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현세귀환록
131. 투항(3)
의장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법사 특유의 조심스러움은 남아 있었다.
“위원님들의 의견은 잘 알겠소. 다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이오. 우리가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그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그가 알아채고 갑자기 웜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말이오.”
의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독고패가 말했다.
“일단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겠군.”
“그렇소. 그리고 무력의 정도도 파악해봐야겠지요. 그래야 만약 우리가 그와 대치하게 된다면 정확한 전력을 투입할 수 있을 테니 말이오”
“그렇겠군. 음…… 헤이안의 쇼군을 처리한 것이나, 엘리아, 제우스를 해치운 것을 보면 일단 그랜드 마스터급이라고 가정을 하는 것이 좋겠소. 의장.”
독고패가 그랜드 마스터라는 말을 꺼내자 몇몇 위원들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몇몇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지금은 유니온을 통해 탁천군이 투항한 사실을 알리고 퍼니셔에게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협조적인 그의 태도로 보았을 때, 미리 양해를 구한다면 그리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군요.”
독고패는 퍼니셔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는 의장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지금 당장 그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는 동의하였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독고패의 마음을 읽기나 한 것처럼 의장은 한 가지 말을 덧붙였다.
“다만, 이제는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시일을 두고 그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을 찾아봐야겠지요. 그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독고패를 보고 의장은 말을 이었다.
“필요하다면 다시 한번 위원회의 위원이 되는 것도 권해보지요. 위원이 된다면 굳이 대립하지 않고 웜홀 탐색기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다른 의견이 없으시다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 * *
흰색 커다란 요트 한 대가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요트가 바다를 가르며 생기는 하얀 포말이 태양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거렸고, 하늘 위에는 조각과도 같은 흰 구름이 떠 있는 것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 같았다.
다만 오늘따라 바람이 센 건지, 물결의 진폭이 다소 커서 80미터가 넘는 초호화 대형 요트였지만 꽤나 흔들렸다.
“아 참, 흔들리는 것만 좀 적으면 갑판에 나가서 구경하고 싶은데 말이야.”
분홍색 체크무늬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 핫팬츠의 전형적인 여름 옷차림을 한 강서영이 흔들리는 음료수 잔을 부여잡고 말했다.
선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니 보이는 풍경들이 너무나 좋아 보였는데, 배의 흔들림 때문에 나갈 수 없는 것이 아쉽다는 말투였다.
그런 강서영에게 한미애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30분만 가면 카프리 섬에 도착한다 하니까 그때 갑판으로 나가렴.”
“에이, 엄마. 그건 나도 알죠. 그냥 지금 나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였어요. 밖의 경치가 너무 좋아 보여서요. 히히.”
“그래? 그럼 세워달라고 해?”
“아뇨. 괜히 번거롭게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둘의 대화를 듣던 유리엘이 강서영에게 말했다.
“서영아, 배 주위의 파도하고 공기의 흐름을 안정화했으니 갑판에 나가도 돼.”
유리엘의 말에 창문을 바라보니 지금도 배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는데, 그 흔들림은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네? 언니 그런 것도 돼요?”
그녀 역시 마법을 배우고 있는지라 사용은 못 하더라도 대강 어떤 식으로 마법이 전개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는데, 유리엘의 마법은 전혀 감이 안 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옆에 있는 엘리아 역시 감탄의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배움이 짧아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 정도는 엘리아 역시 할 수 있는 마법이었지만, 이렇게 아무런 시동어도 없이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질적인 마나 유동 하나 없이 마치 자연적인 현상인 것처럼 마법을 시전하는 것은 엘리아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감탄하는 것이다.
이제는 흔들림이 줄어들어 갑판으로 나서려던 강서영은 문득 유리엘의 옆에 앉아 있는 강민에게 말을 건넸다.
“근데 오빠. 이 요트 너무 비싼 거 아냐? 이번 한 번 타고 말 거잖아.”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래.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지중해 쪽 여행을 다 이걸로 다니지 뭐. 그리스의 산토리니도 가고 싶어 했잖아.”
요트가 비싸다고 걱정한 강서영에게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건넨 강민은 평소 그녀가 가고 싶어 했던 산토리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강민이 산토리니를 언급하자 강서영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실실거리며 웃었다.
“아, 산토리니 좋지. 히히히.”
“뭘 그렇게 웃어?”
“아니, 좋아서. 예전엔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봤던 곳인데 내가 간다고 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신기하긴 뭐. 여튼 지금이라도 가고 싶은 곳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바로 그리로 데려다줄 테니까 말이야.”
“아냐. 지금도 너무 갑자기 일정을 바꾼 거 아닌가 해서 좀 그래.”
“뭐 어때, 시간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래도…….”
“괜찮으니까 마음 편하게 즐겨.”
“그래, 알겠어. 오빠가 최고야, 최고. 헤헤.”
강서영은 강민에게 엄지손가락을 척 올리더니 갑판으로 나섰다. 요트의 갑판으로 올라온 강서영은 기분 좋게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배의 속도와는 달리 배의 흔들림은 크지 않았고, 바람 역시 그리 강하지 않았다. 유리엘의 마법 아래 그 흐름이 통제되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주위를 구경하던 강서영은 이내 갑판 위에 있는 선베드에 누웠다. 하늘을 정면으로 하고 눕자 머리 위의 태양이 정면으로 비춰들었고, 그녀는 머리에 이고 있던 선글라스를 써서 눈부심을 피했다.
선베드에 누워 있던 강서영은 기분 좋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몸이 나른해지며 어느새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어느덧 강민 일행이 여행을 시작한 지 20여 일이 지났다. 미국의 서부에서 시작한 여행은 미국 동부를 거쳐 대서양을 지나 유럽에 이르렀다.
유럽에 들어온 이후에도 일행은 벌써 많은 곳을 다녔는데, 영국과 프랑스의 명소들을 둘러본 이후 지금은 유럽여행의 백미라는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었다.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를 거쳐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고대 문명의 정점을 찍었던 로마를 관광하던 중 강서영은 지나가는 말로 예전 텔레비전 광고에 나온 카프리 섬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녀는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그것을 캐치한 강민은 일행의 동의를 구하고 일정을 변경하였고, 지금 일행은 그녀가 말한 그 카프리 섬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한가로이 망중한을 즐기는 강민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벤자민이었다.
“벤자민, 무슨 일인가?”
-강민 회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여행을 하시면서 다크 스타의 보스들을 처리하신다고 하셨는데, 한 가지 번거로움은 더셨습니다.
“무슨 말이지?”
-마지막 남은 다크 스타의 보스 탁천군이 어제 유니온에 투항하였습니다.
“투항?”
-네, 그래서 탁천군은 별도로 처리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전화하였습니다.
“나름 악행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그냥 투항하면 받아주는 건가?”
다크 스타를 구성하던 주요 3단체, 엘리아의 리벤지, 제우스의 라이트닝, 탁천군의 마천은 이능 세계에서 악명이 높았다.
그중 엘리아의 리벤지 같은 경우는 위원회와 유니온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모인 단체이다 보니 일반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반면 라이트닝은 마약 카르텔을 직접 운영하였고, 마천 같은 경우에는 각종 생체 실험까지 하느라 이능 세계뿐만 아니라 일반 세계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강민이 지적하는 것은 이 부분이었다.
엘리아를 받아들인 강민이 할 말은 아닐 수도 있지만, 엘리아는 그다지 악행이라고 할 만한 행적이 별로 없었다. 리벤지를 만든 것 자체가 위원회, 정확히는 일루미나티에 대한 복수로 만든 것이기에 그녀의 주요 타깃은 위원회와 유니온이었다.
엘리아의 성향상 일반인들에게 무분별한 피해를 주는 조직원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런 조직원이 생기면 제명하거나 처벌했기에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엘리아는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조직원만 남기고 조직 자체를 해체해 버렸다.
애초에 악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무리 유리엘 일족의 영혼을 일부 계승했다고 해도 그녀를 받아들일 강민이나 유리엘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우스의 라이트닝이나 탁천군의 마천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적극적으로 악행도 마다하지 않았던 집단이었다.
이능력자들 간의 다툼이야 모르겠지만, 상대적인 약자인 일반인들까지 학살하는 조직이었기에 그 악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 조직을 단순히 투항한다고 해서 과거의 과실을 묻고 그냥 받아준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강민의 지적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지 벤자민은 잠시간의 침묵 뒤에 입을 열었다.
-……저도 조금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위원회의 결정이 그렇게 내려졌습니다. 탁천군은 위원회에 바로 항복 의사를 밝혔고, 위원회에서도 굳이 항복한 다크 스타를 치는데 불필요한 인원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 항복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 어차피 탁천군만 없어진다면 밑의 조직이야 유니온에서도 그리 힘들지 않게 처리할 수 않는 것 아닌가?”
가장 힘든 부분을 자신이 처리해 준다고 했는데도 이런 결정을 내린 위원회에 의구심을 품으며 강민이 물었다.
-저도 그렇게 주장은 하였지만, 이미 위원회에서 결론이 난 사항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크게는 두 가지 이유를 언급하였는데, 하나는 죽음을 각오한 탁천군이 동귀어진의 각오로 이능 세계와 일반 세계에 자살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우려였고, 다른 하나는 최근 들어서 웜홀의 발생빈도가 더 높아졌기 때문에 유니온이나 위원회의 인력을 함부로 빼서 쓰기가 더 힘들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흐음, 타당성이 없는 주장은 아니긴 한데…….”
-그렇습니다. 나름 근거가 있는 주장이라 저도 강하게 반대하긴 힘들었습니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강민이 알겠다고 하자 벤자민은 반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 그렇다면 탁천군을 놔둔다고 전해도 되겠습니까?
“그건 아니고.”
-네?
당황스러워하는 벤자민에게 강민이 덧붙여 말했다.
“내가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안 그래?”
-그, 그렇긴 하지만…….
“굳이 위원회의 결정 때문에 내 생각을 바꿔야 할 필요는 느끼지 못하겠군. 애초에 이 일의 시작도 위원회의 결정을 듣고 한 것이 아닌데 내가 왜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