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현세귀환록
153. 응징(4)
강민과 짧은 대화를 마친 유리엘은 아직까지 의식을 차리 못하고 있는 최강훈, 정시아 그리고 엘리아에게 회복 마법을 펼쳤다.
이미 강민이 심각한 상태를 면하도록 해놓았기에 그들의 내외부는 유리엘의 마법에 따라서 빠르게 치료되어갔다.
그녀가 일행을 치료하는 동안 강민은 정보의 통제와 조작을 요구하기 위하여 벤자민에게 연락했다.
필리핀이 그리 선진화된 국가는 아니었지만, 세부는 외국 관광객이 많이 오는 지역이다 보니 치안 관리가 그나마 잘 되어 있는 편이었다.
이런 곳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연달아 발생하였고 상당한 인적 물적 피해가 발생하였기에 공권력이 개입하거나 언론에 노출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렇기에 윗선을 통한 정보 통제가 필요한 것이었다.
-강 회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강민의 수하가 된 벤자민은 처음에는 마스터라는 칭호를 썼지만, 강민의 지시에 따라서 지금은 강 회장이라는 직함으로 강민을 부르고 있었다.
“세부에서 일이 생겼다. 이곳 정부와 접촉하여 정보 관제를 하도록.”
-세부라면…… 필리핀이군요.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독고패가 찾아왔지. 그래서 죽였다. 그 와중에 이곳에 피해가 생겼고.”
전후 맥락 없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 하고 싶은 말은 다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벤자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 독고패라면 무림맹주 말씀입니까?
“그래. 그놈 말이야.”
자신을 기만하고 가족까지 위협한 독고패이기에 강민에게서 고운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허, 그 독고패를…….
독고패를 대면한 적이 있는 벤자민은 그가 얼마나 강자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독고패보다 낮은 경지의 벤자민이었으니 아마 독고패는 그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강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독고패를 아무런 피해 없이 해치웠다고 하는 것을 보니 벤자민은 새삼 강민의 무력이 대단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강민을 선택한 것이 잘한 판단이었다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리 놀라? 내가 위원회를 처리해 준다고 했지 않았나?”
-그, 그렇지요. 하지만……. 아, 아닙니다.
벤자민은 강민에게서 위원회를 처리할 것이라는 언급은 이미 들었지만 아마 그 시작은 쇼군과 같은 일반 위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고패와 같은 상임위원이 그 첫 타깃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벤자민의 놀라움이 큰 것이다. 강민 역시 벤자민이 어떤 의미에서 놀라는지 짐작이 갔기에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 없이 주제를 돌렸다.
“어쨌든 그놈을 처리하면서 이곳이 좀 시끄러워졌으니까 알아서 좀 처리해 줘.”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필리핀 지부에 연락해서 확실하게 정보 관제를 하도록 할 테니 맡겨주십시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수하가 있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편리했다. 힘만 놓고 본다면 여기 엘리아보다도 약할 벤자민이었지만, 이능 세계에서 유니온은 위원회를 제외한다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뒤처리도 끝나고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된 것 같자, 유리엘이 강민에게 말을 건넸다.
“위원회 녀석들을 더 이상 놓아두기 힘들겠네요. 이런 짓까지 벌이다니 말이에요.”
“그래, 차원 통합 때문에 두고 보고 있었는데 제 무덤을 파는군. 그런데, 유리. 전에 말한 것은 얼마나 진행되었어?”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유리엘은 강민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말한 것이라면…… 기초 체력을 키우는 그 일 말이죠?”
“그래. 위원회 녀석들을 처리해야 하겠지만 지금 무작정 다 쓸어버린다면 나중에 수습하는 것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유리의 구상이 어느 정도 구체화되었으면 그 방법을 시행하고 저 거슬리는 위원회 녀석들을 지워 버려야겠어.”
“음…… 그 방법은 시간이 좀 걸리는데 어쩌죠? 시스템 완성만 최소 1년에서 최대 3년 정도는 잡고 있었어요. 마나장 통합 전까지 완성한다는 계획이었는데 말이죠.”
유리엘의 능력으로 1년에서 3년을 본다고 말하니 강민은 의아해했다. 누구보다도 그녀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강민은 그녀가 그 정도 시간이 걸려서 만들어낼 것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도대체 무슨 방법이길래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 거야? 마나 위성을 만드는 정도로 큰일인 거야?”
“그래요. 어쩌면 그것보다 더 큰 일일 수도 있지요. 그나마 마나 위성을 다 깔아놓았으니 그 정도 시간을 말한 거예요.”
행성 전부를 포괄하는 마나 위성을 더 만드는 것은 정말 대역사(大役事)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것을 혼자서 하였다는 것은 그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루지 못할 위업이었다.
그런데 지금 유리엘은 그것보다 더 힘들 수도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보다 큰일이라. 점점 더 기대되는데? 그렇다면 지금 위원회를 모두 처리하는 것은 너무 시기상조일까?”
“아무래도 전부를 다 처리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는 조금 그렇죠. 우선은 머리라고 할 수 있는 의장만 처리하는 것이 어때요? 머리가 없다면 다시 이런 짓을 하긴 힘들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래, 우선은 그렇게 해야겠네. 그럼 위원회의 의장인 올림포스의 메르딘은 처리해야 할 것이고…… 아, 일루미나티의 아담까지는 처리하지.”
“일루미나티라면 엘리아의 대적 말이군요.”
“그래. 애초에 내가 퍼니셔인 것을 알린 것도 그놈이더군. 벤자민의 측근을 매수해서 알아냈더라고.”
강민은 독고패의 기억을 읽었기에 위원회의 회의에서 나눴던 대화들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엘은 아직 그에 대한 정보는 없었기에 강민은 필요한 정보를 간략히 추려서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 것이었군요. 어쩐지 그들이 갑자기 우리 정체를 파악한 것 같더라니.”
“그래. 어쨌든 일단 그 두 놈만 처리하고 나머지는 유리의 시스템이 완비되고 나면 처리하지. 그런데 도대체 어떤 시스템이야? 여전히 감이 안 잡히는데?”
“호호호. 분명히 민도 재미있어할 거예요. 3개월만 시간을 줘요.”
“3개월? 조금 전에는 최소 1년에서 3년이라면서?”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으니까 일단 사소한 오류는 시작한 뒤에 수정하는 것으로 하고, 시작하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진행한다면 그 정도면 될 것 같아요.”
“그래? 그 정도면 충분히 기다릴 수 있지. 기대할게.”
“기대할 만할 거예요. 호호호.
잠시나마 웃었던 유리엘은 회복은 끝났지만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최강훈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고, 유리엘의 그런 표정을 본 강민이 당연히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유리, 왜 그래?”
“애들이 이번에 많이 고생한 것 같네요. 셋 다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구요.”
“그러게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들에게 생존 마법기를 하나씩 주는 건 어때요?”
이것이 유리엘이 생각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강민은 그녀의 말에 반문으로 대답하였다.
“생존 마법기? 그걸 줬다가는 전처럼 되지 않겠어?”
과거 차원 여행 초반에 수하를 만들었을 때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주요 수하들에게 유리엘이 만든 생존 마법기를 지급했었다.
한미애나 강서영에게 준 것 같은 그런 최고급 마법기는 아니었고, 단지 일정이상의 상처를 입어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 자동 치유를 해주고, 감당하기 힘든 공격 앞에서 한 번의 방어막을 형성해주는 정도의 마법기였다.
물론 이 정도만 해도 보통의 마법사들이 만들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마법기라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 마법기를 받는 수하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서 더 용맹하게 싸웠다. 하지만 점차 문제점이 드러났다. 목숨을 잃을 염려가 없다 보니, 그들의 생존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전장에서의 생존 감각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리고 그런 생존 감각이 마나에 대한 감각으로 이어져서 깨달음을 얻어 마스터에 이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생존 마법기 덕분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정도 가시게 되자 수하들의 정신은 점점 마법기를 받기 전처럼 날카롭게 서 있지 않게 되었다.
실전에서 그런 나태한 감정은 죽음이나 패배와 같은 말이었다. 시일이 흘러 그렇게 타성에 젖게 되자 전력이 앞서는 전투에서는 압도적으로 이겼지만, 박빙의 전투에서는 계속 패배를 하게 되는 일이 잦아졌다.
승부처는 박빙의 전투에서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런 전투에서의 패배는 단순히 한 번 패한 것을 넘어서는 큰 패배였다.
결국 작은 전투에서는 이기나 큰 전투에서 지는 패턴이 이어지면서 점차 수하들은 세력을 잃어갔다.
사실 강민이나 유리엘이 나서면 한순간에 모든 적을 평정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수하들을 만든 의미가 없었다. 당시 그 차원에서의 행동방식은 ‘암중지배’였기에 직접 나서지 않고 수하들을 통해서 해결하려 했다.
반면, 수하들은 계속 강민과 유리엘에게 더욱 의존하려고 했고, 그에 실망한 강민은 마지막으로 생존 마법기를 압수하여 승부처가 되는 전장으로 보냈다.
역시나 수하들은 전투에서 밀렸다. 이미 타성에 젖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하들은 그래도 강민이나 유리엘이 구해줄 것으로 믿고 전쟁을 하다가 결국은 대부분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때 사건 이후로 수하들에게 생존 마법기를 제공한 적은 없었다. 이 차원으로 와서 한미애와 강서영에게 그런 마법기를 준 것은 단지 수하가 아니라 가족이었고, 가족들은 치열한 수련을 행할 전투 인력이 아니라 비전투 인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인간의 정신은 상황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변할 수 있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는 정련된 칼처럼 날카롭다가도, 나태해도 되는 상황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없이 무디어져 나무젓가락만도 못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지금 강민이 전처럼 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점을 말하는 것이었다. 최강훈이나 정시아, 엘리아 역시 어떤 상황이든 죽을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들처럼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지금까지 보아온 바로는 이들은 마법기 하나 정도로 그렇게 될 것 같진 않아요. 그리고 목숨만을 살린다는 생각으로 마법기가 작동하는 트리거를 심각한 상황으로 설정하면 정말 긴급한 상황에서나 발동하겠죠.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단지 그 정도라면 내가 잔류 마나를 남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번에도 강훈이는 잔류 마나가 남아 있어서 저렇게 살아남았잖아.”
“그렇긴 하지만 앞으로 마나장이 통합되고 그러면 흉험한 전투들이 많을 텐데 한 번 정도 더 여지를 주고 싶어서요. 서영이를 과부 만들 수는 없잖아요. 호호.”
아직 결혼하지 않아 과부라는 말은 맞지 않지만 유리엘은 우스갯소리를 덧붙여 강민에게 말했다. 유리엘의 말에 강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 하긴 이번에도 거의 죽을 뻔했지.”
“그러니까 말이에요.”
당시 최강훈은 강민의 잔류 마나가 활성화되어 생명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엘리아의 마법 결계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 상태에서 추가적인 공격이 들어왔다면, 아마 살아남기가 힘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강민 역시 유리엘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래. 그럼 굳이 마법기에 대해서 알려주지는 말고 지금 통역 마법기에 기능을 추가하는 식으로 하지. 엘리아는 그게 없으니까 다른 명목으로 하나 만들어주고.”
“그렇게 할게요. 서영이나 어머님이 충격받을 것을 생각한 것도 있지만, 나도 그리 오래 지낸 것도 아닌데 이 녀석들의 귀여운 모습에 정이 들었는지, 얘네들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귀여운 모습이라는 말이 재미있었는지 강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하하. 귀여운 녀석들이긴 하지.”
“그렇죠? 특히 강훈이의 쓸데없이 진지한 모습도 귀엽고, 시아의 애교 있는 모습도 귀엽네요. 엘리아는…….”
유리엘이 엘리아를 언급한 부분에서 말을 멈추자 강민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엘리아는 옛 생각이 나게 하잖아.”
과거 일족의 잔재를 이은 엘리아를 보면 유리엘은 가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했다. 강민은 이 점을 짚었던 것이었다.
“그렇죠. 예전 생각이 나서 가끔 아련해지는 느낌이 있지요.”
“이번 차원에서의 일이 끝나면 처음 우리가 만났던 그곳에도 한 번 가 보자.”
“거기는…… 민에게 안 좋은 기억이 많잖아요.”
수천 년간의 신체적 정신적 실험, 아니, 고문을 받아왔던 차원이기에 처음 그 차원은 강민에게는 안 좋은 기억을 넘어, 생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안 좋은 기억이 많지. 하지만 유리를 만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안 좋을 기억을 지워 버릴 수 있을 만큼 의미 있는 곳이지.”
강민에게 유리엘은 단순한 배우자를 넘어 영혼(靈魂)의 동반자이자 영원(永遠)의 동반자였다. 그런 사람을 만난 곳이니 안 좋은 기억들을 모두 묻어두고 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가요? 하긴 내게도 그런 곳이니…….”
“그래, 우리에게 그런 곳이니 그런 고문 정도로 그곳을 싫어할 필요가 없잖아.”
강민의 말에 유리엘은 모두가 반할 것 같은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이곳의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다음에 가봐요.”
그런 유리엘을 바라보던 강민은 자석처럼 그녀에게 끌리듯 그녀에게 다가가 가만히 그녀를 안아주었고, 유리엘 역시 강민에게 호응하며 두 팔로 그를 감쌌다.
잔잔한 해변을 배경으로 한 둘의 아름다운 모습은 주위의 폐허와 대비되어 더욱더 빛나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