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현세귀환록
137. 공격(1)
“의뢰비? 그렇지. 의뢰비가 부족하지.”
구양풍의 말에 유현승은 반색하며 재차 말했다.
“의뢰비 때문이라면 내가 두 배, 아니 세 배를 지급하라 하겠소. 그때 의뢰비가 백억이라고 했었소?”
“그래 백억이었지. 그럼 세 배면 삼백억인가?”
“그렇소. 또한 의뢰 결과는 불문하고, 여기서 의뢰 종결한 것으로 해주겠소.”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유현승은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도 이런 집단과 계속 같이 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내포되어 있는 제안이었다.
“흐음.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바로 원하는 계좌로 돈을 보내주겠소. 돈보다 금이 좋다면 금으로 지급하여 줄 수도 있소.”
금으로 지급한다는 말은 그룹의 자산이 아니라 유현승 개인의 재산으로 준다는 말이었다. 삼백억이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유현승은 충분히 이 정도 돈은 즉시 지급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푼돈보다 현승을 통째로 먹는 것이 낫지 않을까? 크크큭.”
그 말을 듣고 나자 유현승의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애초에 이들은 이럴 생각인 것 같았다. 또한 이들의 행동으로 보아 자신 역시 살려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살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니 지금 상황이 냉정하게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식자 겉으로는 탐욕 어린 말을 지껄이고 있는 구양풍의 차가운 눈빛도 보였다. 그 눈빛은 그가 돈에 탐욕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른 세 명의 남자는 모르겠지만, 구양풍과 같은 눈빛을 한 자는 돈 때문에 신의를 버리는 자가 아니었다. 긴장으로 떨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의 눈빛 깊숙한 곳에서 신념과 충성이 볼 수 있었다.
유현승은 가만히 구양풍의 눈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진짜 목적은 무엇이오?”
구양풍은 유현승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전과 같은 분위기로 말을 이었다.
“진짜 목적? 아까 말한 그대로야. 현승을 먹어 삼키려고 그러지. 크크큭.”
“아니, 당신 같은 눈을 하고 있는 자는 결코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지. 굳이 돌려 말하지 않고 진짜 목적을 말해준다면 당신의 일이 더 쉽지 않겠는가?”
이번에는 구양풍의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유현승을 바라보던 구양풍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그 자리까지 그냥 올라온 것은 아니군. 그래, 쉽게 가지. 나는 KM그룹에 볼일이 있어. 이 현승그룹을 이용해서 KM그룹을 압박하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강민 회장을 압박하는 것이 목적이다.”
“KM그룹? 이 정도 무력이라면 직접……. 아, 최강훈이 있었지. 이렇게 대단해 보이는 당신도 마스터는 두려운가 보군.”
이미 블랙 헌터 카드를 발급받은 최강훈은 이능 세계에서 꽤나 유명세를 갖고 있었다. 유현승은 마나를 다루는 이능력자는 아니지만, 과거 천왕가와 같이 했었던 만큼 이런 이능 세계에 대해서 나름의 정보망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KM가드의 이사인 최강훈이 마스터급 능력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큭. 마스터 하나 때문에 우리가 이럴 것이라 생각하나? 우리를 과소평가하는군. 유 회장은 아직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처리하기를 바라는 복천이라는 놈들도 새로운 마스터를 하나 데려왔더군.”
“마스터! 복천에 마스터가 있었소?”
복천에 마스터가 왔다는 말에 유현승은 깜짝 놀랐으나 구양풍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뭐 그리 놀랄 필요는 없어. 그놈은 곧 처리될 테니까. 우리 또한 그놈을 처리하기 위해서 다른 마스터를 불렀으니 말이야.”
“허어…….”
유현승은 마스터라는 존재는 극히 드물게 나타난다고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극민이 마스터가 되기 전까지 한국에는 알려진 마스터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스터급의 강자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었다.
‘일반인 중에서도 이능력을 깨우치는 자들이 많다더니 마스터도 여기저기서 나오는군. 시대가, 시대가 변하고 있는 것인가.’
마스터급에 오르려면 오랜 기간 수련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반인이 초급 이능력자가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지만, 시대가 변하였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세상을 위협하는 마물도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면서, 이능 역시 비의(秘意)로써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드러났다.
그러면서 이능력자들이 세상의 이면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전면에 드러나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시대가 변한 것이었다.
마스터를 동원한다는 말에 놀라는 유현승을 보며 구양풍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어쨌든 KM그룹을 직접 건들지 못하는 이유는 최강훈 때문이 아니야. KM그룹에서, 아니, 강민 회장이 지금 유니온에서 제공하는 웜홀 탐색기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 그런…….”
구양풍은 강민이 퍼니셔인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웜홀 탐색기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언급하였다. 유현승이 무엇을 목표로 움직여야 하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웜홀 탐색기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어,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웜홀 탐색기를 구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번 계획의 목표이다. 이 계획에 현승을 이용하게 된 것은, 강민은 이능력자이면서도 이능 세계에서는 드러나지 않으려 하고 있으니 이능 세계보다는 일반 세계에 주력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래서, 현승을 통해서 그를 압박하려고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것이군.”
구양풍은 자신의 마지막 말을 유현승이 끊고 대신 말했지만 불쾌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 유 회장. 어쨌든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설명해 주는 이유를 알겠지?”
“목적을 알고 능동적으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것 아니오?”
“크큭. 역시 그 자리까지 놀면서 올라온 것은 아니군.”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소. 다만, 하나만 물어봅시다. 일이 끝나고 우리 현승은, 아니, 나와 내 가족은 어찌 되는 것이오?”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답 역시 당연하였다.
“물론 일이 잘 끝나면 우리는 물러나 드리지. 애초에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목적은 돈 따위가 아니니 말이야.”
자연스러운 구양풍의 답변과는 달리 유현승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일을 시키는 입장에서는 살려둘 것이라고 답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일이 끝난 후에 지금의 답변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특히, 유현승의 생각에는 지금 자신은 너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렇다는 말은 일이 끝난 후에는 살인멸구(殺人滅口)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유현승은 구양풍의 말을 들을 생각이었다. 아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지금 이 순간조차 벗어나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그의 말을 듣고 일을 해나가면서 살길을 찾아야 할 것이었다.
이미 죽을 각오를 하였지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살아날 희망이 있다면, 유현승은 적극적으로 그 실낱을 부여잡을 생각이었다.
“알겠소, 그럼 일이 끝날 때까지 잘 부탁드리오. 일이 끝나면 다시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구려.”
유현승은 내심을 감추며 구양풍에게 말을 건넸다.
“크큭, 좋아. 좋아. 아, 그리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니 이 약을 먹어주면 좋겠군. 유 회장.”
구양풍은 주머니에서 손톱만 한 환약을 꺼내면서 말했다. 환약은 금박의 종이에 싸져 있었는데, 구양풍이 종이를 풀자 환약에서는 약 특유의 씁쓸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무슨 약이오?”
“크큭. 지금 이 순간 살아남으려면 먹어야 하는 약이지. 그리고 일주일 단위로 해독약을 먹지 않아도 죽는 약이고.”
“……그 말은, 만일 그쪽이 일주일이 지나도 해독약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죽고 말겠군.”
“뭐,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당신을 처리하고 당신의 아들에게 같은 제안을 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일이 다 끝나면 완전한 해독약을 줄 테니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유현승은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구양풍의 손에서 빼앗듯이 환약을 집어 든 유현승은 물도 마시지 않은 채 환약을 꿀꺽 삼켰다.
식도를 타고 넘어간 환약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현승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
“으윽……. 윽, 끄윽…… 으으윽.”
유현승이 고통을 참는 모습을 보고 있던 구양풍은 약간 감탄한 듯한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호오, 아무리 약효를 낮추었다 해도 일반인이 견디기 쉬울 고통이 아닌데…… 대단하군, 유 회장. 어쨌든 일주일마다 내가 주는 약을 먹지 않는다면 이런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이 세상을 떠나고 말 테니 잘 협조 부탁하네. 하하하.”
* * *
강민 일행의 여행은 어느새 2개월을 넘어섰다. 그동안 일행은 유럽을 거쳐 잠시 이집트와 두바이, 인도를 들렀고 지금은 태국의 수도 방콕에 도착해 있었다.
배낭여행객들의 메카라고 불리는 카오산로드를 관광하고 있던 중 강민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장태성 실장이었다.
-회장님!
“장 실장님, 정기보고 시간이 아닌데 무슨 일이시죠?”
아무리 강민이 대부분의 회사 일을 장태성 실장에게 위임했다고 하더라도 강민의 의사 결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다.
그 때문에 매일 한 차례 정도는 특이사항에 대한 동향 보고를 하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그 주의 주요사안에 대해서 보고를 하고 있었다.
정기보고는 강민이 있는 나라를 기준으로 보통 저녁 8시에서 9시 정도 사이에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직 오후 2시밖에 되지 않아 강민의 물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회장님. 검찰에서 압수수색이 들어왔습니다.
“압수수색이요? 무슨 건으로 들어온 것이죠?”
-탈세와 드림시티 건설과 관련된 금품로비 명목이었습니다. 혹시 짚이시는 곳이 있으신지요?
일반적으로 대기업에서는 음성적, 양성적 정치후원금을 많이 제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순환출자나 편법 경영권 승계 같은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권과 척을 지고서는 힘든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KM그룹에서는 그런 아쉬운 것이 없기 때문에 정치인들에 대한 후원을 일절 하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정치인들의 타깃이 될 가능성은 다분히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KM그룹은 전혀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걸릴 것은 없었다. 다만 정권에서 마음먹고 괴롭히기 시작한다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 경우에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글쎄요. 전혀 짚이는 바가 없군요. 장 실장님도 회사 전체의 세금납부 현황을 다시 한번 살펴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탈세가 일어난 것이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 또 사업을 진행하면서 로비가 있었는지 그 여부도 확인해 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런데 별도로 대응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어떤 대응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