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현세귀환록
144. 추격(2)
하지만 일행은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때 저 멀리서 10명의 무리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갑작스러운 상황에 백강호의 입에서는 당황스럽다는 듯한 목소리의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백강호의 기감에는 앞에서 다가오는 10명의 기감이 전혀 잡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도주하는 상황이라 단순한 인기척을 느끼는 정도로 기감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 정도 상태라면 이런 산속에서는 족히 300미터는 감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백강호는 이들이 30미터 정도까지 다가와 시야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바로 앞에서 보이고는 있지만 지금도 이들의 기감은 무척이나 흐려 멧돼지나 곰 같은 산짐승보다도 기감이 약한 상황이었기에 백강호의 의아함은 더 컸다.
그런 백강호의 궁금증을 풀어나 주듯 앞쪽에 있는 10명 중 리더로 보이는 50대 대머리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바로 권왕 조혁군이었다.
“여기에 있었군.”
앞으로 나선 조혁군의 손바닥에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붉은색 공이 있었는데, 그 공의 가운데 돌출된 버튼을 누르면서 조혁군은 말을 이었다.
“마법사들의 마법기는 이런 상황에서 편리하단 말이야. 굳이 은신술같이 기감을 줄이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기감을 완전히 차단할 수도 있고 말이야.”
이들이 백강호의 기감에도 걸리지 않고 이렇게 지근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저 마법기에 있었다. 이 마법기가 이들의 기감을 감추어줘서 전력 질주를 해도 백강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였다.
반면 백강호는 뒤에서 기감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는 따돌렸다는 생각에 흔적을 지우면서 도주하였고, 그러느라 결국 도주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좌절하고 있는 일행의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이유성은 그들이 왔던 길을 돌아보았는데, 그쪽에도 10명의 무리가 그들의 퇴로를 가로막으며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조 대주님, 그러기에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걸 쓰면 빠른 시간 내에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굳이 은신과 같은 번거로운 기술을 쓰지 않고 전력 질주를 하니 이렇게 따라잡았지 않습니까?”
“그렇군. 역시 외부 활동이 많았던 구양 단주의 말을 따르기를 잘한 것 같군.”
백강호 일행의 뒤쪽에서 다가온 무리를 이끄는 자는 바로 구양풍이었다. 일행의 퇴로까지 막은 구양풍은 자신이 데려온 혈마단과 조혁군이 이끌고 온 혈마단에게 수신호를 하여 다섯 명에 불과한 백강호 일행의 사방을 완전히 포위하도록 하였다.
백강호 일행을 포위하는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백강호 일행이 당황하는 틈을 타서 그들이 다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구양풍이 모든 길을 차단해 버린 것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겠지. 흐흐. 오늘이 네놈들의 제삿날이 될 것이야. 그리고 이곳이 네놈들의 장지(葬地)가 될 것이고 말이야.”
백강호 일행이 완전히 포위되었음을 확인한 구양풍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독 안에 든 쥐를 잡는 것처럼 일제 공격의 수신호를 하려는 구양풍에게 조혁군이 입을 열었다.
“구양 단주, 내 저놈과는 따로 붙어보고 싶은데 말이야.”
표면상으로는 혈마단과 조혁군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이였지만, 실상은 같은 무림맹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구양풍보다 조혁군의 지위가 더 높았기에 구양풍은 그의 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미 다 잡아놓은 물고기들이라 조혁군의 요청이 무리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구양풍은 다소 망설이고 있었다.
“음……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놈이 마스터에 오른 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지만 검세가 무척 매섭더군요.”
“그래, 이미 한 번 경험해 보았지. 한 치만 더 깊게 들어왔다면 여기까지 따라오지 못했을 것이야.”
조혁군은 왼쪽 옆구리를 슬쩍 바라보고 구양풍에게 대답했다. 조혁군이 본 자신의 옆구리는 옷이 세 치가량 잘려 있었고, 주위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어 검상을 입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냥 같이 합공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미 백강호와 조혁군은 한 차례 격돌이 있었다. 조혁군은 복천의 본거지를 기습하는 혈마단을 막기 위해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백강호를 보자마자 자신의 상대가 백강호임을 알았다. 그래서 다른 복천의 일원들은 구양풍과 혈마단에 맡기고 조혁군은 백강호만을 상대하였다.
백강호 역시 주먹에 권기(拳氣)를 드리우고 자신에게 들이닥치는 조혁군을 보고 경지에 이른 무술가임을 바로 알아차렸고 둘은 용호상박의 대결을 펼쳤다.
둘의 대결은 그야말로 박빙(薄氷)으로 보였다. 젊음과 패기를 두른 백강호와 경험과 노련함을 갖춘 조혁군은 일수 일검을 주고받으면서 근소한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의 상황이 백강호를 1 대 1 대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복천의 구성원들은 혈마단의 단원들에 비해서 실력이나 경험이 한참 부족했기 때문에 백강호와 조혁군이 대결을 하는 동안 30여 명에 달했던 복천의 구성원들은 이미 반수 이상이 목숨을 잃고 말했다.
그리고 그대로 가다가는 이유성을 포함한 모두가 목숨을 잃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백강호는 무리를 하면서 일시적으로 조혁군을 밀어낸 뒤 이유성과 생존자들을 구출해서 전장을 탈출하였다.
지금 조혁군의 옆구리 상처는 그 당시에 생긴 것이었다. 그 상처를 보았기에 구양풍은 조혁군이 백강호를 홀로 상대한다고 하는 것에 다소 망설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혁군은 자신의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일검을 허용하기는 하였지만 그러면서 자신 역시 백강호의 가슴에 일격을 가했었고, 권격의 정도를 보아하니 백강호는 자신보다 훨씬 큰 타격을 입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무술가가 대결을 두려워한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겠지. 특히 경지에 오른 자와의 생사결은 얻기 힘든 기회야. 포기하고 싶지 않다네.”
무림맹에서는 조혁군이 더 높은 지위이기 때문에 구양풍이 이런 식으로 그의 의견에 반대할 수는 없겠지만, 이곳의 주재자는 구양풍이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없었다.
구양풍 역시 자신보다 상급자가 이렇게 굽히고 들어오는데, 자신의 생각만 내세울 수는 없었다.
“음……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대신, 조심해 주십시오.”
“알겠소. 구양 단주.”
조혁군의 대답을 끝으로 구양풍은 다시 수신호를 하였고, 백강호 일행을 좁게 포위하고 있던 혈마단은 구양풍의 수신호에 따라 다소간 거리를 벌렸다. 조혁군과 백강호가 싸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혈마단이 물러난 공간으로 조혁군이 들어섰다. 조혁군의 눈에는 백강호 외에는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백강호를 제외하고는 한주먹거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공간의 가운데, 백강호의 전면에 선 조혁군은 머리를 좌우로 움직이며 목을 푼 뒤 백강호에게 말했다.
“자. 조금 전에 다하지 못했던 대결을 이어서 해보자.”
주변의 상황을 본 백강호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탈출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아까 전 천왕가의 본진에서 탈출할 때에는 난전에 가까운 전투였고 인원도 비슷하였지만, 지금은 인원도 열세에다가 혈마단에서 이곳을 철저히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결이라…… 그렇다면 내가 만일 당신을 이긴다면 우리를 보내줄 텐가? 그 정도 조건은 걸어야 내가 전력을 다할 수 있겠지. 그렇지 않다면 나는 철저히 도망치는 것을 택할 것이야. 내가 도망치는 것에만 전력을 다한다면 당신도 날 잡는 게 쉽진 않을걸?”
백강호는 지금 모험을 걸고 있었다. 이유성을 버리고 도망칠 생각은 없었지만, 상대가 그렇게 생각해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면서 이런 도발을 하는 것이었다.
조혁군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자신의 제안을 고려한다고 생각한 백강호는 좀 더 그를 자극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능력자와의 생사결을 하고 싶다면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당신 말처럼 쉽게 오는 기회는 아니야. 내가 이 승부를 포기한다면 언제 또 이렇게 마스터와 생사결을 할 수 있겠나?”
백강호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일말의 희망을 갖기 위해서 조혁군이 조건을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지만, 백강호의 경험보다는 조혁군의 경험이 월등히 앞섰다.
이런 어설픈 계략에 넘어갈 만큼 조혁군의 경험은 짧지 않았다.
“후후. 어설픈 격장지계를 사용하는군.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복천의 제거다. 네놈과의 승부는 그 목적을 완수하는 것에 곁들인 선택사항 같은 것이고 말이야. 네놈이 도망치는 것에 전력을 다한다면, 그렇게 해봐. 그것도 나름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
조혁군은 백강호의 심리를 완전히 읽고 있었다. 오랜 경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또 조혁군의 말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조혁군의 말에 백강호는 그의 의도대로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들이닥치지 않고 내가 이렇게 혼자 나서는 것만 해도 네겐 기회가 아닌가? 만에 하나 네가 나를 이긴다면, 그나마 네놈들의 승산이 조금이나마 올라갈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게 되면 일말의 탈출 희망이 생기겠지. 안 그래?”
“기회라…….”
조혁군의 말이 자신의 말보다 더 설득력이 있었다. 고민을 해봐도 어차피 이유성을 버리고 갈 생각이 없는 백강호에게 놓인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결국 백강호는 조혁군의 앞에 나섰다. 그의 말처럼 일말의 기회라도 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경험에서 앞선 조혁군의 말대로 된 것이었다.
혈마단은 큰 나무를 중심으로 일행을 크게 포위하고 있었고, 이유성과 다른 세 명의 중년인은 큰 나무를 등지고 서 있었다.
싸움의 여파가 일행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온 백강호는 서서히 기를 고조시키며 오른손에 1미터가 넘는 기다란 장검을 꺼내 들더니 바닥으로 내려트렸다.
역시 천천히 앞으로 걸어와 백강호 앞에 마주 선 조혁군은 손바닥을 편 왼손을 앞으로, 주먹을 쥔 오른손을 옆구리 쪽에 두고 자세를 잡았다.
이 두 마스터 간의 대결에 주위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긴장한 채 이 둘만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특히, 이유성과 그 일행에게는 단순한 마스터 간의 대결이 아니었다. 만일 백강호가 진다면 자신들의 목숨 역시 사라질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자세를 잡고 있는 둘 사이에서 일반인들은 느낄 수 없는 마나 기류가 세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두 개의 태풍이 격돌하는 것처럼 마나 기류는 격렬한 움직임으로 사방에 퍼져나갔다.
하지만 사방은 조용했고 산속에서 흔한 풀벌레,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과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을 때,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이유성이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 같으면 타인에게 들릴 리가 없는 소리가 지금은 마치 천둥같이 들렸다. 그리고 이것이 신호가 된 듯 백강호와 조혁군은 서로에게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