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현세귀환록
155. 정리(2)
“다…… 당신들은!!!!”
강민과 유리엘은 굳이 인식 장애 마법을 펼치지도 않았기 때문에 메르딘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에도 둘의 얼굴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둘이 인식 장애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어차피 위원회에서는 퍼니셔가 강민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방식의 인식 장애 마법과 퍼니셔가 아닌 다른 이름을 쓴다면, 잠시나마 정체를 숨길 수는 있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었기에 마법을 시전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둘을 알아본 메르딘은 외마디 외침과 동시에 미리 준비해 놓았던 마법 주문들의 트리거를 당기며 빠르게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올림포스의 마법진까지 날려 버리고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면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9서클 마법사라 그런지 메르딘의 전투태세는 다른 여느 마법사와 달랐다. 하나의 트리거만을 작동시켰을 뿐인데 십수 번의 마나 유동이 발생하며 메르딘의 온몸은 갖가지 방어 마법과 보조 마법으로 둘러싸였다.
그런 메르딘의 마법을 본 유리엘이 약간 감탄하듯이 말했다.
“호오. 에테르 아머에 크리스탈 실드, 아케인 배리어까지 많기도 하네. 역시 9서클이라는 건가. 그런데 이제 준비가 끝난 거야?”
하지만 지금 메르딘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정신은 없었다. 빠르게 기본적인 전투준비를 마친 메르딘은 서둘러 둘을 스캐닝했다.
어느 정도 실력인지는 알아야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메르딘의 수준으로는 둘의 경지가 탐색되지 않았다.
만일 독고패의 죽음을 알기 전이었다면 뭔가 특수한 방법이나 또 다른 마법으로 경지를 감추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자신을 훨씬 능가하는 경지라 둘을 탐색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퍼니셔라 불리는 강민은 어느 정도 예상했었는데, 저 유리엘이라는 마법사 역시 9서클을 뛰어넘는 경지였다는 것인가? 휴…… 정말 대적을 만났구나……. 그런데 이 공간은 뭐지?’
메르딘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곳은 유리엘이 펼친 아공간의 일부였다. 유리엘은 순간적으로 메르딘이 있는 공간을 삼켜 현실을 토대로 현실과 똑같은 모습의 아공간을 형성하였기에 처음 메르딘은 자신이 다른 공간에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9서클 마법사였다.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결과, 지금은 이 공간이 현실과 격리된 별도의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즉, 다른 마법사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른 공간에 들어온 것임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차원 결계를 펼친 것과 비슷한 효과인 것 같은데. 이 결계를 파훼하기 전에는 탈출조차 할 수 없겠군……. 그런데 대체 언제 이런 결계를 펼친 것이지? 전혀 그런 낌새도 없었는데 말이야. 마법진이 날아가고 하디우스가 나간 직후인 것 같은데…… 역시 10서클이라는 것인가? 정말 상상 이상이로군…….’
공간에 대한 사실까지 알게 된 메르딘은 지금 전투태세를 갖추며 싸울 준비를 하긴 하였지만 이미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아니 살아남을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전투는 지금의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였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메르딘에게 다시금 유리엘이 말을 건넸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준비가 끝났나 보네. 일단 가볍게 가 볼까?”
“자, 잠깐!!!”
“응? 왜 그래?”
“대, 대화를 나눠봅시다!!”
메르딘이 생각한 방법은 대화였다. 대화를 통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대화?”
“그렇소!! 무슨 일로 우리 올림포스를 공격하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대화를 한다면 분명 쌓인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오!”
“오해? 독고패가 죽은 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 거야?”
“알고 있소. 그렇지만 독고 맹주가 죽은 것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오?”
사실 지금 메르딘은 갑작스러운 퍼니셔의 공격에 대해서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올림포스와 퍼니셔가 직접 엮인 일은 아직 없었기 때문이었다.
메르딘의 이번 질문에 대한 답은 유리엘이 아니라 강민이 하였다.
“네 녀석들이 회의에서 무슨 논의를 했는지 잘 알고 있다. 내 약점을 잡아서 날 위협하고 웜홀 탐색기를 빼앗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것은…….”
강민이 회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말에 메르딘은 당황하며 내심 인상을 찌푸렸다.
‘독고 맹주는 왜 쓸데없는 소리를 이자에게 했지? 이런 강자에게 자신이 확실히 이길 것으로 생각했던 것인가?’
강민과 독고패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는 메르딘은 당연히 강민이 독고패의 기억을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메르딘은 독고패가 회의 내용을 직접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독고 맹주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우리 위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니오. 충분히 대화를 통해서 풀어갈 여지가 있을 것이오.”
“대화라…… 대화 좋지. 처음부터 이렇게 대화를 하려 했다면 우리가 이렇게 만날 일도 없었겠지?”
“그건…….”
“뭐 어쨌든 마지막 말이나 들어보자.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강민의 적대감은 여전하였지만 일단 대화를 할 여지가 있다는 점에 안도한 메르딘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일단 독고 맹주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서 위원회 의장의 이름으로 먼저 사과드리고 싶소. 분명 회의에서 그런 식의 말이 나온 것은 맞지만 그것은 일부 위원들의 이야기였소. 위원회 전체의 결정이 내려진 부분은 아니오.”
메르딘 역시 그런 의견에 동의하였지만,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을 하였다. 하지만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강민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물론 그런 논의는 한 잘못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것인데, 우리 위원회에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의장의 이름으로 다 들어주겠소. 사죄의 뜻이라 생각해도 좋소. 만약 의장의 자리를 원한다면 그것 또한 충분히 들어줄 용의가 있소.”
유니온이 표면적인 이능 세계의 관리자라면, 위원회는 실질적인 이능 세계의 지배자였다. 그 위원회의 의장이라면 실제로 이능 세계의 정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엄청난 자리였다.
지금 메르딘은 그 자리를 양도해준다고 강민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허…… 의장까지?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메르딘 의장?”
“독고 맹주를 상처 하나 없이 해치운 것으로 보아 그랜드 마스터조차 뛰어넘은 경지로 보이는데, 이 정도 제안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역시나 실력을 보여야 하는 것이군. 그런데 어쩌지? 위원회의 의장 같은 귀찮은 것을 할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그럼 무엇을 원하시오? 원하는 것을 말해주면 그대로 다 들어주겠소.”
강민과 유리엘은 메르딘을 처리하기 위해서 이곳 올림포스까지 왔지만, 메르딘이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자 다소 김이 빠져 버렸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렇게 저항을 포기한 자를 그냥 죽이는 것은 강민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처분을 망설이던 강민은 유리엘에게 심어를 보냈다.
[유리, 어쩔까? 이렇게 나오는 녀석을 그냥 처리하기도 찝찝한데 말이야.]
[그러게요. 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실력을 보일 것을 그랬나 봐요. 그랬으면 이런 번거로운 일들도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뭐,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잖아.]
처음 강민이 이곳에 와서 한 생각은 단순했다. 가족들을 지켜주고 그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의 힘을 주려 했었다. 그렇기에 행동 양식조차 그에 맞추었었다.
하지만 철저히 능력을 감추려고 마음먹지 않는 이상, 능력을 가진 자는 언제나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강민도 마찬가지였다. 강서영을 위해서 회사를 세우고 최강훈 등과 인연을 맺다 보니 결국은 이능 세계의 지배자인 위원회와도 이렇게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었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으니 어느 정도의 징치(懲治)와 수습은 필요하겠죠. 그냥 물러나는 것도 우습잖아요.]
[그래, 그래야지.]
메르딘은 알 수 없었지만, 강민과 유리엘은 한동안 심어를 통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민과 유리엘의 대화가 끝났고, 대화를 통해 생각을 정리한 강민이 메르딘에게 말했다.
“위원회의 의장인 당신 정도는 처리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니 김이 빠지는군.”
강민의 말에서 삶에 대한 희망을 본 메르딘은 자연스레 그의 말에 반문하였다.
“그렇다면……?”
“그래,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이지. 다만.”
“다만?”
“위원회를 해체하도록. 그리고 전력의 삼 분의 일은 유니온으로 보내.”
이것이 강민과 유리엘이 내린 결론이었다. 위원회 소속의 각 단체가 힘이 강성하더라도 위원회라는 연결고리를 끊어버린다면 전체로서의 그 힘은 극히 떨어질 것이었다.
거기다가 올림포스의 힘을 덜어내어 유니온에 힘을 실어준다면 하나의 단체로서 가질 힘은 유니온이 가장 크다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유니온을 통해서 이능 세계 전체를 컨트롤하기도 쉬워져서, 굳이 위원회를 구성하는 각 단체를 없애지 않아도 강민이 원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즉, 각 이능력자들이 세력을 유지한 상태에서 차원 통합을 맞이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메르딘의 태도를 보아하니 더는 뒤에서 수작을 부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만일 이런 기회를 줬는데도 전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그때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쳐내 버릴 것이라 강민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 그건…….”
“의장직도 내놓는다더니 이런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인가?”
“아니, 아닙니다. 아무리 내가 의장이라지만 위원회의 해체는 위원들의 동의가 필요한 것이라…….”
“그 정도 능력도 없는 것인가? 아, 못하겠다면 괜찮아. 내가 너를 포함하여 모든 위원을 해치워 버린다면 자연스레 위원회도 없어지겠지.”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농담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강민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메르딘은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해체하겠소. 해체할 것이오. 다만 조금만 시간을 주시오.”
“삼 일이다.”
“삼 일로는…….”
“그 이상 걸린다면 그냥 없애 버릴 테니 그렇게 알도록. 아, 일루미나티에게는 별도로 연락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야.”
갑자기 일루미나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메르딘은 의아한 표정으로 강민을 보며 물었다.
“일루미나티는 왜……?”
“그놈들은 지금 대화와 관계없이 없애 버리려고 했으니 말이야.”
강민의 말에 메르딘은 일루미나티의 명복을 빌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강자가 노리고 있다면 그들의 운명은 뻔했기 때문이었다.
“대화를 원한다면 전과 마찬가지로 유니온의 벤자민을 통해서 하도록. 참고로 말하자면 벤자민은 이미 내 수하가 되었으니 허튼수작을 부리면 다 알 수 있어.”
메르딘은 유니온이 이미 강민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지만, 어차피 퍼니셔와 통하는 창구는 벤자민밖에 없었고 그간 벤자민의 행적을 생각하니 상황이 이해가 갔다.
“아, 알겠소이다.”
“그럼 두고 보지.”
두고 보자는 말과 함께 강민과 유리엘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둘이 사라짐과 동시에 메르딘의 기감에 수많은 수하 마법사의 마나가 잡혔다. 다시 원래 자신이 있던 공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허어…… 이 정도 강자였다니…… 우리가 정말 잘못 생각했었군……. 일단 어서 위원들에게 연락하여 퍼니셔의 무력과 위원회의 해체를 알려야겠군.’
사라진 마법진들을 재구축하기 위한 회의와 위원회 해체와 관련해 연락하는 일 등으로 바쁘게 움직이던 메르딘에게 일루미나티의 사멸(死滅)이 알려진 것은 불과 세 시간 뒤였다.
일루미나티는 단지 해체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멸해 버렸다. 본부에 있던 모든 일루미나티의 회원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인근에 위치한 일루미나티 본부 역시 엄청난 크기의 크레이터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기에 회원들의 시체조차 볼 수가 없었다.
지금 뉴스에서 보여지는 사건 현장은 마치 핵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큰 폭발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유니온의 정보 관제 때문에 일반 세계의 뉴스에서는 이스라엘의 미사일 저장고가 터졌다는 식의 언급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