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현세귀환록
129. 투항(1)
오랫동안 기다렸기에 강민에게 할 말도 있었을 것이고, 동행한 엘리아를 보고 궁금할 법도 한데 당황스러운 것이 더 컸는지 강서영은 별다른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난 것이었다.
그나마 최강훈은 표정을 수습하며 강민을 맞이하였다.
“형님, 누님. 오셨습니까?”
“그래, 별일 없었지?”
강민도 당황스러워하는 둘의 모습에 보며 굳이 조금 전 상황을 언급하지는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네. 그런데 이자는…….”
몇 시간 전까지 생사결을 펼쳤던 엘리아가 유리엘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것은 최강훈에게 당연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여기는 엘리아다. 과거 유리엘과 인연이 있어서 앞으로 그녀를 따르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고 있어.”
“아……. 그렇군요. 처음은 아니고 두 번째 뵙겠습니다. 저는 최강훈이라고 합니다.”
“그렇네요. 두 번째군요. 아까 전에는 서로 잘 모르던 상황이었으니 서로 앙금은 없도록 해요.”
엘리아의 말에 최강훈은 낮에 있었던 전투에서 맞은 인페르노 블라스터가 생각이나 자신도 모르게 피격 부위를 더듬었다.
지금은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가슴 부위였지만 맞은 당시에는 숨이 끊어질 것과도 같은 고통스러운 일격이었다.
“네, 각자의 입장이 다른 상황이었으니 앙금은 없습니다. 다만.”
“다만?”
“괜찮으시다면 나중에라도 대련을 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대련? 좋지요. 저도 기대할게요.”
엘리아 역시 그때의 전투에서 행했던 최강훈의 검격이 떠오르며, 그와의 대련은 좋은 수련이 될 것이라는 들어서 흔쾌히 허락하였다.
"감사합니다. 다음번에는 저번처럼 그렇게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대하시지요."
"기대되네요. 다만, 그때 보여준 마법이 제 전부라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리고 유리 님이 공간 동결을 시키지 않았다면 오히려 제가 손쉽게 이길 수도 있었겠죠."
그녀의 말이 맞았기에 최강훈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 서린 열기는 더 깊어졌다.
'하지만, 다음번엔 다를 겁니다.'
이미 한번 졌기에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최강훈은 마음속 깊이 미래를 다짐하였다.
* * *
탁천군은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앞에 웃으면서 나타난 제우스가 빛의 검에 뚫려 죽는 그 순간을 말이다.
지금도 그때의 상황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당시 탁천군은 집무실의 좌탁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무엇인가가 자신이 펼쳐놓은 결계를 뚫었다는 것을 느끼고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이내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낯익은 얼굴의 제우스가 지친 표정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제우스는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서 탁천군의 집무실까지 날아온 것이었다.
“제우스! 웬일인가? 번개화까지 펼치다니, 무슨 일이야?”
탁천군과 제우스는 이미 친분이 있는 사이었기에 제우스의 번개화에 대해서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휴~ 큰일 날 뻔했네. 여기가 그나마 안전할 것 같은 곳이라 이리로 왔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는 제임스의 얼굴은 너무도 지쳐 보였다. 번개화를 펼쳤다는 것 자체가 위기상황이었다는 반증이니, 그가 지쳤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큰일?”
탁천군의 물음에 제우스는 말을 이었다.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지. 아마 엘리아는 죽었을걸? 특이한 공간 이동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닐 테니 말이야. 뭐 그년이 죽든 말든 나만 살았으면 됐지. 아, 물론 천군 당신이었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 크큭.”
애초에 엘리아와는 별다른 친분이 없이 필요에 의해서 함께한 사이였기 때문에 제우스의 말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아니, 평소 그의 성정으로 보아 엘리아가 아닌 탁천군이 같은 상황이라도 뒤에서는 비슷한 말을 했을 것만 같았다.
“무슨 말이야? 엘리아가 죽다니?”
갑작스럽게 나타난 제우스가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털어놓자 탁천군은 황망해하며 제우스에게 되물었다.
“하하, 그게 말이야…….”
퍽!
웃으며 말을 이으려던 제우스의 가슴 가운데 빛나는 기둥이 보였다. 제우스의 가슴을 뚫고 나서는 빛이 사라졌는데, 드러난 형체는 한 자루의 바스타드 소드였다.
빛의 검에 꿰뚫리는 순간 영육의 연결이 끊겨 버렸는지, 웃는 채로 절명해 버린 제우스는 가슴에 박힌 검이 빛나면서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검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탁천군은 아직도 온몸에 오한이 들곤 하였다. 마스터급의 무술가이자 경지에 오른 술법가인 그로서도, 제우스를 절명케 한 그 빛의 검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그 검이 자신을 노리고 날아온다면 도저히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지? 누가 그런 경지의 무공을 펼치는 것이지?’
탁천군은 그 빛의 검이 마법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자연의 마나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마나 그 자체에 가까운 성질이 마법사의 마법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그렇다고 정제되지 않은 각성자의 거친 마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극도로 높은 경지에 오른 무공임에 틀림없었다.
빛의 검은 기이한 현기를 뿌리고 있었는데, 검강의 경지를 넘고 나면 그런 현기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들었기에 탁천군은 무공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독고맹주의 무공을 보았지만 이 정도 경지는 아니었어. 대체 누구지?’
탁천군은 자신이 아는 최고수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이 정도 기술을 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쨌든 나와 같이 있었는데 제우스만을 공격했다면 나는 타깃이 아니라는 것인가?’
하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상황상 그렇게 전개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엘리아도 처리했다는 것은 다크 스타의 수뇌부를 제거하려는 것이 틀림없어. 곧 내 차례라는 말인데……. 음…….’
탁천군은 스스로의 무력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었지만, 제우스를 죽인 그 빛의 검에는 여전히 두려움밖에 들지 않았다.
제우스가 죽은 지도 보름이 지났고, 그사이에 제우스가 운영하던 사업을 알아보니, 불법적인 사업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합법적인 사업은 유니온의 손에 넘어간 것이 확인되었다.
다크 스타는 세 명의 수뇌부가 합작으로 해서 만든 조직이었지만, 세 명이 협의하여 전체를 관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각자의 영역에서는 개개인의 판단으로 조직을 움직이고, 조직 전체가 대응해야 하는 상황만 협의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조직이었다.
그렇기에 제우스와 엘리아가 사라진 이후에 그들의 영역에서 다크 스타의 활동을 알아보는 것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탁천군이 조사를 해본 결과 북미를 주요 거점으로 하는 엘리아의 리벤지와, 남미를 주요 거점으로 하는 제우스의 라이트닝 모두 와해된 것이 밝혀졌다.
특이한 것은 라이트닝은 제우스 사후에 유니온의 급습으로 완전히 와해된 반면, 리벤지는 마치 유니온의 공습을 알았다는 듯 상당 부분이 공격을 피해서 잠적해 버렸다.
‘이렇게 되면 주요 자금줄 중의 하나가 끊어진 것인가? 마약 카르텔에서 들어오는 자금이 상당했는데 말이야.’
제우스의 주요 사업 중의 하나는 멕시코와 콜롬비아 등지에 있는 마약 카르텔이었다.
번개를 다루는 압도적인 무력을 통해서 제우스는 카르텔 사이에서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는데, 제우스의 사후에 유니온이 이 카르텔들을 공격하여 카르텔에 있는 이능력자들을 대부분 척살해 버렸다.
이 카르텔에는 이능력자가 아닌 일반인 조직원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소수 정예의 타격대를 운영하는 유니온이 이들까지 다 처리하기에는 손이 모자라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유니온은 이런 일반인 조직원들은 미국과 멕시코 정부를 움직여 척결에 나섰다. 각국 정부들도 이런 마약 카르텔을 없애는 것은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기에 적극 협조를 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조치들을 통해서 남미 쪽의 마약 카르텔은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수요가 있다면 공급은 따르겠지만 한동안 대규모 조직이 움직이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지난 보름간 탁천군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 고민은 다크 스타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제우스와 엘리아가 그렇게 가버린 이후 이제는 카오틱 에빌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다크 스타가 유명무실해졌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위원회의 세력이 큰 유럽을 제외한 아시아 쪽과 아메리카 대륙은 다크 스타의 주요 영역으로 위원회를 능가하는 세력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메리카 대륙은 완전히 유니온에게 넘어가 버렸고, 다크 스타의 세력권이라 할 수 있는 곳은 탁천군이 이끄는 아시아 쪽밖에는 없었다.
더군다나 아시아 쪽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은 무림맹이 강력한 조직력을 토대로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 탁천군의 세력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및 중국의 서부 정도로 그치는 실정이었다.
그것만 해도 여전히 큰 조직이긴 하지만 더 이상 세계적인 규모의 조직이라 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제우스가 죽은 것은 보면 자신조차 언제 어떻게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위원회에 항복을 해야 하려나…….’
탁천군은 다크 스타를 포기하고 위원회에 항복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모든 조직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고, 불법적인 조직만 포기하고 합법적인 조직은 유니온의 규칙 안에서 운영할 것을 제시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위원회 역시 웜홀이 폭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크 스타에게 쓸데없는 인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될 테니 자신의 제의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자신의 조직에게 미리 자살 공격과 같은 동귀어진(同歸於盡)을 명하여 놓는다면 유니온과 위원회의 손실도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제우스도 엘리아도 다 죽은 마당에 나 혼자 이 조직을 이끌기도 힘들겠지. 마지막 남은 타깃이니 전보다 더 철저하게 대응할 테고……. 흐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탁천군은 문득 집무실의 창을 열어 마당에 있는 직경 3미터 정도 되는 바위를 바라보았다.
탁천군의 은신한 곳은 현대적인 건물이 아닌 전통 중국식 가옥이다 보니 집의 가운데 마당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장식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볼품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위를 치우지 않고 있는 것이 이 바위에 무슨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을 물끄러미 바위를 바라보던 탁천군은 큰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뭐가 나오려고 이렇게 몇 년간 잠잠한 것이지? 그리고 저 바위는 또 뭐고. 나도 모르는 채로 봤다면 그냥 바위로 알았을 정도이니……. 후, 처음 기대한 정도 수준의 마인만 나왔어도, 좀 더 우위에서 협상을 진행할 수 있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그래, 포기하자. 그게 낫겠어.’
탁천군이 바라보는 바위에는 무슨 사연이 있어 보였지만, 겉보기에는 이 바위는 특이한 점도 특별할 점도 없는 그냥 일반 바위였다.
마스터급의 능력자가 본다고 해도 이 바위에서 특이점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바위를 보다 마음을 결정한 탁천군은 특이하게 생긴 휴대폰을 들어서 번호를 눌렀다. 요즈음 나오는 스마트폰과는 다른 초창기의 휴대전화와 흡사한 외양의 휴대폰이었다.
뚜- 뚜- 뚜-
전화는 한참을 울렸고, 탁천군은 끈기있게 기다렸다. 2, 3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전화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군인가?”
“네, 독고 맹주님. 오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