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121화 (121/203)

# 121

현세귀환록

121. 여행(3)

급변하는 이능 세계에서 유니온 총재의 자리는 너무나도 바쁜 자리였다. 단순히 인사를 위해서 이렇게 자리를 비우기에는 그 자리가 주는 무게감이 너무 클 것이었다.

하지만 벤자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너스레를 떨면서 대답했다.

“주요 도시 간에는 순간 이동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어서 거리는 멀어도 금방 움직일 수 있지요. 더군다나 미국까지 오셨는데 당연히 제가 와봐야지요, 하하.”

이제 총재의 자리에 오른 지도 꽤 시일이 지났기에 벤자민도 이런 정치적인 쇼맨십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인사치레는 됐고, 무슨 일이야?”

“제가 먼저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혹시 이번 여행이 단순한 가족 여행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으신 건가요?”

벤자민의 입장으로는 당연히 물을 수 있는 질문이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벤자민의 강민과 유리엘의 강력함을, 퍼니셔의 강력함을 알고 있었다.

마스터급, 그것도 갓 마스터에 오른 사람도 아닌 마스터로서의 강함을 오랜 시간 동안 보였던 쇼군과 앤더슨을 처리한 퍼니셔였다.

쇼군을 처리할 때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앤더슨을 처리하는 모습은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를 상대하듯 쉽게 그를 상대하는 것을 보았기에 벤자민은 퍼니셔의 강함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퍼니셔가 단순 여행이 아니라 이능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다른 목적으로 이곳까지 온 것이면 그에게는 사실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비슷하거나 더 우위에 있는 능력이 있는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지, 약자가 강자에게 물을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강민은 벤자민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민이 마나를 끌어올리지 않았음에도, 벤자민은 영혼이 죄여 들며 숨도 쉴 수 없는 것과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잠시간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벤자민은 마치 몇 시간이나 지나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벤자민의 모습을 보던 강민이 무심히 입을 열었다.

“……내가 그런 이야기까지 네게 해야 하나?”

강민은 강자였다. 그리고 강자는 구구절절하게 약자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제야 자신이 주제넘은 질문을 했음을, 그리고 자신의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었음을 깨달은 벤자민은 숨을 헐떡이며 서둘러 사죄의 말을 꺼냈다.

“허억…… 헉……. 아, 아닙니다. 다만…….”

“다만?”

벤자민은 신속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를 불편하게 할 수는 없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유리엘이 제공하고 있는 웜홀에 대한 정보를 끊는다면 모든 이능 세계와 일반 세계에 마비가 올지도 몰랐다.

벤자민은 최초의 의도를 감추고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혹시 일반적인 여행이 아니라, 이능과 관계된 일을 하신다면 얼마든지 유니온의 시설이나 힘을 사용하셔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강민 님은 드러나지 않았으니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이능 세계에서 움직이시려면 제한적인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벤자민은 어색한 웃음으로 말을 끝마쳤다. 이마에는 식은땀까지 맺혀 있는 것 같았다.

강민은 최초 그의 질문 의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제 와 이렇게 둘러대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런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벤자민은 강민이 모른 척해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말을 마친 벤자민은 품속에서 금빛의 카드를 꺼내었다.

“여기…….”

“이게 뭔가?”

“이 골든 카드는 유니온의 VIP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카드입니다. 헌터 시스템과도 연동되어 있으니 헌터 카드로도 쓸 수 있지요. 위원회의 위원들과 같은 등급의 카드입니다.”

“그렇군.”

그에게 건네받은 카드를 살펴보는 강민을 보던 벤자민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위원회에서 강민 님을 한 번 뵙고자 하는데…….”

“그 이야기는 끝난 것 아닌가?”

“네, 위원회의 공식적인 요청은 강민 님의 말씀을 전달하며 거절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위원의 개별적인 요청이었습니다.”

“개별적이라……. 누군가?”

“위원회의 의장인, 올림포스의 수장 메르딘과 백두일맥의 가주 백무성입니다.”

“이유는?”

“이유까지는 구체적으로 제게 말하지 않았는데, 메르딘 의장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아직 그때 그 인식 장애를 해제하지 못하고 있다 보니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만나준다면 가능한 차원에서 모든 것을 들어준다고 하는 것 보니 말입니다.”

“그럼 백무성은?”

“그게…… 조금 의아합니다. 사실 백무성 가주는 위원회의 위원이긴 하였으나 최초 위원회에 참여할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나 행동을 한 적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으로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았지요. 일단 연락처만 전달해 주며 한 번 꼭 뵙고 싶다고 하더군요. 저도 무슨 이유로 강민 님을 뵙고 싶어 하는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메르딘 의장을 만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백두일맥의 가주를 만나는 것은 약간 흥미가 갔다.

그 흥미라는 것은 별것 아니었다. 아무래도 강민이 한국인이다 보니 한국의 최강자라고 할 수 있는 백무성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정도였다.

“그리 관심이 생기지 않는군. 다음에 관심이 생기면 연락하든지 하지.”

“네, 알겠습니다.”

벤자민이 강민을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위원회의 위원들이 독촉은 하겠지만,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곳으로 온 이유는 여행의 목적도 있지만, 다크 스타의 수뇌부를 처리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

“네?”

갑작스러운 강민의 말에 벤자민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아마 다크 스타의 수뇌부가 처리되고 나면 이능 세계를 다루는 것이 더 쉬워지겠지? 뭐 모두 다 처리할 것은 아니고, 핵심 수뇌부 정도만 처리할 테지만 말이야.”

강민은 굳이 그가 나서게 된 이유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까지 세세히 말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다만 이런 내용을 말해주는 것은 다크 스타가 갑자기 무너짐으로써 생기는 혼란을 피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다크 스타가 무너졌는데 유니온에서 이유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를 다크 스타의 음모나 계략으로 오해해 정확한 대응을 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먼저 부탁할 수는 없는 위치인 벤자민으로서는 강민이 먼저 나서서 이런 일을 해준다고 하니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다크 스타가 유니온의 지부나 시설들을 공격해 많은 피해가 생기고 있는 실정이었기에, 어떤 식으로든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청난 강자인 강민이 나서서 이 일을 해준다면 아무런 피해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강민 님.”

“감사는 됐어. 여튼 카드는 유용하게 쓰지.”

“네, 전용기를 소유하고 계신 건 알고 있지만, 유니온에 전화만 주셔서 카드의 코드 넘버를 말씀하신다면 언제든지 유니온의 초음속 전용기를 사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순간 이동 마법진도…… 아, 마법진은 필요가 없으시겠군요. 어쨌든 유니온의 시설들을 자유로이 사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출입국 심사 시에도 카드만 보여주신다면 프리패스가 가능하십니다.”

출입국 심사가 편리하게 통과된다는 이야기에 강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감을 표시하였다. 그런 강민의 얼굴을 보던 벤자민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사안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알고 계신 전화번호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모든 대화를 마친 벤자민은 순간 이동을 통해서 사라졌다. 남겨진 마나 파동으로 보아 본부가 있는 볼티모어까지 바로 이동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마스터급이라 하더라도 마법진도 없이 이곳 LA에서 본부가 있는 볼티모어까지 한 번에 순간 이동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LA에 설치된 순간 이동 마법진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벤자민이 떠나고 나자 지금껏 가만히 옆에서 대화만 듣고 있던 유리엘이 강민에게 물었다.

“민, 백무성은 한 번 만나보는 게 어때요?”

“전에 말한 결계 때문에 그런 거야?”

“네, 백두산에 있는 결계가 상당히 특이해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기도 해서요. 마법과 술법이 결합된 형태의 결계던데, 아공간처럼 처리되어서 마나 위성으로도 뚫고 볼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 이번 일 끝나고 나면 한번 가 보든지 하자.”

“어쨌든 이번 여행은 오길 잘한 것 같아요. 서영이도 재미있어하고, 어머님도 좋아 보이시고요. 종종 이런 기회를 만들어요.”

“그래, 마나장이 통합되고 나면 이런 기회도 별로 없어질 테니 그전에 자주 가야겠어.”

* * *

강민 일행은 3일간 더 LA에 머물렀다. 그동안 LA 시내의 관광 명소들과 유니버설 스튜디오, 디즈니랜드까지 섭렵하고, 두 번째 여행지인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라스베이거스에도 당연히 KM 호텔 체인의 K호텔이 있었다. 아니, 여기서는 K리조트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시내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오후 7시가 넘은 저녁 시간이었다. 하지만 라스베이거스는 화려한 밤의 도시였다. K리조트를 포함한 여러 호텔에서 쏟아져 나오는 조명이 마치 환상의 세계에 있는 듯 느껴졌다.

“이야, 진짜 대박이네. 왜 그렇게 라스베이거스, 라스베이거스 하는지 이제야 알겠어. 책으로 보는 것과는 천지 차이인 것 같아.”

“그래? 뭐 별거 없어 보이는데…….”

강민은 여러 차원에서 이보다 더한 화려하고 신비한 광경을 많이 보았기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지만, 강서영은 호텔들의 화려한 조명과 전시물들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신기해했다.

숙소인 K리조트에 도착하니 이미 사전에 연락이 되었는지 K리조트의 지배인 역시 나와서 강민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샘과 같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미 샘에게 강민이 이런 겉치레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귀띔을 들은 것 같았다.

그는 젊은 여직원 한 명을 가이드로 붙여주고는 자리를 비웠다.

숙소에 간단히 짐을 푼 강서영은 들뜬 얼굴로 한미애를 재촉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카지노에 가 봐야지! 엄마, 엄마. 우리 카지노 가 봐요.”

“카지노? 그거 도박 아니니? 난 그런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에이, 뭐 어때요? 그냥 재미로 하는 건데. 어차피 돈 벌려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난 별로 흥미가 안 생기네. 그냥 강훈이랑 같이 놀다 와.”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알겠어요. 그럼 쉬고 있어요, 엄마. 오빠랑 언니는 어쩔 거예요?”

강서영이 강민과 유리엘을 돌아보며 말하자 유리엘이 한미애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님, 카지노가 싫으시면 공연을 보시는 건 어때요? 태양의 서커스단에서 하는 멋진 쇼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럼 거기에 가 보자.”

“들었지, 서영아? 그럼 난 어머님이랑 민이랑 같이 공연 보고 올게.”

“네, 언니. 그럼 시아는?”

정시아는 모두가 자신을 돌아보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저도 어머님이랑 같이 공연 볼게요. 둘이 데이트해야죠. 헤헤.”

“야, 정시아! 그런 거 아냐!”

“언니! 다 아는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히히. 좋은 시간 보내고 와!”

“아, 그러네. 모두 같이 다닌다고 둘이 데이트할 시간도 별로 없었지? 이번엔 방해 안 할게.”

“오빠!”

이미 모두가 아는 인정받은 사이였지만 강서영은 이런 말들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붉어지며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옆에 있는 최강훈이 더 붉어진 얼굴인 것을 확인하고 나니 그녀 역시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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