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현세귀환록
117. 흑성(3)
사실 최강훈이 화가 난 이유는 이런 상황을 만든 복면인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원인을 제공한 그들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보다 다른 부분에서 더 큰 화가 치밀었다.
최강훈이 지금 가장 크게 화가 난 대상은 그 자신이었다. 지금 그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화가 났던 것이었다.
최강훈은 몇 년간 강서영을 지키기 위한 힘을 길렀고, 어느 정도 자신도 생겼다. 그래서 지금은 강민이 이야기한 강서영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자부심이 깨졌다. 강서영은 충격을 받고 기절하고 말았기에, 최강훈은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물론 최강훈이 항상 그녀의 옆에 있을 수는 없었기에 그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의 자책은 과한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강훈의 생각에는 언제라도 그녀가 위험한 상황이 처했을 때 자신을 부를 수 있도록 사전에 조치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책감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런 장치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할지 몰라도 유리엘이라면 가능할 것이었다. 강민의 동생인 강서영을 지키는 데 사용한다면 유리엘이 그의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최강훈은 이번 일이 끝나면 이 장치부터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복면인들의 앞에 섰다.
최강훈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복면인들은 재빨리 세 개의 알약을 삼켰다.
“크으윽…….”
“으윽…….”
아무 신음성조차 내지 않은 파란색 복면인에 비해, 남색 복면인들은 외마디 신음성을 발하였다.
이윽고 그들의 눈에는 붉은 혈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복면인들에게 본격적으로 비약의 기운이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공격의 시작은 남색 복면인부터였다. 두 명의 남색 복면인은 각각 빛나는 샤이닝 소드를 들고 최강훈의 좌우를 노리며 공격해 들어왔다.
펑! 펑!
최강훈은 가볍게 환도를 휘둘러 남색 복면인들의 검세를 튕겨냈다. 남색 복면인의 검에 서린 마나도 만만치 않았는지 소드 오러에도 검이 잘려 나가지는 않았다. 단지 폭음과 함께 튕겨 나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본다면 검 날에 파인 자국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었다.
아무리 샤이닝 소드에 강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해도 소드 오러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남색 복면인들이 공격하는 사이 최강훈의 전면에서 파란색 복면인이 사라졌다. 그리고 최강훈이 남색 복면인들의 공격을 튕겨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남색 복면인이 최강훈의 시야를 가리는 사이,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그를 뛰어넘은 파란색 복면인이 후방에서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의표를 찌른 신속한 공격이었기에 최강훈이 뒤돌아 그것을 막기에는 늦을 것만 같았다.
“아…….”
정시아는 멀리서 전투를 바라보다가 그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비약을 먹은 파란색 복면인의 움직임은 진혈을 깨운 그녀의 움직임에 육박했던 것이었다. 아니, 약간 거친 면이 있지만 어쩌면 더 신속하고 강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보기에는 최강훈이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정시아의 우려와는 달리 최강훈은 이미 초월의 영역에 들어가 있었다.
초월의 영역에 들어선 최강훈은 파란색 복면인의 움직임을 이미 다 꿰어보고 있었다.
지금도 번개처럼 그의 목을 찔러오는 검의 움직임이 최강훈의 눈에는 너무도 느리게 보였다.
자신의 움직임도 느리다고 느껴졌지만 온몸에 마나를 돌려서 약간의 속도를 올리자, 최강훈은 파란색 복면인의 검속(劍速) 정도는 금세 능가할 수 있었다.
콰앙-!
검과 도가 맞부딪치자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각자의 도검에 서린 마나가 부딪치며 터져 나온 소리였다.
최강훈의 환도야 소드 오러가 깃들었기에 당연히 강대한 마나가 서려 있었지만, 파란 복면인의 검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역시 마스터급에는 미치지 못하는지 제자리에서 검을 받아낸 최강훈과는 달리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색 복면인의 공격부터 최강훈과 파란색 복면인의 공방까지 한 호흡도 안 돼서 일어난 일이었다.
아마 일반인이라면 싸우는 모습을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공방이었다. 특히 마지막 최강훈의 반격은 웬만한 고등급 능력자들도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들의 전력을 다한 공격을 최강훈이 어렵지 않게 받아내자 파란색 복면인은 이를 악물고 남색 복면인에게 말했다.
“크윽…… 두 알 더!”
남색 복면인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파란색 복면인의 말에 대답도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품으로 손을 넣어 다시 두 알의 알약을 먹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에서 혈기가 뻗어 나오는 정도였는데, 두 알의 비약을 추가로 먹은 복면인들은 지금 눈알 자체가 붉게 물들어버렸다. 아마 이 세 명이 보는 세상은 핏빛으로 가득 찬 세상일 것이었다.
특히 남색 복면인 둘은 어느 정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비약을 먹고 잠시간 몸을 떨며 약 기운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을 썼다.
파란색 복면인은 그런 남색 복면인의 모습을 보며 그사이에 공격해 올까 싶어 최강훈을 경계했으나 최강훈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이내 비약의 기운을 다 받아들였는지 복면인들은 조금 전의 공격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쉬쉭-쉭!
팡! 팡! 쾅콰앙!!
아까와 비슷하게 최강훈의 눈을 흐트러뜨리기 위해서 남색 복면인은 재빠르게 최강훈의 전후좌우를 번갈아가며 공격해 들어갔고 파란색 복면인은 그 틈새를 노려서 날카로운 공격을 감행했다.
어차피 남색 복면인의 공격은 최강훈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기에 파란색 복면인의 공격에 승부를 건듯했다.
하지만 이미 초월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최강훈은 손쉽게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크윽…….”
자신들의 공격이 아무런 유효타를 가하지 못하자 남색 복면인 중 한 명이 다시 한번 품에 손을 넣었다.
이내 빠져나온 복면인의 손에는 다섯 알의 알약이 들려져 있었다. 그걸 보던 다른 남색 복면인이 외쳤다.
“이현! 더 이상은 무리야! 더 먹는다면 이성을 잃어버릴 거야!”
복면인의 외침에 이현이라 불린 복면인이 대답했다.
“어차피 이 상태로는 안 돼! 이렇게 다 죽을 바에는 내가 마인화 된 동안 달아나라고! 어차피 마인화 되고 나면 합격은 무리일 테니. 지부장님, 이걸로 저번의 빚은 퉁치는 겁니다. 크큭.”
이현은 다른 복면인들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로 다섯 개의 알약을 씹어 삼켰다.
"이현!!"
알약을 먹은 이현은 간질에 걸린 것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혈안(血眼)이 된 눈에서 핏줄기가 새어 나왔다.
복면을 써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입과 코, 그리고 귀가 있는 곳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도 피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크와왕!!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현의 입에서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소리가 터지더니 최강훈에게 쏜살같이 덤벼들었다. 손에 들고 있던 검마저 버리고 숫제 짐승처럼 네 발을 이용해서 뛰어들었다.
이현의 속도는 아까 파란색 복면인의 속도에 맞먹을 정도로 신속했다. 하지만 이성을 잃었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움직임이 아까와 달리 상당히 거칠었다.
지금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최강훈이 있었기에 덤벼든 것이지, 그가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여 공격한 건 아니었다.
그런 이현의 모습에 다른 남색 복면인은 고개를 흔들더니 말했다.
“지부장님, 피하시죠. 이현이 저렇게까지 해서 구명줄을 내려주는데 말입니다.”
파란색 복면인은 남색 복면인의 말에 동의하는지 잠시 이현을 보다가 말했다.
“그래, 가자!”
이현이 최강훈에게 덤벼드는 모습과 동시에 복면인들이 전장을 빠져나가려고 몸을 틀었다. 하지만 곧이어 터진 엄청난 폭발음에 다시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콰앙!!!
폭발음과 함께 드러난 상황은 피떡이 되어서 바닥에 납작 눌러진 이현의 모습이었다. 조금 전의 폭발 때 이미 생명을 잃었는지 이현의 움직임은 없었다.
“힘만 센 괴물이 된다고 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마법사나 각성자 같은 체계적인 무술을 배우지 않은 이능력자에게는 이성을 잃더라도 이런 마인화를 통한 힘의 증폭이 어느 정도는 통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무술을 배운 무술가 타입의 이능력자들에게는, 더군다나 최강훈처럼 경지에 이른 무술가에게는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마인은 힘센 짐승과 다름이 없었다.
지금도 유(流)자결로 공격을 흘리고, 반(反)자결로 그 힘을 얹혀서 공격했더니, 이성을 잃은 이현은 피하지도 않은 채 맞받으려다가 일격에 곤죽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마인화하여 동료들을 살리려 한 이현은 구명줄을 마련해 줄 시간조차 만들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갖춘 동료, 아니, 더 증폭된 힘을 발휘한 이현이 죽는 것을 본 남색 복면인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겁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최강훈을 상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언제든 출수(出手)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그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죽여 달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휘이잉-! 퍽!
전력을 다해서 튕기듯이 뛰어가던 그는 다섯 발자국도 떼기 전에 최강훈의 환도에 가슴이 뚫려 절명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파란색 복면인뿐이었다.
“이렇게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자신도 그 칼 위에 설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오늘 네 목은 여기에 두고 가야 할 거야. 아, 물론 나도 그런 각오가 되어 있으니 네가 날 이긴다면 내 목은 여기에 떨어지겠지.”
파란색 복면인은 최강훈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조금 전의 상황으로 여기서 도망치기는 힘들다는 것을 직감한 상태였다.
또한 이현의 케이스로 보아 마인화를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어느새 허공섭물(虛空攝物)을 통해서 자신의 환도를 거둬들인 최강훈은 다시금 소드 오러를 선보이고 있었다.
살아남기 힘들다고 생각하자 파란색 복면인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어차피 죽을 것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해보고 끝을 맺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을 반영이나 하듯 파란색 복면인의 샤이닝 소드가 웅웅거리며 검명(劍鳴)을 토해냈다.
검명이 난다는 것은 깨달음은 몰라도 담겨 있는 힘으로만 치면 검기의 바로 전 단계였다.
콰----앙!!!
이윽고 최강훈의 소드 오러와 파란색 복면인의 샤이닝 소드가 격돌했다. 일체의 기교도 없는 강대한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최강훈은 충분히 파란색 복면인의 검을 흘리고 빈틈을 노려서 손쉽게 이길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러하지 않았다. 힘의 대결을 받아준 것이었다.
이격(二擊)은 없었다. 조금 전의 공격이 마지막 공격이었다. 공격을 마친 둘은 힘을 겨루는 듯 검을 맞대고 잠시 멈춰 있었다.
하지만 힘을 겨루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복면인의 눈에는 생기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색 복면인의 검은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그리고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파란색 복면인의 복면이 반으로 갈라져서 흩날렸다.
맨 얼굴이 드러난 복면인은 30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왼쪽 볼에 있는 손톱만 한 검은 거미 모양의 문신이 인상적이었다.
잠시 그렇게 버티던 복면인은 머리에서 사타구니까지 두 조각으로 잘려 쓰러졌다. 검기에 갈려진 단면이 다 타버렸는지 피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