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현세귀환록
134. 악마(3)
말을 마친 강민은 오른 손날을 세워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오른팔을 슬쩍 휘둘렀다. 강민의 말에 무언가를 말하려던 사스투스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검붉은 마기의 벽을 만들며 후방으로 몸을 피했다.
이 모든 것이 강민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콰~~앙!!
강민의 일격에 엄청난 폭음과 함께 사스투스의 방어벽을 때렸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사스투스의 방어벽은 강민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했다.
방어벽이 터지면서 나타난 사스투스의 모습은 처참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강민의 일격이 사스투스의 방어벽을 뚫고 그를 직격했는지, 사스투스는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로 이어지는 깊은 검상을 입고 있었다. 치명상이었다.
그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는데, 외상뿐만 아니라 내상 역시 심했는지 사스투스는 오른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울컥울컥 피를 토해냈다.
다만, 마족 특유의 재생능력 때문인지 가슴의 검상은 빠른 속도로 아물어가면서 흘러나오는 피가 멎고 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치명상이었지만, 마족인 그에게는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회복할 수 있는 상처였다.
그렇지만 사스투스에게는 너무 느린 속도였다. 상처를 빠른 속도로 회복하던 사스투스는 뭔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으윽, 마계였다면 이 정도 상처는…….”
파슷! 데구르르르.
하지만 사스투스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했다.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의 목이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처음의 일격은 피해냈으나 두 번째 빛나는 손까지는 피하지 못한 것이었다.
눈을 부릅뜬 채 바닥을 구르는 그의 머리가 사스투스의 억울함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억울함에 눈도 감지 못하고 있는 사스투스의 머리를 보고 유리엘이 그가 다 하지 못한 말에 대답을 해주었다.
“마계였다면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본체까지 소멸되어 버렸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
유리엘은 죽어버린 사스투스에게 말을 건넨 후 강민을 돌아보며 물어보았다.
“굳이 광검까지 필요했을까요? 검강만으로도 충분히 처리 가능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검강을 썼다면 쓸데없는 드잡이질을 벌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마벽(魔壁)을 세운 걸 보니 저 녀석도 어느 정도 강기를 운용할 능력이 되는 것 같더라고. 역겨운 마계의 기운을 굳이 시간 끌며 상대할 필요는 없잖아.”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이제 돌아갈까요?”
“그래, 돌아가…… 음?”
돌아가자는 말을 하던 강민은 뭔가 알아차린 듯 경호성을 발하였고, 그런 강민을 보며 유리엘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래요, 민?”
“아, 마나의 성질이 조금 바뀐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요?”
강민의 말을 듣고 유리엘 역시 눈을 감고 잠시 마나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엘이 눈을 뜨며 강민에게 말했다.
“음, 민처럼 마나에 아주 민감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느끼기 힘든 변화네요.”
“그래, 극히 미세하게 변했으니 대부분은 알아차리지 못하겠지. 하지만 분명 바뀌긴 했어.”
“그래요. 미미하긴 하지만 바뀌긴 했네요. 마계의 마나가 들어와서 그런가요?”
“원인은 그것 때문이지만 결과가 그것 때문은 아니야. 어차피 이 정도 마나야 바닷물에 물 한 컵 붓는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자정 작용으로 흡수되어 버릴 테니 말이야.”
“그렇다면…… 아, 그렇군요.”
유리엘이 알아차렸다는 표정을 짓자, 강민의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차원 통합이 가속화된다는 이야기지. 잠시나마 마계와 연결되면서 타 차원의 마나장이 영향을 받은 것이지. 이 속도면 마나장의 통합까지 음……. 3년도 채 안 걸리겠는데?”
“3년이라는 시간도 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때 이야기지요?”
“그렇지. 다른 일이 또 벌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큰 일이 벌어지면 당장 내일이라도 통합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럼 그전에 많이 여행 다녀요. 호호. 사회 인프라가 무너지면 지금처럼 편하게 여행 다니기는 힘들 테니 말이에요.”
차원의 통합까지는 아니더라도 마나장만 통합되어도 지금의 문명이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새로운 질서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을 때까지는 이렇게 한가하게 여행하긴 힘들 수 있었다.
둘의 능력이라면 그런 상황에도 충분히 여행을 갈 수 있을 것이지만, 지금 누릴 수 있는 서비스는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3년도 남지 않았으니 어머니와 서영이랑 시간을 더 보내며 추억들을 쌓아줘야겠어.”
“그래요. 그런 의미에서 얼른 돌아가요.”
유리엘은 돌아가자는 말과 함께 강민을 바라보았고, 강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유리엘은 이곳에 나타날 때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딱~!
유리엘이 낸 손가락 소리와 함께 둘의 모습을 사라졌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강민이 펼쳐놓은 마나의 역장 또한 같이 사라졌다.
역장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탁천군의 시체에서는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그의 시체 위에서 뭉치기 시작했다.
이내 사람의 머리통 크기까지 커진 검은 기운은 마치 어딘가로 빨려가듯이 문틈 사이로 빠져나가며 빠르게 사라져갔다.
검은 기운까지 다 사라지자, 탁천군의 시체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방 안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까 전 탁천군의 지시를 받고 나갔던 여성의 목소리였다. 이 여성은 탁천군의 지시대로 윗사람에게 물어보고 별채로 돌아왔지만, 별채에는 기이한 힘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장막과도 같은 기운이 별채를 감싸고 있어서 그녀는 노크조차 할 수 없었고, 그래서 밖에서 들어가도 되겠냐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손님.”
그녀는 몇 번이나 불렀지만,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장막이 막고 있다는 사실도 잠시 잊고 무심코 다시 노크를 하려고 문에 손을 댄 순간, 조금 전까지 만져지지 않았던 문이 손에 닿았다.
“어?”
안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끝났나 하는 생각에, 그녀는 한 번 더 노크를 하며 말했다.
“손님, 지시하신 내용을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간다는 말과 함께 문을 연 순간 방에서는 엄청난 혈향이 풍겼고, 그녀의 눈에는 목이 잘린 탁천군이 보였다.
“꺄악!!!”
그녀의 비명에 주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 사람들 역시 방 안의 참혹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중 한 명이 이곳의 책임자를 부르러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정통 복식을 입은 50대의 중년인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흐음…… 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결계가 깨진 것도 아닌데 어떻게 들어왔지? 그리고 맹주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나…….’
잠시 생각에 잠겼던 중년인은 옆에 서 있던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미모의 여성에게 말을 건넸다.
“령령, 맹주님은 언제 도착하시지?”
령령이라 불린 단정한 차림의 여성은 중년인의 말에 시계도 보지 않은 채 즉각 대답하였다.
“30분 정도면 도착하십니다.
“음…… 일단 전화상으로라도 먼저 말씀드려야겠군. 그리고 현장을 보존할 것이니 맹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누구도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당주님.”
현장을 벗어나 집무실로 돌아간 당주는 휴대전화를 들어 익숙한 듯 번호를 눌렀다. 몇 차례의 신호음이 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 당주인가?
“네, 맹주님. 진호철입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그곳에 도착할 텐데 무슨 일인가, 진 당주?
“이곳에 와 있던 손님께서…….”
-천군이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무슨 일이 있냐는 맹주의 말에 진호철은 잠시 말을 골랐다.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기 때문이었다.
“그, 그게…….”
망설이는 진호철의 태도에 무슨 사달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독고 맹주는 다그치듯 그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어서 말해봐!
“아. 네, 그게 손님이 살해당했습니다.”
-뭐! 살해? 누구 짓인가? 아니, 어떻게 그곳이 노출된 것이지? 결계를 뚫고 들어온 건가?
탁천군의 살해라는 말에 독고 맹주는 폭풍 같은 질문을 던졌고, 진호철은 어떤 질문부터 대답해야 할지 생각하면서 서둘러 그의 질문에 답하였다.
“손님을 모시고 있던 아이가 처음 발견했는데, 발견할 당시 이미 손님은 목이 잘려 죽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다만, 결계는 멀쩡하였고 정밀 조사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확인해 본 결과 뚫린 흔적 또한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왜, 어떻게 천군을 죽였는지 전혀 모른다 이 이야기인가?
“……네, 맹주님.”
-일단 내가 가서 현장을 봐야겠군. 현장 보존은 지시해뒀지?
“네, 현장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도록 확실히 지시하였습니다.”
-알겠네. 내 곧 가지.
독고패와의 전화를 끊은 진호철은 별채 주위의 CCTV를 살펴보았지만 그곳에는 탁천군을 시중들던 여성이 나갔다가 들어온 것만 보일 뿐, 그 외의 어떤 사람의 출입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친 것이 있나 싶어 진호철은 한참 동안 CCTV 녹화 화면을 살펴보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쾅!
그때 집무실의 문이 터질 듯이 열렸고 문 뒤에는 부리부리한 호목의 독고패가 서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30분은 걸린다고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화를 끊은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았기에 진호철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 당주!”
진호철의 놀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고패는 진호철을 불렀다. 진호철을 당황한 표정을 감추며 독고패를 맞았다.
“맹주님, 오셨습니까? 그런데 수행원들은……?”
독고패는 일반적으로 한 명의 비서와 두 명의 경호원을 이끌고 다녔는데, 지금 그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당연히 드는 의문이었다.
“내가 먼저 달려왔다네. 일단 현장으로 가 보세.”
독고패는 지금 말 그대로 달려왔다. 성도 공항에서 이곳 별채로 오는 차를 타고 오던 독고패는 진호철과의 전화를 끊자마자 내려서 뛰어온 것이었다. 차량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기에 한 행동이었다.
진호철은 여전히 흥분해 있는 독고패를 별채의 사고 현장으로 안내하였다.
별채의 문 앞에는 두 명의 경비원이 서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열려 있는 별채의 문을 통해서 여전히 역한 피냄새가 새어 나왔다.
독고패가 별채 입구에 들어서자 덩그러니 누워 있는 탁천군의 시체가 보였다. 다만 그 시체에는 머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머리를 찾으려 할 필요는 없었다. 머리는 독고패의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부릅뜬 채 잘린 탁천군의 머리는 시선이 입구를 향하고 있어, 마치 입구에 서 있는 독고패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천군……. 천군…….”
탁천군의 이름을 부르며 독고패는 비척비척 앞으로 나가더니 탁천군의 목을 끌어안았다.
흰 무복이 피에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시 탁천군의 목을 안고 있던 독고패는 그의 목을 소중히 바닥에 내려놓고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천군! 이 독고패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너의 복수를 해주마!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