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현세귀환록
152. 응징(3)
아직 젊어 보이는 최강훈이 자신에게 도를 뽑아 들고 뛰어오자, 남궁백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더 이상 달려가지 않고 제자리에 선 뒤 창천검의 기수식 창천배례(蒼天拜禮)를 펼쳤다.
창천배례는 평범한 세로 베기의 초식이었는데, 검기가 이글거리는 남궁백의 애검 창천을 보았다면 평범하다고 말하기는 힘든 검초였다.
최강훈 역시 기세를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환도에 도기를 발현하여 황룡승천의 식으로 남궁백의 검세를 맞받아쳤다.
콰앙!
검기와 도기의 충돌은 역시나 엄청난 폭음을 터뜨렸고, 이 폭음이 신호탄이나 된 듯 엘리아와 정시아도 각자 대결에 돌입하였다.
이미 8서클의 마법사인 엘리아는 상대적으로 쉽게 도왕을 상대하고 있었다. 최강훈과 대련을 통해서 무인에 대한 대응도 익숙하였기에 그녀보다 마나량조차 적은 도왕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강훈의 생각대로 정시아가 문제였다. 그녀 스스로는 A+급의 능력에 뱀파이어 종족의 각성기인 진혈까지 깨운다면 마스터 하나쯤은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내심 생각했지만, 마스터와 마스터가 아닌 자 사이의 간극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컸다.
처음에는 정시아가 우세를 잡는 듯 보였다. 그녀의 빠른 스피드를 장왕이 따라오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진혈을 일깨워 놓아서 그녀의 스피드는 웬만한 마스터급보다 빠른 속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시아는 파상공세를 펼치며 빨리 장왕을 잡으려고 하였는데, 마스터는 마스터였다.
그녀의 팔을 스치듯 지나간 풍뢰장의 파편에 한쪽 팔이 날아갈 뻔한 뒤로 정시아는 장왕의 장공(掌功)을 극도로 경계하며, 파상공격보다는 속도로 장왕을 혼란스럽게 하여 일격필살의 공격으로 제압하고자 하였다.
한참 동안 빠른 속도로 장왕의 사방을 노리면서 그에게 몇 번의 유효타격을 넣자 자신감이 붙은 정시아는 자신이 마스터를 잡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리 마스터의 내구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런 식의 유효타가 계속 이어진다면 장왕은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정시아는 판단하였다.
그러나 장왕은 마스터였고 정시아는 아니었다. 무공을 익힌 마스터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초월의 영역이라는 비기가 있었다.
초월의 영역에 들어가 보지 못한 정시아는 단순히 조금 더 빨라지는 정도로 그 경지를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 착각이 정시아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버렸다.
퍽!! 퍽! 퍼억!!
고속이동하던 정시아는 세 번의 타격 소리와 함께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강서영이 잠들어 있는 곳까지 튕겨나 버렸다. 제대로 자세조차 잡지 못하고 바닥에 뒹군 것을 보니 한 방에 의식까지 잃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여태껏 장왕은 정시아의 고속이동에 반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초월의 영역에 들어간 장왕은 그녀의 공격을 상당수 피할 수 있었음에도 피하지 않고 일격필살(一擊必殺)의 한 방을 기다렸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타이밍이 맞았을 때 풍뢰장의 연환삼식을 펼쳐서 그녀를 한 방에 잡은 것이었다.
남궁백과 대결을 하던 최강훈은 정시아가 당하는 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 방에 정시아를 전투 불능으로 만든 장왕이 음산한 웃음소리를 내며 정시아를 완전히 끝장내고, 잠들어 있는 한미애와 강서영을 생포하기 위해서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안 돼! 일단 서영 누나와 시아를 구하러 가야겠어!’
남궁백은 분명 최강훈보다 한 수 위의 상대였다. 그렇기에 최강훈은 지금껏 신중한 자세로 일격 일격의 공격과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정시아가 쓰러지면서 더 이상 그런 신중함을 보일 시간이 없었다.
다급해진 최강훈은 신속하게 마나를 돌려 초월의 영역에 들어간 후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무공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마스터에 오른 이후에야 연무를 시작하여 최근에 와서는 어느 정도 성취를 본 은하검결(銀河劍訣)이었다.
최강훈은 은하도도(銀河滔滔)의 은빛 물결을 시작으로 은하명멸, 은하개벽까지 연달아 절초를 뿌리면서 남궁백을 떨쳐내려 하였다.
하지만 남궁백은 이미 검기지경의 끝부분에 다다른 강자였다. 기회만 된다면 검강지경도 엿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무공의 소유자이기에 최강훈의 절초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소 손발이 어지러워지며 약간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금세 은하검결을 흘려내고 받아치는 등 종전의 모습을 찾아갔다.
이에 최강훈은 좀 더 강한 검격을 뿌렸지만 여전히 남궁백은 철벽과도 같은 방어를 하며 최강훈의 검격을 받아냈다. 그러면서 아직은 완숙하지 않은 은하검결의 사이사이로 날카로운 검초를 집어넣었는데, 그때마다 최강훈의 검세는 크게 흔들렸다.
아직은 남궁백이 최강훈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상황이었다.
그때 갑자기 뒤쪽에서 독고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끌 시간이 없다! 퍼니셔가 오기 전에 이놈들을 다 잡아야 한단 말이다. 너는 도왕과 같이 저년을 잡아라. 이놈은 내가 처리할 테니 말이야.”
“그러지요.”
남궁백은 독고패의 지시가 그다지 마음에 안 드는지 자리를 내어주면서 다소 불손해 보이는 어투로 말했지만, 독고패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최강훈 앞에 섰다.
“어린 나이에 꽤나 훌륭한 무공과 경지지만 그래 봤자 거기까지다. 인질들이 많으니 네놈 정도는 목숨을 끊어놔야 누가 칼자루를 쥐었는지 퍼니셔가 알 수 있겠지?”
질문과 같은 독백으로 말을 마친 독고패는 가볍게 손을 내질렀는데, 가벼운 손놀림과는 달리 독고패의 손에는 가공할 만한 회전하는 강기가 서려 있었다.
독고패는 수라파천장의 절초 중에서도 검강지경이 아니라면 보고도 피하기 힘든 수라와선장(修羅渦旋掌)을 펼쳐낸 것이었다.
수라와선장은 그리 빠른 공격은 아니었지만 회전하는 강기가 기이한 흡인력(吸引力)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막는 것보다 월등히 힘든 장공이었다.
당연히 수라와선장을 처음 보는 최강훈은 처음에는 몸을 피하려 하였는데 기이한 흡인력에 피할 타이밍을 놓쳤고, 결국 전방에 호신막을 펼쳐 막아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콰앙!!!
하지만 수라와선장은 강기지경의 무공이었다. 아직 검강을 시전하지 못하는 최강훈이 감당하기 힘든 공격이었다.
수라와선장에 직격당한 최강훈은 폭음과 함께 십여 장을 뒤로 튕겨 나갔다. 팔다리가 이상하게 꺾인 채 바닥을 구르는 것을 보니 최강훈 역시 정시아처럼 일격에 의식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단전 부위가 시커멓게 타버리고 호흡마저 미약해지는 것이 정시아보다 더 심각한 상황인 것처럼 보였다.
최강훈이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이렇게 한 방에 나가떨어지지 않았을 것이지만, 독고패의 일격이 일종의 탐색용 무공이라 생각하고 나중을 위해서 여력을 남겨둔 것이 최강훈의 패착이었다.
별것 아닌 공격처럼 손쉽게 수라와선장을 시전한 독고패였지만 사실 한 방에 끝내기 위해서 평소에 사용하는 내력보다 더 강한 내력을 사용하여 공격한 것이었다.
경험이 부족한 최강훈은 그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막았다가 이렇게 된 것이었다. 물론 전력을 다했다 하더라도 그리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시간은 끈다는 최초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는 것이 나았으리라.
최강훈까지 의식을 잃은 채 바닥을 나뒹구는 것을 본 엘리아는 지금 상대하는 도왕을 화염폭발의 플레어 마법으로 크게 한 번 밀어낸 후 재빨리 최강훈을 수습하여 정시아와 강서영 등이 있는 후방으로 물러섰다.
아직 검왕이 채 합류하기 전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검왕과 도왕이 합공을 했다면 그녀로서도 이런 여유를 내기는 힘들었을 것이었다.
최강훈을 수습한 엘리아는 목에 건 목걸이의 팬던트 부분을 뜯어내어 바닥에 꽂고 시동어를 외쳤다.
“디멘션 실드!”
유리엘에게 배운 새로운 마법 체계와 그녀의 특기인 공간 마법을 결합하여 만든 최초의 마법인 차원 결계 디멘션 실드였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마법이라 도박을 한다는 심정으로 시전한 마법이었는데, 그녀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마법은 무리 없이 시전이 되었다.
‘휴…… 다행이다. 도박이 먹혔어. 이 마법이면 강민 님과 유리 님이 오실 때까지……. 음?’
자신을 제외한 둘은 이미 전투 불능이 되었지만 디멘션 실드가 전개되며 일단 한숨 돌리려 한 엘리아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실드가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엘리아는 알 수 없었지만 독고패의 강기공격이 들어온 것이었다.
공세는 허차원으로 전이되었기에 폭음이나 파열음은 들리지 않았는데, 결계의 시전자인 엘리아는 분명히 결계의 흔들림을 느낄 수 있었다. 외부에서 결계의 허용 한도를 능가하는 충격이 가해진 것이었다.
‘이런 공격이 계속 들어온다면 결계가 무너진다. 안 돼. 결계를 직접 운영해야겠어.’
이 정도 충격이면 결계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엘리아는 자신의 마나를 결계의 마나와 직접 연동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이 방식은 결계를 효율적으로 컨트롤하며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결계의 충격이 자신에게도 전이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특히, 결계가 한도 이상의 충격을 받는다면 그녀에게도 막대한 충격이 가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엘리아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계가 깨어진다면 모두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굳게 입술을 깨문 엘리아는 마나를 운용하여 결계에 적극적으로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외부에서 수차례의 공격이 가해졌고 그때마다 엘리아의 입에서는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옆에서 최강훈의 숨소리가 작아지며 생명 반응이 작아지는 것이 보였지만 그에게 치유 마법 하나 펼쳐줄 여유가 없었다. 결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잠시라도 결계에서 손을 뗀다면 결계는 그 순간 무너져 버릴 것이기에 엘리아는 옆에 있는 최강훈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화아아악!
그 순간 최강훈의 단전에서 기이한 마나가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그의 몸을 안정화시켰다. 강민의 잔류 마나가 발현된 것이었다.
그 마나에 최강훈은 완전히 치유된 것까지는 아니지만 고비는 넘겼다고 할 수 있는 상황까지는 회복이 되었다.
‘휴…… 다행이다. 그런데 두 분이 오실 때까지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최강훈이 살아난 것은 다행이었지만 아직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기에 엘리아의 걱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 걱정처럼 더 큰 외부의 충격이 지속적으로 결계에 가해졌고, 어느 순간 엘리아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때 강민이 나타난 것이었다.
* * *
‘이렇게 된 것이군.’
독고패의 기억을 다 읽어서 상황을 완전히 파악한 강민은 최강훈, 정시아와 엘리아를 대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한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따뜻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강민은 이제 필요한 것은 다 파악했기에 손가락에 마나를 돋워 독고패의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것은 무림맹이라는 거대 집단을 수십 년간 이끈 수장에게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최후였다.
독고패가 죽은 직후 마나 유동이 발생하더니 유리엘이 나타났다. 유리엘은 주변을 빠르게 훑어본 후 상황을 파악하고는 강민에게 말을 건넸다.
“벌써 다 처리했네요. 그런데 저 자국은…… 그걸 사용한 거예요?”
“그래, 웬만하면 하지 않으려 했는데. 더 이상 놔두긴 그렇더라고. 어차피 이 방법이 위원회에 대한 정보를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이고.”
“그렇지만 별로 좋아하지, 아니, 좀 싫어하는 방법이었잖아요.”
강민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유리엘은 이 방법이 강민이 싫어하는 방법인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의아해하며 다시 말했다.
“그렇지. 가끔은 오물이 튀는 것을 알면서도 해야 할 일들이 있잖아? 뭐 그런 거야. 신경 쓰지 마.”
“그래요. 그런 일들이 있지요.”
유리엘은 대답하면서도 위원회 위원들의 명복을 빌었다. 강민이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것은 정말 그들을 철저히 처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