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현세귀환록
119. 여행(1)
쾅-!
평소 차분한 모습만을 보였던 현승그룹의 사장 유태우가 흥분한 상태로 책상을 내려쳤다.
책상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런 모습을 종종 보았는지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또 복천(復天)놈들이냐?”
“그렇습니다.”
“피해액은 어느 정도지?”
“이번엔 마물의 사체를 보관한 곳이 타깃이 된지라 피해액이 좀 큰데…….”
“이 실장! 내가 그 금액인 큰지 몰라서 묻는 것이야? 묻는 말에나 답해! 대체 얼마야!!”
더 큰 목소리를 내는 유태우의 반응에 이 실장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침착히 대답했다.
“마물 사체만 2천억 원가량의 손실이고, 마나 장비 가공 시설까지 다 포함하면 5천억 원 정도의 손실입니다.”
“허…… 전부 손실이라는 말인가…….”
5천억 원이라는 이야기에 머리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현승그룹의 자산은 수백조 원 규모에 달하지만, 실제 회장 일가의 재산은 구성원 모두의 재산을 합치더라도 20조 원 정도에 불과하다.
그중 유태우의 재산은 몇 조 원에 그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5천억 원가량의 손실은 재계 2위 현승그룹의 사장이라 하더라도 쉽게 넘길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유태우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이 실장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연구실의 직원들은 어떻게 되었나?”
“연구원 및 경호원들까지 모두 다 살해당했습니다.
복천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짐작했던 일이었다. 천왕가의 재건을 목표로 내세우는 복천이 직접적인 원수인 현승의 직원들을 살려뒀을 가능성은 없었다.
물론 그 직원 중 연구원 같은 경우는 현승과 천왕가 사이의 관계도 없는 무고한 사람이었으나 이미 복수에 눈이 먼 복천에서 그들을 살려줄 이유는 없었다.
3개월 전부터 복천이라는 집단에서 현승그룹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공격은 한남동에 있는 유현승의 본가를 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남동에는 S포스의 최정예 요원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습격이 발생하자마자 S포스의 기동타격대가 긴급 출동하여 결국 복천의 살수들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복천이라는 집단이 그들을 공격하는지도 몰랐다. 다만 이능력자들의 공격이기에 마나 장비나 마법진 등을 이용해서 보호를 좀 더 철저히 했을 뿐이었다.
복천이 그들을 노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차 공격 때였다. 2차 공격은 현승의 주력 산업인 현승전자를 노리고 진행되었다.
모두가 퇴근하고 난 평일 새벽, 현승전자의 이천 사업장이 화재로 인하여 상당부분 불에 타버렸다.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재산 피해는 천억 원이 넘는 큰 규모였다.
그리고 공장의 벽면에는 천왕의 이름으로 배신자들은 처단한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으며, 하단에는 복천이라는 이름이 남겨져 있었다.
이후로는 복천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후로도 3차례의 공격이 더 있었다. 그로 인해 발생한 재산의 손실만 천억 원이 넘었다.
이미 본가가 사라져 버린 천왕가에 비해서 현승은 가진 것이 많았다. 그래서 지킬 것도 많았다. 이 때문에 처음에 현승은 과거에 합작을 했던 유니온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하지만 유니온도 한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차원 교차와 웜홀의 폭주 등 굵직굵직한 사안들을 처리해야 하는 벤자민은 더 이상 세력 간의 다툼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예들을 다 잃어버린 천왕, 아니, 복천이었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이능력자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킬 곳이 많은 현승은 가지고 있는 S포스만으로는 모든 곳을 지킬 수가 없었다.
이대로 진흙탕 싸움으로 간다면 현승이 훨씬 손해가 큰 싸움이었다. 하지만 현승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적극적인 언론 플레이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 유니온에서는 이능력자들이 사회 위험 분자로 취급받는 것을 꺼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승이 이능력자들이 자신을 공격한다는 식의 언론 플레이는 유니온의 의도를 완전히 깨부수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결국 유니온에서 중재에 나섰다. 복천 자체가 카오틱에빌을 천명하지 않고 옛 천왕의 이름을 사용하며 유니온의 멤버로 등록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복천과 현승을 직접 만나게 할 수는 없었지만, 유니온의 중재를 통해서 복천은 이능 세계와 관련이 없는 시설이나 사람에 대한 공격을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현승은 이능력자들이 위험하다는 식의 언론 플레이는 하지 않기로 하였다.
다만, 이능과 관련이 있는 시설에 대한 공격이나 현승가 자체에 대한 공격은 세력 간의 분쟁으로 유니온에서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복천에서는 분쟁 상황임을 명확히 밝히고 자신들의 공격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받았기에 만족할 수 있었고, 현승 또한 광범위한 공격가능 대상을 소수의 이능 관련 부분으로 공격을 제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 불만은 없었다.
이런 협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번 마나 장비 생산 시설에 대한 공격은 유니온의 중재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한 공격이라 현승도 유니온에 항의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안 되겠어……. 전보다 지킬 범위는 줄었지만, S포스만으로는 다 커버하기가 힘들군. 이 실장, 이능력자 단체 중에서 경호를 맡길 만한 곳은 없나? 지금 너무 강한 단체가 들어온다면 오히려 우리가 먹힐 수 있으니 철검회 같은 그레이 울프 중에서 찾아보게.”
유태우의 말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이 실장은 이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애초에 그레이 울프들은 집단생활에 맞지 않아서 뛰쳐나간 인물들이다 보니 단체를 이루어서 활동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지금 고용한 철검회도 어렵게 수소문해서 구했지 않습니까?”
“끄응……. 뭐 좋은 방법이 없겠는가?”
“음…… 차라리 역습은 어떻습니까?”
“역습?”
“그렇습니다. 결국은 복천 놈들을 다 처리해야 끝날 싸움이라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공격에 나서야 할 필요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유태우는 지키는 것만 생각하다 보니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더군다나 지키는 것만 해도 인원이 부족하다 보니 공격에 나서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흐음, 역습이라……. 그런데 의뢰할 만한 단체가 있을까? 아무래도 유니온 멤버들이라면 다른 집단의 분쟁에 개입하려 하지 않을 것인데 말이야. 그레이 울프들을 모아야 할까? 공격은 장기 임무가 아니니 모으기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런 그의 말에 이 실장은 유태우 가까이 몸을 숙인 후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비밀리에 카오틱에빌에 의뢰를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중이떠중이 같은 그레이 울프들을 모으는 것보다는 확실할 것 같습니다만.”
카오틱에빌이라는 말에 유태우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이 실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카오틱에빌? 이 실장,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가?”
유니온의 멤버가 카오틱에빌과 거래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멤버의 자격을 유지할 수 없는 중대 사안이었다. 카오틱에빌은 유니온의 적대 집단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드러나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실제로 유니온의 멤버 중에서도 신분을 감추고 암암리에 거래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위험하기에 신분을 감추고 하는 것이리라.
유태우의 말에 이 실장은 더 목소리를 낮추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차피 유니온의 다른 멤버들도 몰래 의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흐음…… 우리와 협력하고 있는 철검회에서 의뢰를 하는 건 어떤가?”
“철검회는 그레이 울프지만 유니온 쪽 성향에 가까워서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을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밑에 직원을 시켜서 의뢰하는 식으로 하는 것이 낫겠지요.”
곰곰이 생각하던 유태우는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 실장에게 말했다.
“그럼 어디에 의뢰할 건가? 다크 스타?”
지금은 웬만한 카오틱에빌 그룹들은 위원회의 철퇴를 맞은지라 유태우의 머리에는 다크 스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실장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유태우를 보며 대답했다.
“다크 스타에 의뢰했다가 현승이 통으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거기는 너무 위험하지요.”
“그럼 어디에?”
“중국 쪽에 혈마단이 나름 소수 정예로 구성되어 이름을 날리고 있다더군요. 소수에 불과하다 보니 위원회나 유니온에서도 아직까지는 신경 쓰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하는 것이겠지. 아무래도 다크 스타에 집중하고 있으니 말이야.”
“뭐 어쨌든 나름 이름이 있으니 한 번 의뢰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알겠네. 이 실장이 한번 추진해보게. 대신 우리 현승의 이름이 새어나가서는 안 될 것이야.”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 * *
한두 나라만 가는 여행이 아니다 보니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석 달 일정으로 장기간 자리를 비우는 것이다 보니 강민이나 강서영이나 회사 업무에 대한 위임이 필요했다.
강민이야 장태성 실장에게 맡기면 되는 일이었지만, 강서영 같은 경우는 아직은 믿고 맡길 만한 측근이 없어 장기 여행을 다소 망설이고 있었다.
“오빠, 나 정말 괜찮으니까 그냥 일주일 정도 일정으로 동남아나 갔다 오면 안 돼? 진행하는 사업도 많은데 내가 빠지면 안 될 것 같단 말이야.”
지금도 강서영은 강민을 설득 중이었다. 사실 그녀가 이렇게 부탁할 때 강민이 들어주지 않은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이 그 드문 경우 중의 하나였다.
“리더는 중요한 의사 결정만 하면 되는 자리야. 세부적인 내용은 실무자가 알아서 하는 거지. 해외에 나간다 해서 연락 안 되는 거 아니니까 중요한 사항은 네게 전화하라고 하면 될 거 아냐. 정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면 자리를 비운 동안은 장 실장에게 같이 좀 봐달라고 부탁하지 뭐.”
드물게 완고한 강민의 말에 강서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내가 괜찮다는데 대체 왜 그렇게 여행을 가려고 하는 거야?”
반쯤은 항복한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유리엘이 대답했다.
“서영아. 네가 이번 일로 충격받았을 것 같아서 기분 전환하는 목적도 있지만, 민이 정말 원하는 건 가족끼리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야. 전에 제주도 갔을 때도 좋았잖아. 어머님도 좋아하셨고 말이야.”
강서영은 과거 제주도 여행에서 좋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당시 어머니 한미애가 좋아했던 것 또한 떠올라 왠지 모를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녀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유리엘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돈을 벌려고 모든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가질 필요도 있지 않겠어? 안 그래도 최근에 네가 재단 일로 바빠서 어머님께서 좀 서운해하시는 눈치던데 말이야.”
“아…….”
실제로 강서영은 최근 드림시티 사업 건으로 인해서 정말 바쁜 나날을 보내는 통에 한미애와 대화하는 시간조차 많이 만들지 못했기에, 유리엘의 말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널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님을 위해서라 생각하고 시간 좀 내주렴. 응?”
“……. 네, 언니. 언니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제가 거절할 명분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