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현세귀환록
147. 반전(2)
“누나! 어서 숙소로 돌아가서 유리 누나한테 연락해! 여긴 내가 맡을게!”
숙소로 돌아가면 유리엘과 연락할 수 있는 마법 수정구가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 전화로 연락을 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휴대전화를 꺼내서 그것을 누를 경황도 없었다.
또한 행여 유리엘이 늦게 전화를 받는다면 자신들의 상황을 알리기도 전에 당할 수 있었기에, 숙소로 달려서 수정구를 사용하는 것이 낫다고 한수강은 판단했다.
그리고 한수아에게는 말을 못 했지만, 그 속내에는 최소한 숙소까지 가서 유리엘을 부른다면 자신은 몰라도 한수아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당황한 한수아는 그런 한수강의 속내도 모르는 채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유리엘에게 연락하기 위해서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수아를 보낸 한수강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멀리서 뛰어오는 혈마단원을 맞이하였다.
‘내가 막아야 우리가, 아니, 누나가 살 수 있어!’
한수강은 난폭하게 뛰어오는 10명의 혈마단원 모두를 필사의 각오로 막으려 하였지만, 그 혼자서 10명을 모두 막기에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앞장선 다섯 명의 혈마단원이 한수강을 가로막는 동안, 나머지 다섯 명은 한수아를 잡기 위해 한수강을 지나쳐 버렸다.
한수강은 자신을 지나쳐서 한수아에게 가는 혈마단원들을 막기 위해서 그들에게 검격을 날리려 하였지만, 이미 다섯 명의 혈마단원이 자신을 둘러싸고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숲속의 나무를 방패 삼아서 그들을 상대한다고 해도 세 명도 채 상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한수아를 노리는 혈마단원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한수아는 역시 열심히 뛰어갔지만 일반인의 속도로 이능력자의 추격을 뿌리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수강을 지나친 혈마단원은 몇 초 지나지 않아서 한수아를 손에 잡을 수 있을 정도까지 접근하였다.
한수아의 뛰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일반인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 혈마단원은 거리낌 없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환호를 외치려고 하였다.
“잡았……!”
쾅!!!
하지만 그는 말을 채 다 마치지도 못하였다. 폭음과 함께 숯덩이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폭음에 한수아를 쫓던 혈마단원뿐만 아니라 이미 이유성 일행을 잡은 혈마단원의 시선까지 모두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그 시선에는 당연히 구양풍과 조혁군의 시선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웬 놈이냐!!”
혈마단원이 당하는 것을 확인한 구양풍은 빠르게 두리번거리면서 마법 공격의 시전자를 찾았다. 그러나 구양풍의 시야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구양풍의 외침에도 마법의 시전자가 나타나지 않자 구양풍은 생각을 달리하였다.
‘마법 함정을 밟은 것인가?’
그때 여전히 자신이 잡힐 뻔한 건지도 모르는 채 죽을힘을 다해 뛰어가던 한수아가 풀썩 쓰러지더니 하늘로 서서히 떠올라 갔다.
그렇게 한수아가 떠오르는 방향의 하늘에는 두 명의 인영이 마치 땅을 밟고 선 것처럼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강민과 유리엘이었다. 유리엘은 잠든 한수아의 안전을 확보한 것과 동시에 한수강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혈마단원에게 손을 내저었다.
콰가가강!!
유리엘의 손짓에 따라 하늘에서 다섯 줄기의 불기둥이 떨어졌다. 불기둥은 엄청난 굉음을 내며 번개가 친 것처럼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곧장 사라졌다. 그리고 그 불기둥이 떨어진 자리에는 다섯 개의 숯덩이만이 회색 연기를 모락모락 피어 올리며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순식간에 여섯 명의 혈마단원이 당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구양풍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정식 맹도가 될 다섯 명을 제외하곤 다 소모품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식 맹도가 될 그 단원조차 소모품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부하들에게 대한 잠시의 애도도 없이 구양풍은 하늘에 떠 있는 강민과 유리엘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한참 동안 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도 평범한 두 얼굴은 뒤돌아선다면 잊어버릴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구양풍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인식 장애! 그렇다면…….’
강민과 유리엘에게는 인식 장애 마법이 걸려 있어서 구양풍은 둘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상황에 따른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이 정도 능력자는 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도 능력자 중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한수강과 한수아를 구할 이유가 있는 능력자는 더 적었다.
당연히 퍼니셔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퍼니셔!! 어, 어떻게? 지금은 세부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놀라 외치는 구양풍의 말을 강민이 받았다.
“역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군.”
코사무이에서 세부로 옮겨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구양풍은 정확하게 강민의 행적을 파악하고 있었다. 출입국 기록을 통해서든 인력을 동원해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강민을 감시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강민의 말에서 퍼니셔임을 확신한 구양풍은 표정을 굳히며 내뱉듯이 말을 하였다.
“어떻게 이곳의 상황을 알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넌 후회하게 될 것이야.”
“후회? 후회는 가만히 있는 날 건드린 네놈들이 하겠지.”
“가만히 있다니? 네놈이 나서서 이능계의 질서가 혼란스러워졌지 않은가!”
강민에게 분노하는 듯 말하는 구양풍의 눈 깊은 곳에는 지금 말투와는 달리 얼음과 같이 냉정한 한 줄기 눈빛이 서려 있었다.
“내가 나서서 혼란스러워졌다라……. 역시 기득권들의 고정관념에 빠져 있군.”
“무슨 고정관념 말이냐!”
구양풍은 그렇게 외치며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주머니 안에 있는 조그만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네놈들만이 이능 세계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말하는 것이지.”
강민이 버튼에 대해 언급하지 않자 자신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판단한 구양풍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강민의 말에 대답했다.
“그것은 당연한 사실이지, 고정관념이 아니다! 감히 위원회를 제외하고 어떤 곳에서 이능 세계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집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구양풍은 그것을 진리라고 믿고 있었다. 아니, 구양풍뿐만 아니라 많은 이능력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수십 년간 위원회의 아래에서 이능 세계의 질서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위원회에서만 이능 세계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그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지? 단지 무력이 강해서? 그렇다면 그보다 강한 무력을 갖고 있다면 그자가 이능계를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겠지만 이능 세계는 결국은 강자의 세계였다.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뭉치고 있는 것도 한 집단에서 독점할 수 없기에 같은 테두리로 묶여 있는 것이지, 만일 어느 한 집단의 힘이 나머지 모든 집단을 압도해 버린다면 그 집단에서 단독으로 이능계를 장악할 가능성이 컸다.
“크큭. 그러니까 네놈의 말은 네가 전 위원회를 합친 것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냐? 그래서 위원회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인가? 조금 강하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지금까지의 행적으로 보면 퍼니셔는 분명 강하였다. 하지만 구양풍의 생각에는 독고패가 마음을 먹는다면 그 정도의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과거 독고패의 발언으로 볼 때 올림포스의 메르딘 역시 독고패 정도의 강자였기에 위원회에서 강민을 제거하려 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것이 구양풍이 가진 안목의 한계였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일 텐데, 구양풍이 볼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것이 누군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허. 네놈은 네가 강해서 위원회가 너의 눈치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웜홀 탐색기만 없었다면 네놈은 진즉에 제거되었을 것이야.”
구양풍은 무슨 이유인지 지금 강민을 자극하며 대화를 질질 끌고 있었다. 드러내 놓고 하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굳이 이야기하자면 시간을 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구양풍이 어떻게 생각하든 지금 그가 강민보다 약한 것은 사실이었다. 마스터인 조혁군이 합세한다 하더라도 강민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시간을 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바로 지원군을 부르는 것이었다.
옆에서 강민과 구양풍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리엘이 그 사실을 지적하며 심어를 날렸다.
[계속 우리를 자극하는 발언을 하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시간을 끄는 것 같은데, 뭔가 있나 보네요.]
[그래, 지금 마나 파장을 보면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이 분명한 모양이군.]
[그렇죠? 아까 전 주머니 속에 버튼을 누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원군을 부른 것일까요?]
구양풍은 둘이 알아채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강민과 유리엘은 구양풍이 주머니 속 버튼을 누른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버튼이 어떤 기능을 하는 것까지는 아직 알 수 없었기에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원군이라…… 원군이라면 앞뒤가 좀 안 맞는걸?]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말에 유리엘 역시 강민이 한 말의 의도를 곧바로 파악했다.
[그렇네요. 애초에 우리를 능가할 무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녀석들이니…… 웜홀 탐색기도 해결하지 못한 채 굳이 여기서 원군을 부른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네요.]
[그렇지? 저들 중에서 반드시 살려야 할 사람이 있지 않고서야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마당에서 원군을 부를 리가 없겠지.]
전후 사정을 보았을 때 구양풍이 누른 버튼은 원군을 부른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원군을 부른다면 그들의 판단에 강민을 반드시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을 보낼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강민을 해치운다면 웜홀 탐색기를 잃을 수 있었다.
만일 웜홀 탐색기 문제를 이미 해결했다면 자신들의 무력에 자신이 있는 위원회에서 자신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강민을 굳이 지금까지 놓아둘 리가 없었다. 그리고 구양풍의 발언으로 보아서는 아직 웜홀 탐색기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들을 놓고 본다면 저들 중에서 반드시 살려야 할 사람이 있지 않고서야 지금 원군을 부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유리엘이 파악한 바로는 조혁군이나 구양풍을 비롯한 혈마단원 중에서 반드시 살려야 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 버튼은 무엇을 부르는 것이었을까?
강민과 유리엘이 심어를 나누는 동안에도 구양풍은 아직도 시간을 끄는 것인지 이런저런 말들을 내뱉었다.
“어쨌든 웜홀 탐색기만 해결된다면 넌 죽은 목숨일 것이야. 그리고 네 옆에 있는 여자는 마법을 금제 당한 채 여러 위원에게 진상되겠지. 크큭.”
구양풍의 발언은 한계치를 넘었다. 시간을 끄는 것이 무슨 이유인가 싶어서 놓아두고 있었지만, 어차피 처리할 대상이었다.
굳이 이런 발언까지 들어주면서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네가 뭘 기다리는지 모르겠지만, 여기까지만 하지.”
강민의 발언에 구양풍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자극적인 말로 대화를 이어가며 시간을 끌 목적이었기 때문에 대화를 끝내자는 강민의 말에 아쉽다는 표정이 살짝 드러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대화하며 끌어온 시간이 충분했는지 실망하는 기색은 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