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현세귀환록
135. 장악(1)
최근 전화통화를 하기 전까지 몇 년간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탁천군과 독고패의 인연의 뿌리는 매우 깊었다. 독고패의 스승과 탁천군의 스승이 막역지우(莫逆之友)로서 둘 역시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형제 같은 사이였다.
고아로서 형제간의 정을 느끼지 못했던 독고패로서는 자신보다 10여 살이 어린 탁천군에게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둘 사이가 틀어진 것은 순전히 탁천군의 호승심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청년이 된 탁천군은 독고패에게 호승심을 느꼈는데, 무공에 천재적인 자질을 보이던 독고패는 탁천군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순수 무술인이던 독고패의 스승과는 달리 탁천군의 스승은 뛰어난 무술가이자 술법가로, 제자인 탁천군 역시 무공과 술법 모두에 노력을 쏟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공으로 탁천군이 독고패를 이기기란 요원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탁천군은 자질이 나쁘지 않았는지 결국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고, 술법 역시 그에 상응하는 경지에 올랐다.
하지만 독고패는 이미 그랜드 마스터의 단계에 올라 있어 여전히 그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마스터에 이른 탁천군은 술법까지 동원하여 독고패와 대련을 하였지만 독고패는 탁천군에게 너무도 큰 벽이었다.
대련이지만 거듭되는 패배에 탁천군은 실망하였고, 무공으로는 독고패를 이길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어설프게 둘을 조합해 봤지만, 매번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남은 것은 술법을 극도로 파고드는 것뿐이었다.
본격적으로 술법만을 파고들기 시작한 탁천군은 시간이 지나면서 술법으로도 독고패를 이기는 것은 요원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스승이 연구하던 금지된 술법에 관한 책을 발견하였다. 이 술법은 고대 악마의 힘을 소환하는 술법이었는데, 스승이 이를 없애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같은 맥락의 다른 고대의 힘을 불러내는 술법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결코 그 자신이나 탁천군이 익히기 위해서 남겨둔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의 스승이 있었다면 절대로 이 술법을 익히지 못하게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스승은 이미 천수를 다하여 이승을 떠났고,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탁천군은 연구 끝에 금지된 술법을 시전하였고 악마의 힘을 불러냈다. 그 악마가 사스투스였다.
현세로 소환된 사스투스는 탁천군을 제압하여 그의 몸을 획득하려고 하였고, 그제야 탁천군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술법은 단순히 악마의 힘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악마 자체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악마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신으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존재였다.
탁천군은 자신의 몸을 강탈하려는 악마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맞섰고, 간신히 그를 자신의 심장에 봉인하였다.
행여 악마의 힘에 사로잡혀 광기에 빠져들 것을 대비하여 항마 결계를 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던 것이 사스투스를 봉인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사스투스 역시 뜻밖의 상성에 더 많은 힘을 끌어오려다가 물질계로의 소환을 완전히 마칠 수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탁천군의 영혼은 악마의 마기에 상당 부분 변질되어 있었다. 또한 심장에 봉인된 악마 역시 그곳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만월이 뜨는 날처럼 음기가 강한 날에는 악마의 기운이 날뛰었고, 그럴 때는 정신을 잃고 살육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심성이 변한 탁천군은 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종내에는 마천이라는 단체까지 만들어서 악행을 벌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독고패는 탁천군을 막아 세우고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봉인 역시 더 강화를 해주었지만, 이미 변질된 그의 영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독고패는 옆에 두고 치료를 해주고 싶었지만 탁천군은 그것을 거부했고, 이미 마천이라는 유니온과 위원회에 반대하는 단체를 만든 그를 받아 줄 명분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독고패는 탁천군을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의 세력이 강한 중국에 일부나마 마천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또한 이번에 위원회의 결의로 카오틱에빌 단체를 척결해야 할 때도 무림맹에서는 마천을 적극적으로 제거하려 하지 않았다. 드러내 놓지는 못했지만 독고패는 탁천군을 돌봐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탁천군이 지금까지의 고집을 꺾고 투항을 한다고 하였고, 위원회에서도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독고패는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그를 양지로 데려올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독고패는 그를 자신의 옆에 두어 찬찬히 치료하면 탁천군의 그 광증도 고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지금 탁천군은 한 구의 주검으로 변해 버렸다. 독고패가 세운 모든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어느 정도 마음을 수습한 독고패는 찬찬히 탁천군의 시체와 방 안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흉수에 대한 심증은 있지만 현장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파악함으로써 혹시 모를 변수를 찾는 것이었다.
먼저 눈에 띈 것은 탁천군의 시체에 남겨져 있는 큰 상처에도 불구하고 집기류의 파손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들은 진호철의 설명에 따르면 탁천군이 있던 별채에서 별다른 소리 또한 나지 않았다고 했다.
‘종합해 보면 차음강막에 호신강막까지 자유자재로 펼친다는 것이군. 거기다가 순간이동까지……. 아, 마법은 같이 있던 여자가 쓴다고 했던가. 음…… 마법에 대한 조치도 취해야겠군.’
독고패는 흉수가 퍼니셔라고 확신하며 현장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퍼니셔가 다크 스타의 수뇌부를 처리하고 있었고, 탁천군을 처리할 수 있는 드러난 실력자는 현재 퍼니셔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물론 숨어 있던 실력자가 있어서 갑작스럽게 탁천군을 제거했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십수 년간 활동했던 탁천군을 지금 이 시점에서 나서서 처리했다고 보기는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위원회의 결의를 무시했다는 건데, 음…… 공론화시키는 것이 나을까? 위원회의 결의를 무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공공의 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하지만 웜홀 탐색기를 가지고 있는 이상 우리가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독고패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만일 싸운다고 생각하면 승리를 자신하는 독고패였지만, 웜홀 탐색기가 커다란 변수였다.
마법의 조종이라는 올림포스에서도 웜홀 탐색기의 원리조차 알지 못하는 형국에서 섣불리 자신이 퍼니셔를 제거해 버려 웜홀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일단 약점을 잡아보자. 그 과정에서 웜홀 탐색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고, 만일 그게 안 된다면 그 약점과 탐색기를 거래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도 되겠지. 탐색기만 확보된다면 그다음은…… 복수의 시간만이 남을 뿐이다. 기다려라, 퍼니셔.’
퍼니셔에 대한 복수를 다시 한번 결의한 독고패는 휴대전화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구양 단주. 나 독고패요.”
-아, 맹주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지금 하는 일을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한국에 있는 KM그룹과 그룹 회장 강민 그리고 그의 가족까지 철저하게 조사해서 내게 보고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맹주님. 어차피 지금 한국에서 의뢰를 수행하고 있으니 바로 착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한국에서 의뢰 중이라고? 무슨 일이오?”
무림맹의 시스템상 맹주가 맹의 우두머리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지만 각 단(團)이나 전(殿), 대(隊)의 수장들의 재량권도 상당 부분 있었다.
중요한 일이야 당연히 맹주의 재가를 받아야 하겠지만, 일상적이거나 크지 않은 일들은 각 조직의 수장들이 알아서 처리하였다. 그러나 외국에서 의뢰를 수행하는 정도의 일은 분명 맹주에게 보고가 되어야 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지금 구양 단주가 맡고 있는 혈마단은 상황이 달랐다. 혈마단의 성향상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맹주의 지시가 없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자체적으로 의뢰를 받아서 운영 자금을 충당하곤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혈마단은 무림맹의 공식적인 조직은 아니었다. 맹주 직속의 숨은 조직으로, 맹에서 공식적으로 처리하지 못 하는 일을 처리해 주는 해결사 같은 조직이었다.
혈마단이 탄생한 건 무림맹의 뇌옥에서부터였다. 무림맹은 그들이 잡은 악(惡) 성향의 무림인 중에서 뇌옥에서 썩기보다는 제약은 있지만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하는 수감자들과 비밀리에 거래하였다.
거래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것은 뇌옥에서 내보내 주는 대가로 무림맹의 숨은 칼이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제약은 있었다. 그들을 믿을 수 없는 무림맹으로부터 주기적으로 해독약이 필요한 독을 억지로 받아먹어야 했고, 전면에 드러나서 활동은 할 수 없다는 제약이었다.
이런 제약이 걸려 있었지만, 자유를 갈구하는 수감자들은 많았기에 혈마단을 운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수장까지 수감자에게 맡길 수는 없었기에 혈마단의 단주는 맹주 직속의 수호대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선발하여 임명하고 있었다.
이것이 혈마단이 다크 스타에도 들지 않고 무림맹의 세력이 강한 중국에서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
물론 비공식적이지만 무림맹의 산하 세력인 만큼 카오틱에빌임에도 불구하고 천인공노할 큰 악행은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볼 때 독고패가 지금 혈마단에서 수행하고 있는 의뢰를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구양 단주는 이런 질문을 종종 받았던 듯 자연스럽게 지금 하고 있는 의뢰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였다.
-한국의 현승그룹이라는 곳에서 천왕가의 잔당을 소탕하는 의뢰를 맡았습니다. 의뢰 내용에 비해 금액이 괜찮아서 지금 단원들을 투입하여 의뢰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지. 천왕가의 산하조직이었던 현승이 역으로 본가를 먹었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때 천왕가를 완전히 제거한 것이 아니라서 잔당들이 상당히 남아 있다고 하는군요. 그 잔당들이 게릴라전을 펼치는데 피해액이 크다 보니 저희에게 의뢰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럼 의뢰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소?”
-처음에는 어렵지 않게 생각했고 실제로도 차근차근 처리해 나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끝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그 잔당에 조력자가 들어왔습니다. 그 때문에 조금 힘들어져서 북경에 원군 요청을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조력자가 몇 명이나 들어왔길래 그렇소?”
독고패가 알기로는 구양 단주는 마스터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완숙한 절정의 경지, 즉 유니온의 기준으로는 A+급의 무술가였다.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 마스터급에 오를 수 있는 구양 단주이기 때문에 웬만한 의뢰는 그의 선에서 처리하곤 했는데, 원군의 요청이라는 말에 독고패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게…… 한 명입니다.
“한 명? 한 명인데 자네가……. 그렇군. 그 조력자가 마스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