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현세귀환록
128. 추격(4)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강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리 되면 굳이 금제를 걸 필요도 없겠는걸? 아마 유리의 말을 신탁처럼 여기고 따를 것 같은데 말이야.”
“네, 그렇겠네요.”
강민에게 대답한 유리엘은 몸을 돌려 엘리아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렴. 공간 좌표 동결은 풀었으니 말이야.”
돌아가라는 유리엘의 말에 엘리아는 서둘러 고개를 조아리며 외치듯 말했다.
“유리 님! 유리 님을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엘리아는 그녀 안에 있는 영혼을 강화해 준 유리엘을 신과 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런 그녀를 모실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유리엘이 떠나기를 ‘명령’으로 내린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엘리아는 생명을 다 받쳐서 유리엘을 모실 생각이었다.
그런 엘리아의 반응에 유리엘은 강민을 돌아보며 곤란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고, 강민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대답하였다.
“하하하. 뭐, 유능한 수하 하나가 그냥 생긴 건데. 받아주지그래? 유리도 알겠지만, 인연의 끈은 무시한다고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잖아.”
“그렇지요……. 흐음…….”
“뭘 고민하는 거야?”
“일족에 대한 생각은 이제 오랜 세월 속에 묻었었는데, 이렇게 일족의 흔적이 발견되어서 다시금 저를 따른다고 하니 괜히 마음이 그러네요.”
유리엘 역시 망각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다만, 일족에 관한 기억은 뇌리의 깊숙한 곳에 묻어둔 상태였는데, 엘리아 이런 행동으로 인하여 묻어둔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과거 일족의 여왕이었던 유리엘은 실패한 군주라 할 수 있었다. 갑자기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올랐지만 아직 능력이 완전히 개화되지 않았던 그녀에게는 버거운 자리였다.
그래도 워낙에 출중한 잠재 능력이 있었기에 시간만 있었다면 어렵지 않게 일족을 이끌 수 있었을 것이나 그녀가 왕좌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신족간의 대항쟁 때문에 그녀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제대로 된 준비도 하지 못한 유리엘의 일족은 대항쟁에서 패배해 버렸다.
패배한 일족에게 내려진 처분은 신족이나 인간이나 다르지 않았다. 능력이 우수한 일족들은 대부분 처형당하거나 타 차원으로 추방당해 버렸고, 그녀 자신 또한 봉인되어 수천 년 동안 갇히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능력이 미약하여 처형할 필요조차 없는 일족들만이 살아남았는데, 그들 역시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힘을 잃어버려 더 이상 신족이라고 하기 힘든 상태가 되어버렸다.
훗날 강민 덕분에 유리엘은 봉인에서 풀려날 수는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그녀의 일족이라 부를 수 있는 인원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의 일족은 그렇게 끝난 것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이곳에서 과거 일족의 흔적을 만났고, 힘을 잃어버린 과거의 후손들과는 다르게 미약하지만 일족의 힘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리엘이 옛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강민은 유리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며 부드럽게 물었다.
“일족을 다시 일으키고 싶은거야?”
“아뇨, 그럴 생각까진 없어요. 다만, 옛 생각이 조금 나서요.”
그렇게 강민과의 대화를 마친 유리엘은 엘리아에게 말했다.
“굳이 네 생각을 막지는 않을게. 따르고 싶다면 따라오렴.”
원했던 유리엘의 대답을 들은 엘리아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유리 님!”
신을 따르는 사도(使徒)와 같이 엘리아는 몸과 마음을 바쳐 유리엘을 모실 것을 다짐하였다.
그런 엘리아를 보던 유리엘은 문득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이제 날 따른다 하니 물어보는 건데, 네 성향은 그리 악해 보이지 않았는데 왜 다크 스타 같은 걸 만든 거야?”
아까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야 한다는 표정으로 엘리아는 말했다.
“그것은 위원회의 멤버 중의 하나인 타나크 때문이었습니다.”
“타나크?”
“아, 지금은 일루미나티라는 이름으로 위원회에 가입되어 있지요. 흑마법사 주제에 광명회라니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벤자민에게서 위원회의 구성에 대해서 들었기에 일루미나티라는 이름은 익숙했다.
“일루미나티와는 무슨 일이 있었지?”
“타나크는 유럽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흑마법사 집단인데 과거에는 우리 연금의 일족과 공생을 하던 이능 단체였습니다. 우리 일족은 막대한 금력이 있었고, 타나크는 그것을 지킬 힘이 있었으니까요.”
“과거에는 힘이 없었다는 이야기야?”
“아. 그것은…….”
엘리아의 말은 길게 이어졌다. 연금의 일족이 처음 만들어진 것부터 어떻게 일족이 모여 힘을 길렀는지, 연금의 일족과 타나크와의 관계 등에 관하여 자신이 아는 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유리엘의 질문에 충실히 답하려는 모습이 역력히 보였다.
그런 그녀의 말을 간단히 줄이면 과거 공간 마법에 재능이 있던 연금술사 마이우스 칸이 자신과 비슷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일족을 개창했고, 일족이 커지고 부가 쌓이면서 쌓은 부를 지키기 위해서 타나크를 고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타나크는 욕심을 내 연금의 일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되려 집어삼키려 했고, 그 이후로 두 집단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불구대천이라 생각하는 것은 연금의 일족이었고, 타나크는 연금의 일족을 사멸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거의 모든 구성원이 죽었고, 지금은 숨겨놓았던 유산을 통해서만 간간이 후손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은 연금의 일족이라 불렸지만, 실제로 그들이 막대한 부를 모은 것은 연금의 능력보다는 금맥을 찾는 능력에 기인했다는 것이었다.
정확이 말하자면 모든 연금의 일족이 가진 능력이 아니라 처음 연금의 일족을 개창한 마이우스 칸의 능력이었다. 즉, 일족의 시조가 되는 사람이 쌓아놓은 부가 현재까지 이어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연금의 일족이라 불린 것처럼 마이우스는 연금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 경지에 이르도록 연금술은 연구하였던 마이우스는 금을 연성할 수 있는 실력 정도는 갖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금을 연성하는 것은 얻어지는 결과물에 비해서 너무도 많은 마나가 소모되다 보니 실제로 금 자체를 연성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일 년 동안 전력을 기울여도 10㎏ 정도의 금을 만드는 것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연금의 과정에서 우연히 금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된 마이우스는 금맥을 찾아내는 데 귀신같은 재주를 부리며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그런 부를 토대로 연금의 일족을 개창했던 것이었다.
사실 타나크도 마이우스가 수하로서 쓰기 위해서 계약한 용병과 비슷한 집단이었는데, 마이우스 사후에 연금의 일족에서는 경지에 오른 마법사가 드물었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타나크의 힘이 연금의 일족이 가진 힘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타나크의 반란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한참 동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유리엘이 엘리아에게 말했다.
“지킬 힘이 없는 재물은 자신의 것이 아닌 법이지.”
“그렇습니다. 그래도 일족을 개창한 초반에는 마스터급의 마법사가 몇 명은 되어서 타나크도 욕심을 부리지 못했는데, 그분들이 돌아가시고 그 뒤를 이을 만한 인재들이 나오지 않자 그놈들이 야욕을 드러낸 것이지요. 사실 저도 이런 일을 일족이 마련한 쉘터에 들어가고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쉘터에는 일족의 기록이 남아 있었거든요.”
강민 역시 엘리아의 말을 흥미롭게 듣고 있다가 질문을 던졌다.
“쉘터?”
강민과 유리엘의 관계가 보통 사이가 아님을 눈치챈 엘리아는 강민 역시 유리엘을 대하듯 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민의 물음에도 성심을 다하여 답변하였다.
“그랜드캐니언에 있던 그 동굴이 일족의 쉘터였습니다. 저도 우연히 인근을 여행하다 들어갈 수 있었지요. 그곳에서 마법을 익힐 수 있었지요.”
엘리아의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오려고 하자 강민이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이미 시간이 많이 늦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시간이 많이 늦어졌으니 숙소로 돌아가자. 남은 이야기는 숙소로 돌아가서 하지. 아, 엘리아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짐을 챙겨야 하는 것 아닌가? 숙소 좌표를 알려주면 되겠지?”
“아닙니다. 아공간에 웬만한 물품들은 다 가지고 있으니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바로 가지. 유리, 부탁해.”
강민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유리엘은 이곳으로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손가락을 튕겼다.
* * *
“강훈아, 오빠는 아무 일 없는 거지?”
“네, 누나. 형님께 무슨 일이 생기겠어요?”
최강훈은 강민의 걱정을 하는 강서영을 달래주면서도 내심 웃음이 나왔다. 강서영과 한미애만이 이런 걱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강서영이 걱정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강민과 유리엘은 돌아오지 못했고, 그나마 돌아온 최강훈과 스페셜팀은 전투를 치른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걱정을 덜기 위해서 옷은 갈아입었지만, 모든 흔적을 감출 수는 없었기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별일 없다는 최강훈의 말에도 강민이 돌아오는 시간이 지연되면 될수록 그녀의 걱정은 더해갔다.
계속되는 강서영의 그런 모습에 최강훈은 그녀의 양팔을 잡으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누나, 형님은 누나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에요. 이 지구 상에 형님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가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말을 마친 최강훈은 그녀의 팔을 놓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강서영도 그런 최강훈을 마주 보았는데, 그녀가 보기에도 최강훈의 눈에는 강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필시 강민에 대한 믿음인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믿음에 강서영의 눈에 서린 걱정도 살며시 사라져갔다. 강민의 강함은 아직 한 번도 본적이 없었지만, 최강훈의 무력은 스페셜팀과 대련하는 것을 수차례 보면서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었다.
그런 최강훈이 강민을 상대할 자가 아무도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자 강서영은 어느 정도 마음을 덜 수 있었다.
오빠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면서 강서영은 갑자기 지금 둘의 모습이 의식되었다. 이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키스하기 직전의 모습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강서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최강훈 역시 붉어진 강서영의 얼굴을 보며 이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 생각이 듦과 동시에 그의 눈에는 강서영의 반짝이는 빨간 입술만 보일 뿐이었다.
연인 관계가 된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스킨십에는 둘 다 익숙하지 못했기에, 이런 분위기는 거의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연인 사이였기에 분위기만 된다면 스킨십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최강훈은 강서영에게 다가갔고 둘의 얼굴이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강서영은 다소 놀랬지만 어느새 눈을 스르륵 감으며 다가올 그의 입술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몇 초 되지 않는 시간이 마치 한 시간이 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쯤,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최강훈과 강서영은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영혼이 통하는 것과 같은 짜릿한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강민 일행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이거, 우리가 때를 잘못 잡은 것 같은데요? 호호호.”
“흠…….”
유리엘의 목소리가 들리자 둘은 서둘러 입술을 떼고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둘 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순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나 하는 듯, 둘의 얼굴은 마치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었다.
“오, 오빠 왔어? 별일 없었지? 몸은 괜찮고? 괜찮은 것 같네……. 그, 그럼 나중에 봐!”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강서영은 빨간 얼굴을 감추지도 못하고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