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현세귀환록
148. 반전(3)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구양풍은 혈마단에게 손짓을 하며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혁군에게도 준비하라는 의미의 말을 건넸다.
“조 대주님, 검강지경(劍?之境)이라고 추정되는 인물입니다. 전력을 다하셔야 할 것입니다.”
강민과 구양풍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조혁군은 백강호와의 대결에서 소진한 체력과 마나를 어느 정도 회복했는지, 한결 편해진 얼굴로 구양풍에게 대답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필사의 각오로 전투에 임할 것이오.”
조혁군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인 구양풍은 혈마단원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각성단을 복용해라! 대신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는다면 정식 무림맹도로 받아들일 것이다.”
각성단이라는 말에 혈마단원들은 다소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이어지는 구양풍의 말에 거침없이 품속으로 손을 넣어 금박의 환약을 씹어 삼켰다.
정식 무림맹도가 되는 것은 지옥환의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 뇌옥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간절한 희망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각성단을 복용한 혈마단원들이 뿜어내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각성단의 유효시간이 끝나고 나면 족히 한 달간은 무공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무림맹의 정예 무력단체 못지않았다.
장내에는 혈마단원들이 뿜어내는 흉흉한 기세로 마치 시위를 놓기 직전의 활과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구양풍을 비롯한 혈마단원들은 긴장하고 있었지만, 강민이나 유리엘은 너무도 편안한 모습이었다.
이들 정도에 긴장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일수에 혈마단원들을 지워 버리려는 그때, 갑자기 강민의 표정이 바뀌며 의아하다는 듯한 신음성이 나왔다.
“음?”
갑작스러운 강민의 행동에 유리엘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래요, 민?”
“유리, 위성으로 강훈이 상황을 확인해 봐.”
“강훈이요? 잠시만요.”
다짜고짜 위성을 확인하라는 강민의 말에 유리엘은 의아해하면서도 강민의 말을 따랐다. 몇 초도 걸리지 않아 유리엘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강민에게 말했다.
“음…… 이런. 공격받고 있는데요? 강훈이는 벌써 빈사지경이군요. 돌아가 봐야겠어요.”
“역시 그렇군. 강훈이에게 심어놓은 잔류 마나가 활성화되어서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유리, 내가 먼저 가 있을게. 여기 좀 처리해 줘.”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강민이 어떤 식으로 간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유리엘은 강민이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 가는 것인지 알겠다는 듯 자연스레 대답하였다.
“네. 어서 가요.”
아직 한미애와 강서영이 가진 마법기가 활성화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현재까지는 둘에게 직접 공격이 들어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어차피 직접 공격이 들어오더라도 마법기 덕분에 둘의 안전에는 이상이 없겠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강민과 유리엘이 파악한 바로는 최강훈은 지금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강민의 잔류 마나가 없었다면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상황이 되지 않고서야 잔류 마나가 발동할 일이 없으니 말이었다. 또한 최강훈이 이런 상황이라면 정시아 역시 안전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물론 둘이 죽는다고 해서 강민이나 유리엘이 심적 충격을 받을 일은 없었지만, 강서영이나 한미애는 달랐다.
지인의 죽음은 일반인인 가족들에게는 큰 충격이 될 수 있을 것이기에,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살릴 필요가 있었다.
차라리 강서영이 애초에 마법기의 보호 마법을 강제 활성화했다면 유리엘이 더 빨리 상황을 알아차렸을 것인데, 경황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그녀는 아직 보호 마법을 활성화하지 않고 있었다.
둘의 대화를 들었는지 의기양양한 모습을 하고 있던 구양풍에게 무겁게 표정을 굳힌 강민이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기다린 것이 이것이었나? 이렇게 기만당하는 것은 오랜만이군. 하지만 우릴 과소평가한 것 같아. 누굴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저승에서 만나도록 해. 유리, 이곳 처리하고 그쪽으로 와. 먼저 가지.”
말을 마친 강민의 몸에 은은한 빛이 서리더니 이내 폭발적인 빛이 터져 나오면서 자리에서 사라졌다.
강민이 자리를 비운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유리엘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광체화(光體化)까지 사용할 정도면 민이 꽤 화가 났나 보네. 누군지 모르겠지만 잘못 건드렸어.”
광체화는 광검(光劍)의 경지가 극에 달하면 사용 가능한 수법이었는데, 몸 전체를 빛으로 변화시켜서 빛과 같은 움직임으로 이동하고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과거 다크 스타의 제우스가 사용했던 번개화와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였지만, 광체화는 감히 번개화 정도로 가늠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번개화는 번개에 극도로 친화력이 높은 제우스가 얻은 초능력의 일종인 이능이었지만, 광체화는 극도로 수련된 무공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산물이었다.
검강지경의 그랜드 마스터보다 훨씬 윗줄에 있는 광검지경에서도 극에 달하여야 사용이 가능한 경지이기 때문에 그랜드 마스터조차 이기지 못하는 제우스의 번개화 따위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광검의 경지보다도 몇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강민은 이 광체화의 사용이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모되는 마나가 만만치 않은 방법이기도 하였다.
일주일 내내 검강을 뿌리는 것보다 잠시 광체화를 사용하는 것이 더 많은 마나를 소모하는 방법이니 그 마나 소모량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얼른 정리하고 따라가야겠어.”
유리엘은 우선 손을 저어 구양풍의 손아귀로 떨어진 백강호 일행과 한수강을 잠들어 있는 한수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뒤로 옮겼다.
구양풍은 자신이 잡아놓은 이유성과 이미 혼절한 백강호가 갑자기 사라지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이내 유리엘의 뒤에 백강호 일행이 있는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년의 마법 수준도 마스터급 이상이라는 말인가.’
일반적으로 이능 세계에서 퍼니셔는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퍼니셔의 이름으로 행해진 대부분의 것은 강민과 유리엘이 같이 한 것이지만, 그런 내막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이능력자들은 퍼니셔를 그랜드 마스터급의 무술가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퍼니셔의 행적에서 드러나는 마법들은 마법 도구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능력자의 상식이었다.
구양풍 역시 그런 잘못된 상식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물론 강민이 쓰는 마법은 유리엘이 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퍼니셔의 무력은 강민의 무력이고 유리엘은 단지 보조 마법사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리엘이 인식 장애 마법이나 웜홀 탐색기 등을 만든 것 또한 파악하고 있었지만, 특이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로만 보았지 무력이 강하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즉, 무력만을 놓고 본다면 유리엘의 무력을 한참이나 낮추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사용한 마법들을 보니 자신이 마나 유동을 느끼기도 전에 시전되는 것들이 많아 다소 긴장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강민이 이동할 때도 마법사 고유의 마나 유동이 나타나지 않았군.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데?’
구양풍은 강민이 광체화를 통해서 이동한 것도 유리엘의 마법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무공으로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줄 알았으면 미리 마나실드 주문서를 가져오는 건데 아쉽게 되었군.’
그들이 사용할 마나실드는 유리엘에게는 종잇장만도 못한 방어주문이었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는 구양풍은 주문서를 챙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공격명령을 내렸다.
“공격하라!”
구양풍의 명령에 따라 살아남은 혈마단원들은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각성단의 영향 때문인지 이미 죽은 혈마단원들보다 월등히 앞선 속도였다.
주변의 나무를 밟으며 허공으로 뛰어오른 혈마단원들은 그리 높지 않은 공중에 떠 있는 유리엘에게 각자의 기합성을 내뱉으며 검격을 펼쳐나갔다.
“하얏!!”
“합!”
하지만 그들의 검격은 유리엘에게 닿지조차 못하였다. 검격이 닿기도 전에 유리엘의 손이 저어졌기 때문이었다.
파지지지직!!
이번에는 뇌전이었다. 유리엘의 손짓에 따라 나타난 뇌전은 체인라이트닝 마법과도 흡사해 보였는데, 사방팔방으로 뿌려지는 뇌전이 혈마단원들이 자리하고 있는 범위 전체를 뒤덮어 버렸다.
“으악!!”
“으아아아악!!”
“크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대부분의 혈마단원들은 숯덩이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수준이 높던 조장급 혈마단원 몇몇은 그래도 각성단을 통해 일시적으로 마나 집중도가 높아졌는지 뇌전에도 다소 버티는 것 같았으나 시간 차이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버티지 못하고 모두 숯덩이가 되어 버렸다. 결국 남은 사람은 구양풍과 조혁군뿐이었다.
구양풍도 간신히 버틴 것이어서 조금만 더 뇌전이 이어졌다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심 한숨을 쉬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이자의 마법 실력도 마스터급을 훌쩍 뛰어넘는다!’
당연한 판단이었지만 그 당연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너무 늦었다. 유리엘의 어려 보이는 외모 역시 그가 유리엘의 마법을 과소평가하는데 한몫을 하였는데, 후회라는 것은 아무리 빨리해도 이미 늦은 것이었다.
이제 남은 희망은 권왕 조혁군뿐이었다. 조금 전의 마법을 자신과 조혁군이 버텨낸 것으로 보아 유리엘은 보통 S급이라 불리는 7서클은 넘어선 것 같지만 아직 8서클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 구양풍은 판단했다.
그리고 보통 마스터라 불리는 검기지경과 7서클 마법사는 비슷한 경지로 평가받기에 구양풍은 조혁군이라면 해볼 만할 것이라 생각했다.
“조 대주님! 어떻습니까? 상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상대적으로 뇌전 마법에서 피해가 적었던 조혁군은 잠깐 마나를 돌려 몸 상태를 점검하더니 구양풍에게 대답했다.
“이 정도 마법이라면 할 만하겠소. 내 저년을 산 채로 잡아 맹주님께 진상할 테니 기대하시오!”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조혁군은 유리엘의 미모에 흑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맹주에게 바친다는 말로써 그녀를 생포하는 것을 합리화하여 자신의 음심을 채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눈빛을 한두 번 받아본 것이 아닌 유리엘은 당연히 조혁군의 음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참 구린내 나는 놈이군. 네놈은 특별 대접을 해줄게. 카알라둠!”
오랜만에 발하는 그녀의 시동어였다. 오른손으로 조혁군을 가리키며 시동어를 외쳤기에 조혁군은 황급히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훌쩍 뛰어 피했다.
하지만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서는 아무런 마나 반응이 없었다. 마나 유동이 일어난 곳은 조혁군의 몸이었다.
“으음.”
일단 뒤로 물러선 조혁군은 갑자기 온몸이 간지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전투 중에 있었기에 몸을 긁지는 않고 있었는데, 점점 더 그 가려움은 증폭되어갔다.
이내 몸을 긁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 정도까지 가려움은 커졌는데, 마스터의 초인적인 의지력을 볼 때 일반인이라면 이미 온몸을 피가 나도록 긁었을 가려움이었다.
“으윽. 윽, 으으윽…….”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가려움이라기보다는 통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가려움이 가시고 통증으로 변해서 잠시나마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통증 역시 진폭을 키우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그리고 그 통증이 끝이 아니었다. 통증이 극에 달하면서 조혁군의 손발 끝이 붕괴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발은 신발 속에 있어 밖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은 손톱의 끝부분부터 붕괴되어 먼지로 변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으악!!!!!!!”
몸이 붕괴되는 고통은 그가 지금껏 겪어왔던 그 어떤 고통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이 고통은 초인적인 수련을 이겨낸 마스터도 버티기 힘든 것인지 조혁군은 엄청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