅에 강림할 수 있었지만, 그 스스로는 아직도 어떻게 자신이 이곳에 왔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얼마 전 다른 마왕과의 일전에서 근소한 차이이긴 하였지만 결국 패배하여 현재 상당히 입지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의 이 강림은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바투르는 이곳을 새로운 영지로 만들어 힘을 비축한 다음 다시 마계로 넘어가 마계마저 장악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반푼이 사스투스를 강제 소환시킨 남녀를 처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었다.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이 시끄러워지면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나타나겠지. 일단 이 몸에 좀 적응한 뒤에 소환 마법진을 사용해서 마군장들과 마룡장들을 불러야겠어. 그 녀석들도 이곳의 공기를 좋아하겠지.’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아바투르는 다시금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만족감을 표시하였다.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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