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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귀환록-127화 (127/203)
  • # 127

    현세귀환록

    127. 추격(3)

    얼마 지나지 않아 바스타드 소드는 다시 나타났다. 물론 홀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한 구의 시체를 꿰뚫은 채였다.

    시체는 당연히 제우스였다. 바스타드 소드는 제우스의 명치를 꿰뚫은 채 다시 나타났던 것이었다.

    “광검(光劍)이라니, 오랜만에 보는데요? 이것까지 쓰는 것 보니 이 녀석에게 기분이 상하긴 했나 봐요, 민. 호호호.”

    “뭐, 그런 말을 한 녀석을 살려둘 수는 없으니까.”

    “하긴 번개화로 도망간 녀석을 쫓으려면 이 방법이 좋긴 하죠. 저렇게 마나 파장을 줄줄 흘리고 다니니 그 뒤만 쫓으면 되니 말이에요.”

    마스터급의 이능력자라도 지금 유리엘이 말하는 마나 파장을 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제우스가 번개화가 되어 사라진 길은 나타났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리엘의 눈에는, 그리고 강민의 눈에는 그가 지나간 길이 너무도 선명히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강민의 광검은 그것을 추격하여 빛의 일격을 가한 것이었다.

    검에 꿰뚫려 축 늘어져 있는 제우스의 표정은 기이하게도 웃고 있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번개화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제우스는 도망쳐서 도달한 곳에서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죽은 것이었다.

    번개를 다루는 무적의 각성자였던 제우스의 최후였다.

    제우스가 죽은 것을 본 엘리아는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허차원을 통한 순간 이동조차 쫓아오는 데다가 번개화로 도망간 제우스마저 잡은 것을 보고나니 더 이상 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더 허차원으로 이동해서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피하고 싶었지만, 허차원을 이용하는 것은 연속해서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잠시간이라도 허차원을 통과하는 것이 영혼과 육체에 막대한 부담을 주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안정화할 시간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피한다 하더라도 조금 전 어떻게 자신을 추격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소용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그녀에게는 지금 이 상황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강민이 바스타드 소드를 거두자 제우스의 몸이 털썩하고 바닥에 떨어졌는데, 죽은 채로 웃고 있는 제우스의 모습이 마치 그녀가 다음 차례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아 엘리아는 더 두려워졌다.

    예상치 못한 죽음보다 널브러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훨씬 더 두려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 일도 해결해야지?”

    강민과 대화를 마친 유리엘이 엘리아를 보고 입을 열었다.

    “나, 날…… 어,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엘리아는 자신이 존댓말을 쓰는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더듬거리며 반문했다.

    하지만 유리엘은 그녀의 반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엘리아는 자신의 속을 다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유리엘의 시선에 몸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산이 자신을 짓누르는 것과 같은 느낌에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유리엘이 탐색을 끝냈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그랬구나.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익숙하다니 무슨 말이야?”

    “아, 과거 대항쟁 후 추방된 우리 일족의 영혼 조각이 미세하게 스며들어 있네요.”

    과거 강민이 웜홀에 빠져서 처음 도착했던 차원에서 유리엘은 고대 신족이었다.

    그녀의 혈족은 신족들 간의 대항쟁에서 패배한 이후 대부분이 봉인되거나 타 차원으로 추방되었는데, 지금 유리엘이 말하는 것은 그렇게 추방된 일족 중에서 이 지구에 온 일족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렇게 온 일족의 일원은 마나 충돌을 버틸 능력이 되지 않았는지 살아남을 수는 없었던 것 같았다. 영혼마저 갈기갈기 찢어져서 이렇게 옅은 흔적만을 남긴 것을 보니 말이다.

    “그럼, 아까 허차원을 이용한 순간 이동도 유리 일족의 능력을 이용한 것인가?”

    “네, 그런 것 같이 보이네요. 다만, 아주 작은 조각만을 이은지라 우리 일족처럼 자유로이 쓸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고요.”

    강민과 유리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엘리아는 대항쟁이나 추방 같은 이야기는 모르겠지만 일족이라는 이야기에 무의식적으로 유리엘에게 물었다.

    “그럼 당신도 연금의 일족인가요?”

    “응? 연금의 일족? 네가 연금의 일족이란 말이야?”

    “그래요, 내가 연금의 일족이에요. 위원회에서 보내서 온 것 아닌가요? 이 정도는 파악하고 온 줄 알았는데…….”

    엘리아는 자신이 연금의 일족임을 밝히며 말했다. 그녀는 당연히 강민과 유리엘이 그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모르는 것 같자 의아해했다.

    엘리아의 표정에서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깨달은 유리엘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연금의 일족이라는 것이…… 결국 우리 일족의 힘을 이은 사람들을 칭하는 것이었구나.”

    강민 역시 둘 간의 대화가 흥미롭게 이어지자 끼어들며 말했다.

    “그런 것 같군. 그런데 유리가 파악해놓았다는 연금의 일족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아, 그 사람들은 전에 벤자민이 말했던 내용을 토대로 서칭한 사람들인데, 공간 마법에 대한 특이 적성을 지닌 사람들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그 사람들도 우리 일족의 영혼을 일부 이은 것 같네요. 내가 느낄 수도 없을 정도로 미세한 양이긴 하지만요.”

    “때로는 인연의 끈이 윤회의 고리보다도 질긴 것 같군.”

    “그러게요. 나도 우리 일족의 흔적을 이곳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이 말을 하며 유리엘은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니, 엘리아를 통해서 과거 그녀의 일족을 바라보는 듯하였다.

    “이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리 악한 성향도 아닌데 악행만 행하지 못하게 금제해서 보내주는 게 어때요? 오랜만에 만난 옛 흔적을 그냥 지워 버리고 싶진 않아서요.”

    유리엘이 본 엘리아의 성향은 골수까지 악에 물든 제우스와는 달랐다. 약간의 금제만 한다면 나중에 있을 이계와의 항쟁에서 인류에게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굳이 생명을 앗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래, 유리 생각대로 해.”

    “그리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우리 일족의 영혼은 조금 강화해 줄까 해요.”

    “그럼 유리의 일족이 여기서 새로이 뿌리를 내리는 거야?”

    “강화해 준다 해 봤자 극히 미미한 부분을 강화하다 보니 우리 일족이라 부르기도 힘들 거예요. 그치만 후손에게 능력이 전승될 정도는 될 테니, 그렇게 치면 뿌리를 내린다 할 수는 있겠네요. 뭐 그것도 엘리아가 아이를 갖는다는 전제에서 하는 말이지만요.”

    현재는 공간에 대한 능력이 미약하게만 이어져서 몇 대를 거쳐서 한 번씩 나오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유리엘이 영혼의 강화를 해준다면 이런 능력을 바로 자식에게 이어줄 수 있을 것이었다.

    결정을 내린 유리엘은 바짝 얼어 있는 엘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에 잠시 손을 올렸다.

    엘리아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유리엘의 그런 행동에 반발하지도 못한 채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유리엘의 손에서 왠지 모를 따뜻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마나의 기운은 아니었다.

    마나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무엇인가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영혼의 울림이었다.

    유리엘은 지금 그녀 일족이 남긴 영혼의 조각과 공명하는 것이었다. 그 조각은 아주 자그마한 씨알 같은 조각이었는데 유리엘과의 공명을 통해서 주먹만 한 크기로 불어났다.

    그제야 유리엘은 엘리아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흠. 워낙에 작은 조각이다 보니 키우는 것도 쉽지가 않네요.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전승은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유리가 말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겠군.”

    유리엘과 영혼이 교류하는 강민은 유리엘의 영혼을 너무도 잘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 일족임을 지칭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도 알 수 있었다.

    강민와 유리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눈을 감은 엘리아는 마치 법열(法悅)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비어 있는 영혼의 한 조각이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동시에 공간에 대한 이해가 새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혼에 각인 된 깨달음이었다.

    갓난아기가 일어서서 걷는 것처럼 이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받아들임이었다. 마법사의 이론적인 깨달음이 아닌 무술가의 감각적인 깨달음에 가까운 부분이었다.

    한동안 영혼의 황홀경에 빠져 있던 엘리아가 눈을 떴다. 적이라 할 수 있는 자신에게 왜 이런 깨달음을 내려주는지 묻고 싶어서 유리엘을 바라본 순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유리엘은 그녀에게 적대적인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 자신을 오롯이 바쳐서 모셔야 할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깨달은 엘리아는 무릎을 꿇고 유리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녀님을 뵙습니다.”

    “신녀? 아…… 그렇군.”

    “유리, 왜 저자가 유리를 신녀라 하는 것이지?”

    강민 역시 그녀의 반응에 호기심을 느낀 듯 유리엘에게 물었다.

    “그녀 안에 있던 우리 일족의 영혼이 가진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생기게 된 일 같네요. 아마 본능적인 경외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 거예요.”

    “그렇군. 하긴 영혼을 느낄 수 있다면 일족의 여왕이었던 유리에게 경외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인가.”

    “그런 것 같아요. 조각이 미세할 때는 그런 것조차 느끼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크기가 되니 영혼을 알아보는 것이겠죠. 더군다나, 제가 영혼을 강화해 주니 일종의 신격화가 이루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신녀라는 호칭 또한 나온 것 같네요.”

    아직도 엘리아는 유리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감히 고개를 들 생각조차 못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엘리아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이성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조금 전까지 적대관계인 유리엘에게 마음속 깊은 신심을 느끼는 이 상황이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영혼은 그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안다기보다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체 영혼의 크기에 비하면 너무 작은 영혼의 조각이기에 유리엘 일족의 영혼은 엘리아의 영혼 전체를 잠식하지는 못했다.

    만일 엘리아가 일반인이었다면 영혼이 잠식당했을 수도 있었지만, 8서클 마법사까지 오른 그녀의 영혼 역시 쉽사리 잠식당할 만큼 약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래전부터 유리엘 일족의 영혼에게서 영향을 받아왔던 엘리아는 이 영혼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이 정도 영향력은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엘리아에게 유리엘이 말을 건넸다.

    “고개를 들어.”

    “네, 신녀님.”

    “신녀라는 말은 됐고, 음. 그냥 유리라고 불러.”

    “알겠습니다. 유리 님.”

    유리라 부르라 했지만 자신에게는 신적인 존재로 보이는 유리엘에게 감히 반말을 할 수 없으니 존칭을 붙여 말하는 엘리아였다.

    “내가 민과 하는 이야기를 들어서 어느 정도는 짐작하겠지만, 너희가 말하는 연금의 일족은 과거 이 차원에 온 우리 일족의 영혼을 이은 자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물론 그 영혼은 조각조각 찢어져서 계승자 하나하나를 우리 일족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미미한 상황이지만 말이야. 그래도 아마 공간에 대한 특출한 능력은 갖고 있을 거야. 너도 그랬던 것 같고. 그렇지?”

    엘리아는 유리엘의 말을 듣고 나니 그간 자신이 공간 마법에 특별히 뛰어났던 것이 이해가 갔다.

    “네,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마나장의 통합이 멀지 않았으니 이능 세계에 분열을 굳이 분열을 일으키는 것보다, 나중에 있을 이계와의 전투를 위해서 그 힘을 아껴놓으렴.”

    “……네, 알겠습니다.”

    엘리아는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유리엘의 말에 토를 달고 싶지는 않았는지 잠시 멈칫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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