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현세귀환록
143. 추격(1)
그래서 강민은 박일도의 물음에 자연스레 답을 하였다.
“법적이라…… 좋은 말이지. 그렇지만 법은 지배계급의 지배 도구일 뿐이야. 나는 이 세상의 지배계급이 만든 그런 지배 도구에 따라서 내 판단을 제한할 생각이 없다고 말해두지.”
오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강민은 그럴 힘과 능력을 지닌 강자였다.
“허어…….”
오만한 강민의 말에 박일도는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힘이 없는 자가 그런 말을 했다면 비웃음만 살 일이지만, 강민 같은 강자가 그런 말을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강민의 경지가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자신이 넘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님은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스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박일도는 자신감이 극에 달해 있었는데, 강민의 무공을 본 이후 그런 자신감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 박일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민은 말을 이었다.
“당신들을 해치우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신들의 심성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기 때문이야. 차기에 대통령이 될 사람은 그런 마음으로 잘 지켜주길 바라네.”
박일도 역시 마나 성향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분류하자면 선인(善人)에 가까웠다. 그런 마음이니 드러나지도 않는 곳에서 대통령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었다.
강민의 말은 들은 박일도는 복잡한 심경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또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어떡하겠소?”
현재 박일도의 가장 큰 고민은 이것이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강민이 일을 벌였기에 그런 부패한 정치인이 처리되었지만,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없으리란 보장은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겠지. 국민은 그 국민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진다고 하니, 또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지금 이 나라 수준이 그 정도라는 반증이 아닐까?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내가 있는 동안은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없으니까 말이야.”
“그 말은 또 이런 일을 벌이겠다는 것이오?”
“한 번을 했는데 두 번 못할 이유는 없겠지. 그리고 당신의 입장에서도 깨끗한 대통령을 수호하는 것이 좋지 않나?”
“그,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면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그럼 나는 이만 갈 테니 저 밑의 친구들 잘 수습하길.”
“잠깐만!”
박일도는 좀 더 이야기를 하고자 강민을 잡으려 했지만, 강민과 유리엘은 이미 사라지고 말았다.
둘이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던 박일도는 복잡한 심경으로 한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천외천(天外天)이라더니, 정녕 하늘 밖에 하늘이 있구나. 경지에 들었다고 자만한 마음을 먹은 것이 부끄러울 정도이군. 그런데 도대체 누구지? 얼굴이…… 아, 인식 장애가 펼쳐져 있었구나.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내가 간파하지 못할 인식 장애라니…… 설마, 퍼니셔?’
유리엘의 인식 장애 마법 때문에 박일도는 강민과 유리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마법이 없었다면 KM그룹 회장의 얼굴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천외천의 능력과 마스터도 알아채기 힘든 인식 장애 마법을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퍼니셔의 이름이 떠올랐다.
올림포스에서도 퍼니셔의 인식 장애 마법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꽤나 유명한 일화였다. 또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문구는 퍼니셔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문구였기에 우연히 떠오른 생각이 그렇게 이어진 것이었다.
‘허…… 진짜 퍼니셔라면, 유니온에서도 아직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하니 애초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군.’
일본의 절대 강자 쇼군조차 한 번에 처리하였고, 지금 다크 스타를 없앤 것도 퍼니셔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퍼니셔라면 이능 세계에서도 이렇게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일반 세계의 대통령을 처리하는 것이 어려울 리가 없었다.
‘어쨌든 앞으로는 그의 말처럼 깨끗한 대통령만이 올 것이라고 하니 이번에는 제대로 지켜내야겠군.’
사실 지금 대통령, 이제는 전임 대통령이 된 최영근 대통령을 지키는 것에 호국회의 회원들은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대통령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호국회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부정부패를 일삼고 있는 대통령을 지킨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박일도의 눈에는 새로운 결의가 차오르고 있었다.
* * *
어두운 색상의 등산복을 입은 다섯 명의 인영이 울창한 지리산의 숲을 헤치며 달리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서는 등산객의 모습이었는데, 옷을 제외하고는 등산객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우선 등산객들이라면 짊어지고 다니는 배낭이 없었고, 이런 깊은 산을 등산할 때 짚는 지팡이도 없었다. 젊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이 숲속을 달리는 속도는 일반인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해 있었기에 절대 단순한 등산객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한참 동안을 달려나가던 일행은 성인 남성 세 명이 팔을 둘러야 간신히 감싸 안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나무가 나오자 그들 중 리더로 보이는 남자의 신호에 따라서 멈추어 섰다.
“헉…… 헉…… 강호 형님, 왜…… 멈추신, 헉…… 헉…… 것입니까?”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20대 중반의 청년은 갑자기 멈춰 선 것에 의아해하며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에게 물었다.
강호라 불린 남자는 질문을 던진 남자에 비해서 숨소리가 고른 편이었는데, 그래도 다소 지쳐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휴, 여기서라도 잠시 쉬지 않으면 더 이상 가기 힘들 거야. 유성아. 잠시라도 숨을 골라둬. 또 달려가야 할 테니.
유성이라 불린 남자는 어느 정도는 숨이 안정되었는지 한결 편한 목소리로 강호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형님. 그들을 따돌린 것일까요?”
“아니야. 일단 내 기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는 멀어졌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러. 우욱!”
유성의 질문에 대답하던 강호는 갑자기 입을 막으며 허리를 반으로 숙였다. 입을 막은 그의 손 사이로 검붉은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내상(內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형님!”
갑작스러운 토혈에 유성은 놀라 강호에게 다가갔지만, 강호는 다른 쪽 손을 들어 유성의 접근을 막았다.
잠시 후 강호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는지 소맷자락으로 입을 슥슥 닦으며 괜찮다는 듯 말했다.
“난 괜찮아. 걱정하지 마.”
“형님, 아까 전의 일격 때문인가요?”
“그래. 권(拳)으로 마스터의 경지에까지 올랐으니 주먹질이 예사롭지 않더군.”
“하지만 그놈도 형님의 칼에 옆구리를 베였잖아요. 그놈은 추격대에 없지 않을까요?”
“아니야. 그 공격은 얕았어. 지금쯤이면 충분히 지혈하고도 남을 시간이지. 분명히 추격대에 함께하고 있을 거야.”
“현승에서 마스터까지 고용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괜히 저 때문에 형님이…….”
복천의 수장인 이유성은 현승에서 혈마단을 고용한 것은 이미 몇 차례의 격돌을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 혈마단이 무림맹의 수족(手足)인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권왕 조혁군을 현승에서 별도로 고용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 중에는 조혁군의 행동이 결코 혈마단의 일원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조혁군은 혈마단의 단주 구양풍만을 같은 동료로 생각하고 있지 나머지 혈마단원들은 무림맹의 죄수 출신이기에 매우 무시하고 약간의 경멸감마저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그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런 소리는 마. 어차피 산에서 내려올 생각이었으니까.”
이유성의 자책감이 섞인 말투에 강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받았다.
“그렇지만 제가 별도로 연락드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저희와 같이 다닐 이유도 없었겠지요.”
“그것도 내 선택이야. 분명 네가 먼저 부탁했지만, 최종 선택은 내가 내렸고 그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이야. 네가 자책할 필요는 없어.”
“그렇지만……. 차라리 이렇게 된 것 가문에 도움을 요청하시는 것은…….”
“거기까지.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은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부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어. 내 문제는 내 문제로 끝내야지, 가문을 부를 수는 없는 일이지.”
강호의 성씨는 백 씨였다. 백 씨는 흔한 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리 드문 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능 세계에서 백 씨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 유명한 백두일맥을 이끄는 가문이 백 씨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와 관계없는 백 씨도 있었지만, 이 백강호의 일가는 바로 그 백씨 가문이었다.
더군다나 백강호는 단순한 가문의 일원이 아니었다. 백강호는 바로 백두일맥의 가주 백무성의 손자였기 때문에 백두일맥 내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이유성은 가문에 도움을 청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강호는 완고했다. 단지 자신 때문에 가문의 암묵적인 규칙을 깨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렇게 나서고 있는 것만 하더라도 가문의 규칙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었기에 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백강호조차 그 스스로는 산을 내려오려고 했다지만, 이유성과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백강호와 이유성의 인연은 어릴 적부터 이어진 매우 오래된 인연으로,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친한 사이였다.
둘의 첫 만남은 백강호가 17살, 이유성이 12살 때였다. 천왕가에서 백두일맥을 방문할 때 이유성 역시 천왕가의 후계자 자격으로 백두일맥을 방문하였고, 그때 백강호는 이유성을 만날 수 있었다.
외부 출입이 거의 없는 백두일맥 출신의 백강호는 이유성과 만남은 외부에 대한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유성은 한눈에도 강해 보이는 백강호의 무(武)에 존경심을 느끼고 이후로도 백강호와의 연락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둘의 관계는 마치 형제처럼 단단해졌던 것이었다.
사는 곳이 멀다 보니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간혹 만나거나 전화통화를 하면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는 사이였다.
“휴…… 형님이 경지에 드셨다는 것을 알고 이제는 제대로 복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현승이 이 정도 역량이 될지는 몰랐네요.”
“그러게 말이다. 이번에는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형님. 형님이 안 계셨다면 우리는 벌써 저 혈마단의 손에 끝났을지도 몰라요. 아니, 그랬을 거예요.”
백강호는 천왕가가 멸문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꽤나 늦게 알게 되었다. 애초에 외부와 접촉이 없는 백두일맥이기도 했고, 그중에서도 수련만을 하는 무공광(武功狂)인 백강호는 외부의 소식을 듣는 것이 더 늦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야 그 소식을 듣고 백강호는 이유성 역시 당시 참화로 죽은 줄 알고 꽤나 좌절했었다.
그래서 이후에 이유성의 연락이 왔을 때 가주인 할아버지의 말도 거역하며 하산하여 복천에 합류했던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상황이 나아지면 하고, 숨 좀 골랐으면 다시 움직이자. 아저씨들도 괜찮죠?”
대화를 하며 어느 정도 숨을 고른 것 같자, 백강호는 말을 끊고 다시 길을 나설 것을 이야기하였다.
그런 백강호의 말에 이유성의 뒤에 있던 중년인들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유성을 따르는 중년인들은 천왕가의 외부에서 활동하던 천왕가 소속의 가솔들로, 천왕이 무너진 이후에 이유성이 이끄는 복천에서 함께하고 있었다.
모두 준비가 된 것 같자 백강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