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현세귀환록
120. 여행(2)
“호호호, 잘됐네. 그리고 강훈이하고 시아도 데려갈 테니 저번 제주도 여행보다는 좀 더 북적북적하게 다닐 수 있겠다.”
이미 가는 것으로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최강훈 또한 같이 간다고 하니 강서영의 마음이 한결 더 가는 쪽으로 기울었다. 전에 일본 출장 때의 좋은 기억 또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근데 수아랑 수강이는 아무래도 같이 못 가겠죠?”
“그렇겠지. 아직도 유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야. 1년이나 지났으니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도 되었는데, 생각보다 영혼이 유약한 편이었나 봐. 상황을 봐서 내년까지 정신을 못 차리면 강제 안착을 해보든지 해야겠어.”
“전에 강제 안착은 3년이 지나면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언니?”
“지리산에서 좋은 기운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으니 1년 정도 앞당겨도 될 것 같아.”
현재 한수강, 한수아 그리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유키는 지리산에 있는 별장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는 유키의 영혼의 안착이 생각보다 많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유키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석 달이 넘어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유리엘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유리엘은 천기(天氣)와 지기(地氣)가 유통하는 곳에 머물고 있으면 좀 더 빠른 시간에 영혼이 안착될 수 있을 것이라 했고, 그곳으로 지리산을 추천했다.
그래서 한수강은 유키를 데리고 지리산에 있는 강민의 별장으로 이동하려 했는데, 한수아가 둘과 함께 있고 싶다며 휴학까지 하고 지리산으로 같이 움직였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동생과 떨어지기 싫었던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장기간 유키를 홀로 두고 한수강과 한수아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기에 이번 여행에 같이 가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이렇게 강서영이 가는 것으로 마음을 굳히자, 강민이 간단한 일정을 말했다.
“아무튼 잘 생각했다. 출발은 보름 뒤고, 일단은 미국부터 시작해서 유럽, 중동, 중국을 거쳐서 다시 우리나라로 들어올 생각이야.”
강민은 다크 스타의 수뇌부를 처리하는 것보다 가족끼리 여행을 가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한 번 나서는 김에 웬만한 주요 국가들을 모두 들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뭐? 그렇게나 많이?”
해외로 3개월 정도 나간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어느 나라를 어떻게 간다는 것까지는 몰랐기에 강서영은 놀라면서 반문했다.
하지만 강민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남미나 아프리카, 인도 같은 곳도 들를 수 있으니까 느긋하게 마음먹고 가도록 해. 이번 기회에 네가 예전부터 노래 부르던 해외여행 실컷 시켜 줄 테니까.”
실제로 제주도 여행 이후로 강서영은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했으나, 그녀가 KM그룹에 입사를 하고 나니 그럴 만한 시간이 나지 않아 정작 해외로 가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해외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막상 3개월씩이나 길게 해외여행을 나간다고 생각하니 강서영은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왠지 모를 기대감이 보이는 강서영의 표정을 보던 강민은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 몰디브는 일정에서 뺐어. 거긴 네가 신혼여행으로 간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나중에 강훈이랑 가 봐.”
아직은 먼 이야기였지만 강민이 최강훈과의 신혼여행을 운운하자 강서영은 얼굴이 달아오르며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오빠!”
“하하하.”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민과 유리엘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LA 공항에서 입국 절차는 간단하게 진행되었다.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KM그룹의 회장 일가와 수행원들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최강훈의 블랙 헌터 카드가 더 위력을 발휘했다. 기본적으로 레드 카드 이상을 가진 헌터들은 출입국 심사 시 외교관급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유니온에서 조치를 해놓았다.
각 국가에서도 고위급 헌터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경우 향후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조치에 적극적인 협조를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전 세계적으로 몇 장 발급되지 않은 블랙 카드를 가진 최강훈은 그중에서도 특급 대우를 받았다. 이례적으로 동행한 인원 모두를 외교관급 대우를 하며 편하게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블랙 카드의 헌터라는 것 자체가 전술급 핵병기를 능가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으니 신체 검색이나 수화물 검색도 간단히 처리해 버렸다.
어차피 전용기이기 때문에 출입국 심사가 오래 걸리지도 않았으나, 일종의 기분 문제였다. 그만큼 최강훈을 대우해 준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강훈이가 있으니 편하네. 히히.”
“그래, 남자 친구 잘 뒀네.”
강민이 최강훈을 칭찬하는 듯하는 뉘앙스의 말을 하자 강서영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만족한다는 표시를 하였다.
하지만 최강훈의 표정은 쑥스러움이 가득했다. 마치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강민이 약간이라도 힘을 발휘한다면 자신과 같은 능력자가 수십, 수백 명이 몰려들어도 어찌하지 못할 강자라는 것을 알기에 더 그랬다.
그런 최강훈의 기분도 모르는 채 강서영은 최강훈이 인정받는 것에 기분이 좋아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강민 일행은 리무진 2대에 나누어 타고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스페셜팀까지 함께 움직이다 보니 한 대로는 자리가 부족해서였다.
“오빠, 그럼 K호텔로 가는 거야?”
“그래, 우리 호텔이 있는데 굳이 다른 곳에 묵을 필요는 없으니까.”
“서울에 있는 K호텔은 가봤는데 LA는 어떠려나.”
“호텔이 거기서 거기지 뭐.”
강민이 무심히 말하는 것과는 달리 KM의 호텔 체인은 자산 10조 원이 넘는 세계적인 호텔 체인이었다.
세계 70여 개 국가에 400개 이상의 호텔 및 리조트를 가지고 있는 KM 호텔 체인은 럭셔리 호텔을 표방한 K호텔과 비즈니스호텔을 표방한 M호텔로 나누어서 운영 중이었다. 지금 일행이 가는 곳은 당연히 럭셔리 K호텔이었다.
사실 호텔 체인의 매입은 강민의 즉흥적인 발상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몇 년 전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는 강서영의 말을 기억한 강민은 나중에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다닐 것을 대비해 세계 각국의 호텔들을 매입할 것을 지시했고, 실무부서에서는 주요 국가의 호텔 십여 개를 매수하였다.
나중에 이 사안을 알게 된 장태성 실장은 강민이 본격적으로 호텔업에 뛰어드는 것으로 생각해 개별적으로 호텔을 매수하는 것보다 이후 차라리 시스템이 잘 이루어져 있는 유명 호텔 체인을 매입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조언을 했다.
그리고 이왕 호텔을 구매했기에 호텔업을 하는 것도 괜찮다고 판단한 강민은 그 조언을 받아들여 몇 개의 호텔 체인을 매입했고, 결국 이런 규모의 KM 호텔 체인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호텔 체인을 만들고 제대로 사용한 적은 별로 없었다. 강민이나 유리엘은 순간 이동으로 전 세계로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호텔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강서영은 친구들과 서울에 있는 K호텔은 종종 이용했으나 해외로 나오는 것은 처음이었고, 한미애만이 동남아 쪽에 있는 K호텔을 네 차례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즉, 강민이 호텔 체인을 만든 지는 벌써 몇 년이나 지났지만, 이제야 가족 여행에 활용한다는 최초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K호텔에 도착하니 호텔 총지배인과 임원들이 일행을 영접하기 위해서 도열해 있었다. 아무래도 그룹 오너 일가의 첫 방문인데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로스앤젤레스 K호텔 총지배인 사무엘 리딕입니다.”
정중한 사무엘의 인사에 강민도 인사를 받으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리딕.”
“사무엘, 아니, 샘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러지요, 샘. 일단 로비에서 이러는 것보다는 방으로 올라가죠.”
가족끼리의 여행이라 밝혔지만 그룹 오너의 첫 방문이었기에 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간단한 현황 보고를 했다.
“분기 매출액은 전년 대비 소폭 감소했으나, 영업 이익은 고급화 전략에 따라서 전년 대비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샘의 말이 길어질 것 같자 강민은 잠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샘, 아까도 말했지만, 전 이곳에 가족 여행을 왔습니다. 업무적인 부분은 향후 별도로 검토하도록 하지요.”
“아…… 죄송합니다, 회장님. 숙소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샘이 안내한 객실은 호텔에서 가장 높은 층의 오션뷰 스위트룸으로 안내했다.
KM 호텔 체인의 럭셔리 호텔인 K호텔은 하나의 원칙이 있었는데, 최고층 스위트룸은 항시 완벽히 준비된 상태로 비워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언제 어떤 식으로 강민이 여행을 갈지 모르기 때문에 해놓은 조치였다. 호텔로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조치라 할 수 있었다.
지금도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위트룸의 통유리 거실 전면으로 산타모니카 해변이 쫘악 펼쳐져 있었다. 태평양의 끝없는 푸른 바다가 어쩐지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와! 멋있다!”
아니나 다를까 강서영도 전면의 바다를 보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동남아랑은 뭔가 다른 분위기구나.”
어머니 한미애도 같은 바다지만 태평양의 광활한 바다를 보니 뭔가 다른 것이 느껴지는지 흐뭇한 미소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일단 좀 쉬고 저녁에 다운타운 투어하자. 여기 직원이 가이드하기로 했지만,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그리로 안내하라고 할게.”
“할리우드! 특히, 명예의 거리에 가 보고 싶어. 영화배우 손바닥 있는 차이니즈 시어터도 가고 싶고.”
강서영은 전부터 생각해왔던 할리우드의 거리를 걸어보고 싶어서 그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래, 알겠어. 혹시 더 가고 싶은 곳 생각나면 나중에 말해.”
* * *
“엥? 이게 다야?”
할리우드의 거리를 걷던 강서영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그녀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는 별 모양에 스타의 이름을 새겨놓은 바닥이 약 2㎞ 정도 이어진 길이었다.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관광 거리였지만 강서영은 뭔가 더 기대했던 건지 실망했다는 듯 말했다.
“이야기로 들었을 때는 뭔가 정말 대단할 것 같았는데…….”
“하하. 여기 또 명예의 거리에 실망하신 분이 늘었군요. 그래도 차이니즈 시어터 앞에 있는 스타들의 손바닥은 그리 실망스럽지 않을 겁니다.”
오늘 일행의 가이드는 샘이 직접 나섰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여행이라는 이유로 업무 보고를 받지 않은 강민에게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가이드를 할 직원을 구해달라는 요청에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그래요? 샘 아저씨, 그럼 어서 그리로 가요!”
일행에게 살갑게 대하는 샘에게 강서영은 어느새 마치 오래 본 사이인 것처럼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미 지도를 보아서 위치는 알고 있었는지 강서영은 마치 여행을 처음 온 대학생처럼 들뜬 모습으로 차이니즈 씨어터로 뛰어갔고, 최강훈은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런 둘의 모습을 강민과 유리엘, 그리고 한미애는 따뜻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샘은 단순 가이드를 넘어 강민 일행의 여러 가지 편의를 보아주고 있었는데, 저녁 식사 또한 미슐랭 2스타를 받은 프로비던스라는 레스토랑을 예약해두어 강민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식사까지 마치고 좀 더 LA 시내를 구경하던 강민 일행은 다음날을 기약하며 숙소로 돌아갔는데, 숙소에는 익숙한 얼굴이 강민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유니온의 총재 벤자민이었다. 한미애나 강서영은 벤자민을 몰랐기에 강민은 스위트룸에 마련된 응접실에서 유리엘과 함께 그를 맞았다.
“여기까지는 웬일인가, 벤자민.”
“반갑습니다, 강민 회장님. 미국에 오신다면 제게 말씀해 주시지 그랬습니까? 그랬으면 마나 능력이 없는 가족분들은 순간 이동 마법진을 사용하시기 힘드실 테니, 유니온 전용 초음속 비행기라도 보내드렸을 텐데 말입니다.”
“빨리 오려 했다면 그런 것 필요 없이 순간 이동으로 왔겠지.”
유니온은 주요 국가의 핵심도시에는 순간 이동 마법진을 설치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장거리 순간 이동을 견디려면 일정 이상의 마나 능력이 필요했기에 일반인들은 사용이 불가능했다. 물론 대다수의 일반인은 이런 마법진의 존재 자체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또한, 유니온의 멤버라 하더라도 그 마법진을 이용하는데 사용되는 마나나 마정석은 본인이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마력 부담이나 비용이 들었다. 즉, 모든 유니온의 멤버들이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민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동 대상의 마나 능력이 있든 없든, 이동 거리가 어느 정도이든 관계없이 유리엘의 능력이라면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었다.
강민의 대답에 벤자민은 강민과 유리엘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벤자민의 모습을 보던 강민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단순 인사를 위해서 온 것인가? 인사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하기엔 좀 과한 것 같은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