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현세귀환록
133. 악마(2)
‘호신강기를 펼쳤음에도 두부를 자르듯 손쉽게 팔을 잘라냈어. 그것도 초월의 영역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면 이 정도도 피할 수 없었겠지. 역시 제우스를 죽인 빛의 검의 주인답군. 나도 여기서 끝인 건가. 하지만…… 이대로 죽어주기엔 그간 보냈던 고통의 시간이 너무 아깝군. 이놈도 괴물인 것 같은데 과연 그 악마 놈과 붙어 보면 어떨까?“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빨랐다. 결심을 한 탁천군은 남아 있는 왼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더니 짧고도 단호한 진언을 외웠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탁천군의 심장을 죄고 있던 봉인의 사슬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내 탁천군은 심장에 전기 충격을 받기나 한 듯 수차례 쿵쿵거리며 가슴을 덜컥덜컥 퉁겨댔다. 이런 현상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듯 탁천군의 얼굴은 무척이나 일그러져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심장에서 마나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면서 탁천군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1미터 정도의 허공에 떠올랐다.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유리엘이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더라니. 이것이었군요. 그런데 디테일은 약간 다르긴 하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인데요.”
“그러게. 딱 봐도 마계(魔界) 성향 쪽 기운인 것 같군. 이 차원은 천계나 마계 쪽의 결계가 다른 차원에 비해 두터워서 마계의 기운을 직접 소환하긴 쉽지 않았을 것인데, 이 녀석은 애초에 그쪽 체질이었나 보군.”
오랫동안 많은 차원을 돌아다녔던 강민과 유리엘에게는 마(魔) 속성의 기운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탁천군의 특이한 기운에도 크게 놀라지 않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건 그렇고, 마계의 기운은 오랜만이네요. 간만에 보니 확실히 다시 느껴지네요. 이 성향의 기운은 묘하게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이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물질계의 사람들이 마기를 느끼면 거기에 중독되는 것이지. 아마 지금 이 녀석도 이 마기에 중독되어서 그런 악행을 저질렀을 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완전히 잠식되지 않고 봉인까지 해둔 것으로 봐선 보통 의지력은 아닌가 보네요. 결과적으로는 마기의 영향으로 악행을 저질렀지만요.”
강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유리엘은 탁천군의 의지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녀가 의지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강민 역시 마기의 단순한 침습이라는 처음 생각에서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전개하였다.
“어쩌면 마기의 단순한 침습이 아니라 상위 마족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 음…… 마스터급까지 올라왔다면 그쪽이 더 가능성 있겠군. 마스터급의 의지력이 마기에 단순히 영향을 받진 않았을 테니 말이야.”
“하긴, 그쪽일 가능성이 크겠네요. 저기 봐요. 저렇게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마기에도 아직 정신을 놓고 있지는 않잖아요.”
유리엘의 말대로 공중에 둥실 떠올라 있는 탁천군은 지금까지는 의식을 잃지는 않고 있는지 아직도 얼굴을 찌푸리면서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얼마 버티진 못하겠군. 나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아. 이 정도라면 디메트론 차원의 마족 분류 기준으로 보자면 귀족급 이상의 상급 마족인 것 같군.”
디메트론이라는 이야기에 유리엘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디메트론이라……. 그러고 보니 마계에 직접 들어간 건 디메트론 차원이 마지막이었죠?”
“그렇지. 그때 이후로는 들어갈 일이 없었으니 말이야. 그때도 볼테르만 아니었다면 그 불쾌한 곳에 직접 들어가진 않았겠지. ”
“하긴, 볼테르를 처리하려고 들어간 것이었죠. 그러고 보니 볼테르 정도의 강자를 만나본 지도 오래되었네요.”
유리엘이 강자라고 말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필시 대단한 인물이었을 것이었다. 강민 역시 어느 정도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볼테르 그 녀석은 베는 손맛이 있던 녀석이었지. 그 정도 능력이 있는 녀석을 만나본 지도 벌써 만 년은 넘은 것 같군.”
만 년이 넘었다는 강민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유리엘이 의외라는 듯 말을 이었다.
“만 년이라면…… 파르메라 차원의 살라비츠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는 건가요?”
“음…… 살라비츠라. 확실히 그 녀석도 평범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볼테르와 비교하긴 힘들지. 볼테르에 비교하려면 도르온 차원의 멜피스나 파르시아 차원의 진 정도는 되어야지.”
멜피스나 진의 이름이 나오자 유리엘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멜피스나 진에 비하면 살라비츠는 한 등급 떨어지는 감이 있네요. 그런데 볼테르가 그 정도였나요?”
“그래, 마지막에 모아온 힘을 폭주시켰다면 그 순간만큼은 어쩌면 멜피스를 능가했을지도 모르지.”
유리엘은 그 순간이 기억난다는 듯 강민의 말을 받았다.
“그때 볼테르는 폭주 대신 씨앗을 남기는 것을 택했죠?”
“그래. 씨앗이 발아하려면 최소 천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였으니, 내가 그 녀석을 끝장내기 위해서 굳이 그 시간을 쓰면서까지 거기서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라 계산을 했던 것이겠지. 실제로도 그렇게 했고 말이야.”
“볼테르다운 선택이었죠. 지금은 씨앗이 발아해서 과거의 무력을 어느 정도는 회복했겠군요.”
“그렇겠군. 다음에 한 번 디메트론에 들러보자. 얼마나 성향이 바뀌었는지 궁금하군.”
“여전히 그대로라면 다시 한번 징치(懲治)할 건가요?”
“그대로라면 이번엔 씨앗도 남기지 못하도록 소멸시켜 버려야지.”
“볼테르가 어떻게 변했는지 나도 궁금하네요.”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탁천군의 변화가 서서히 마무리되어갔다. 외관상으로는 크게 달라진 점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내면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변화가 끝난 것을 보여주기나 하는 듯 지금까지 허공에 떠 있던 탁천군은 바닥에 발을 디디며 눈을 번쩍 떴다. 뜨여진 눈은 흰자와 검은자의 구분이 없는 전체가 붉은 핏빛의 혈안(血眼)으로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
“크크큭. 아, 좋군. 스스로 봉인을 뜯은 주제에 막판에 저항까지 하다니. 생명에 대한 집착 때문인가? 크큭.”
혈안이 된 탁천군은 목을 돌리면서 뚜둑뚜둑 관절 꺾이는 소리를 내더니 말을 이었다.
“뭐 어쨌든 이젠 내 몸이니까. 흐흐흐. 몸을 가지고 이곳에 선 것이 얼마 만인가. 후흡~ 하~ 깨끗한 물질계의 마나는 언제나 좋다니까. 어? 팔이 여기에 떨어져 있었군. 굳이 재생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겠는데. 크크크.”
말을 마친 탁천군, 아니, 이제는 혈안의 괴인이라 할 수 있는 존재는 왼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탁천군의 오른팔을 가리켰다.
그러자 허공섭물이라도 펼친 듯 탁천군의 오른팔은 둥실 떠올라 잘린 그의 오른쪽 어깨에 붙었고,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음에도 오른팔은 어깨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팔이 어깨에 붙자 괴인은 원래부터 팔이 멀쩡했다는 듯 오른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팔이 건재함을 보였다.
팔까지 붙여 이제는 완전한 몸이 된 혈안의 괴인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강민과 유리엘에게 말을 건넸다.
“허. 이놈들, 아예 도망칠 생각이 없는 거로구나. 도망치면 오랜만에 사냥하는 기분을 느껴보려고 했더니. 쩝. 겁대가리를 상실한 연놈들이군. 뭐 이 자리에서 죽기를 바란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이곳에서의 첫 사냥이군. 흐흐.”
말을 마침과 동시에 괴인은 아까 붙였던 오른팔을 들어 올려 강민과 유리엘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화르륵~!
괴인의 장심(掌心)에서는 검붉은 불길이 솟구치며 강민과 유리엘을 덮쳐갔다. 둘은 심상치 않아 보이는 불길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괴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괴인이 보기에는 그건 마치 겁에 질려서 피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화르륵거리는 불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었고, 괴인은 두 개의 숯덩이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의 그런 기대는 빗나가고 말았다.
강민과 유리엘은 처음 그 모습 그대로 옷깃에 그을린 자국 하나 없이 편안히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지?”
약간 당황한 괴인은 다시금 손바닥을 펼쳐 불길을 쏘아냈으나 여전히 둘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아니, 둘뿐만이 아니라 그 불길은 주변의 집기조차 태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괴인이 혼자서 쇼를 하는 동안 강민과 유리엘은 심어를 나누고 있었다.
[나름 상급 마족인가 봐요. 본체가 현신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 힘이면 말이에요.]
[본체도 본체지만, 탁천군의 신체가 마기(魔氣)와 상성이 좋은 것 같아. 마기의 기세를 보니 손실률이 절반도 되지 않겠는데?]
[일반적으로 영계에서 물질계로의 마나 전송률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 손실률은 대단하네요. 물론 그만큼 리스크도 갖겠지만 말이에요.]
[스스로가 최고인 줄 아는 녀석들이 리스크에 대한 생각이나 하겠어?]
[하긴 그렇죠. 여튼 이 녀석이 탁천군의 히든카드였나 보네요.]
[히든카드라기보다는 동귀어진의 일격에 가깝겠네. 스스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이 녀석을 꺼낸 것이니 말이야.]
[그는 이렇게 마족에게 영혼을 빼앗긴다면 명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마계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글쎄, 모르지 않았을까? 알았다면 굳이 이런 짓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 말이야.]
[불쌍한 인생이군요. 저 녀석, 이제야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네요.]
괴인이 불길을 쏘아내는 것을 멈추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하자, 유리엘이 심어를 멈추고 괴인에게 말을 건넸다.
“이제 이게 아니다 싶어? 눈치는 늦네.”
“뭐냐! 네놈들은!”
괴인은 유리엘에게 대답을 하면서도 주변을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주위에는 얇은, 그렇지만 튼튼한 기막(氣膜)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기막까지 발견하고 나자 괴인은 자신이 둘의 능력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그의 혈안이 흔들렸다.
그런 그의 기색을 알아차리기나 한 듯 강민이 그의 물음에 반문으로 대답하였다.
“그러는 네놈은 뭐지?”
둘을 파악하기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라도 괴인은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괴인은 강민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아바투르 님 휘하의 72 작위마족 중 서열 18위인 사스투스 백작이다!”
72 작위마라는 말에 유리엘은 약간 지겹다는 표정을 짓더니 강민에게 말했다.
“72? 여기도 72 마족이네요. 악마나 마족 같은 놈들은 왜 그리 72라는 숫자를 좋아하는지 원.”
“72뿐만 아니라 108이나 666도 종종 나오잖아. 뭐 72를 사용하는 빈도가 가장 높긴 하지만 말이야.”
“어쨌든 18위면 나름 상급 마족이겠네요. 아바투르라는 녀석 말고 또 다른 녀석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사스투스는 자신을 무시하고 대화를 나누는 둘에게 화가 나려 하였으나,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 바라는 일이었다.
그래서 말을 끊지도 않고 찬찬히 둘을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내가 아직 물질계의 마나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런 건가? 아니야, 어차피 이놈의 몸으로 사용하는 것이니 관계는 없을 것인데……. 설마 내가 알아차릴 수도 없는 강자라는 것인가?’
시간을 들여 생각을 거듭할수록 사스투스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런 사스투스를 보며 강민은 말했다.
“머리는 그만 굴려도 돼. 어차피 마계로 강제 송환될 테니 말이야. 가져올 수 있는 전력을 다 가져온 것 같은데 여기서 강제 송환되고 나면 꽤나 서열이 떨어지겠어.”
“뭐?”
“그렇지만 굳이 마계까지 따라가서 소멸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너무 두려워하지는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