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현세귀환록
116. 흑성(2)
채-챙!
또다시 검이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복면인의 검격을 텁석부리가 힘겹게 막아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어서 날아오는 검의 궤적에 텁석부리의 목이 걸려 있었다. 이대로면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캉-!
“으윽…….”
등을 대고 있던 박 팀장이 텁석부리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걷어냈다. 박 팀장은 텁석부리를 도와주느라 허벅지에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박 팀장! 괜찮은가!”
“괜찮기는…….”
이미 헌터들과 복면인들 간의 전투가 벌어진 지 이십여 분이 넘었다.
텁석부리와 박 팀장을 제외한 헌터가 5분도 되지 않아서 모두 도륙되어 버린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 둘은 분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텁석부리나 박 팀장의 실력은 복면인들의 실력보다 그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둘은 조금 전 마물과의 전투를 끝냈고 이미 부상도 당한 상태였기에, 체력과 마나가 많이 소진된 상태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둘인데 반해 덤벼드는 복면인들은 다섯 명이었다. 그야말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박 팀장이 아까 도움을 요청한 정시아는 여전히 나서지 않고 있었기에 둘이 살아남을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헉, 헉……. 박 팀장, 우리도 여기서 끝인가 보군…….”
“휴…… 이렇게 갈 줄은 몰랐군. 마물 사냥하면서 번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가겠어.”
박 팀장의 말에 텁석부리 또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돈 번다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좀 쓰면서 사는 건데. 아쉽긴 하구만.”
“크큭, 어쩔 수 없지.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그건 그렇고 저 헌터가 아무리 다크 레드급이라고 해도 이들 모두를 상대하긴 힘들 텐데, 무슨 생각이지? 설마 둘이서 저 여덟 명을 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박 팀장은 정시아를 바라보며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정시아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안 왔다.
“그, 어여차!”
대답을 하려던 텁석부리는 날아온 검을 막은 후 말을 이었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랬다면 지금 이곳에 뛰어들겠지. 그나마 우리라도 있으면 상대하기 더 편할 테니 말이야.”
하지만 곁눈질로 정시아와 강서영을 바라본 텁석부리는 이내 감이 잡힌다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딱 보니 저 기절한 여자가 중요 인물인가 보군. 그러니까 저 남자하고 다크 레드 헌터 둘 다 저 기절한 여자의 경호원이라는 거지. 아마 직접적인 공격이 오기 전까지는 나서지 않으려 할걸? 이 전투에 끼지 않은 저기 세 명도 걸릴 테고 말이야.”
“그렇지만, 다크 스타는 목격자를 모두 없애지 않는가? 어차피 우리가 죽고 나면 저쪽이 타깃이 될 텐데…….”
“그래서 저렇게 똥 마려운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겠지. 그렇지만 저 정도나 되는 헌터가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있을까? 윽!”
대화를 하다 보니 전투에 대한 집중력이 흐트러졌는지 왼쪽 팔뚝에 다시 한번 일격을 허용했다.
하지만 이미 혈인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둘이었기에 이런 상처 하나 더 난다 하더라도 표시도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분명 대미지는 누적되고 있었고, 그들이 쓰러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분명하였다.
다크 스타의 복면인들이 둘의 숨통을 끊기 위해 적극적으로 덤벼들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직은 힘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둘이 동귀어진을 노리고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는 것을 우려하고 것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제풀에 지쳐서 쓰러질 것이 뻔한데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이제 둘은 샤이닝 소드도 유지하기 힘든 정도로 마나가 떨어져 버렸다.
3분이나 흘렀을까? 마치 수명이 다된 백열등처럼 흐릿한 빛만을 뿜어내던 그들의 샤이닝 소드가 픽 하고 꺼져 버렸다.
둘의 마나가 떨어진 것을 확인한 다크 스타의 복면인들은 클클거리며 웃었다. 이들을 끝내고 나면 전리품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났던 것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전리품은 마물의 사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기 멀리 있는 강서영과 정시아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생각만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전장 상공 십여 미터 정도에 마나 유동이 발생하며 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최강훈이 나타난 것이었다. 수련을 하다가 곧바로 공간 이동을 했는지 최강훈은 수련 때 입는 도복 차림에 자신의 환도까지 꺼내 들고 있었다.
“뭐냐!”
갑작스러운 최강훈의 등장에 다크 스타의 복면인들뿐만 아니라 텁석부리와 박 팀장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강훈은 빠르게 전장의 상황을 훑었다. 이내 강서영 일행이 아직 어떤 위해 입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런 상황을 만든 적들에게 분노를 토해냈다.
“하앗!”
최강훈은 손에 들고 있는 환도를 벼락과도 같이 빠르고 강하게 내리 그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내리 긋는 검을 보며 다크 스타의 복면인들이 의아함을 느낄 때, 전면에서 떨어져 있던 세 명 중 한 명의 입에서 경고가 터져 나왔다.
“피해라!!”
복면인들은 피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아무것도 없는데 뭘 피하라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푸슈슈슉-!
그 순간 그들의 머리 위에 푸른 마나의 검이 나타나더니 그들의 머리를 뚫고 바닥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나의 검이 통과하면서 모든 움직임이 멈추어버린 다섯 복면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그들의 정수리와 사타구니에서는 피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어 그들의 사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다섯 명의 복면인이 순식간에 도륙되어 버린 것이었다.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던 복면인들이 삽시간에 죽어버리자 텁석부리와 복면인은 어리둥절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바, 박 팀장, 어떻게 된 거지?”
“그, 글쎄. 나도 잘……”
“여튼 우리까지 공격하지 않는 것으로 봐선 적은 아닌가 봐.”
“그런 것 같군. 하여튼 이제 더 버티기도 힘들었는데 살았군.”
살았다는 박 팀장의 말에 텁석부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직 모르지. 저기 세 명이 아까 그놈들 상급자인 것 같은데 말이야.”
“그치만 조금 전의 공격은 보통 공격이 아니야. 과거 내 사부님도 이 정도는 되지 못했다고. 저기 세 놈이 어떤 실력을 갖췄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저 청년이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
“허, 젊어 보이는데 대단하구만. 그럼 우린 산 건가? 휴…… 일단 좀 앉지.”
상황 파악을 하던 텁석부리와 박 팀장은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었기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텁석부리와 박 팀장의 대화를 뒤로 한 채, 최강훈은 나머지 복면인 세 명을 끝내기 위해서 천천히 다가갔다.
다크 스타는 복면의 색으로 서로의 상하를 표시하는지 조금 전 죽은 자들은 검은 복면을 쓰고 있는 것에 비해, 지금 세 명은 그 복면의 색이 달랐다.
세 명 중 두 명은 남색, 나머지 한 명은 파란색의 복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검은 복면을 쓴 다크 스타의 일원에 비해서 월등한 실력을 갖춘 것으로 보였다.
그중 파란색의 복면인은 보통 실력이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마스터의 경지에 있는 최강훈의 상대는 아니었다.
파란 복면인이 대단하긴 했지만 아직 마스터에는 오르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저벅저벅.
천천히 복면인들에게 걸어가는 최강훈은 분노를 감추지 않고 손에 쥔 환도에 힘을 주었다.
파스슥-!
평소 같으면 잘 들리지도 미약한 소리였지만, 사방이 조용한 상태였기에 미세한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아니, 어쩌면 복면인들에게는 천둥과도 같은 소리였을 것이었다.
최강훈의 환도에 소드 오러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가 화가 난 것을 반영이나 하는 듯이 소드 오러의 타오르는 듯한 마나의 불길이 평소보다 거칠어 보였다.
“마스터!”
최강훈의 소드 오러를 보고 놀랐는지 남색 복면인 중 한 명이 놀라 외쳤다.
“허, 어디서 마스터가……. 천왕의 이극민이 사라지면서 한국에는 마스터가 없다고 들었는데…….”
좌우의 남색 복면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가운데 파란색 복면인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음…… 피하기는 힘들 것 같군. 비약은 챙겨왔지?”
비약이라는 말에 남색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유사시에 생명줄인데 안 가지고 올 수가 있나요. 벨리알 놈들이 물량을 줄이는 바람에 구하기 힘들어졌지만 말입니다.”
파란색 복면인은 다가오는 최강훈의 기세를 가늠해 보더니 남색 복면인에게 말했다.
“마스터 급이다. 최소 세 개는 먹어야 할 거야.”
“세 개요? 세 개면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부작용을 언급하는 남색 복면인에게 파란색 복면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큭, 죽는 것보다는 부작용이 낫지 않을까?”
“그, 그건 그렇겠지요.”
“최소 세 개야. 위험한 상황이 되면 부작용 신경 쓰지 말고 더 먹어. 살고 싶다면 말이야. 대신 한도는 알고 있지? 이성을 잃은 마인이 될 바에는 죽는 것이 나을 테니 너무 먹지는 말고.”
“네, 지부장님.”
천천히 다가오는 최강훈을 바라보며 세 명의 복면인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비약을 꺼내려는 것 같았다.
최강훈은 그들이 비약을 꺼내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마스터 간의 대결이라면 모를까 저들이 비약을 먹는다고 자신이 질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전장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시아였다.
“야, 최강훈. 저놈들은 내가 맡을게. 아까부터 참았다고. 서영이 언니만 아녔으면 내가 나서서 처리했을 건데…… 특히 저 가운데 파란 복면은 내가 찜해뒀어!”
최강훈이 등장한 이상 더 이상 강서영이 위험할 일은 없었다. 그 말은 더 이상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정시아가 강서영 옆에 붙어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특히, 지부장이라 불린 파란색 복면인은 강서영을 지킬 필요만 없었다면 한 번 붙어 보고 싶을 정도의 강자였다.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강자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기에 정시아는 들뜬 마음으로 최강훈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최강훈은 지금 화가 난 상태였다. 정시아의 그런 말을 받아 줄 상태가 아니었다. 평상시의 정시아라면 이런 분위기는 바로바로 파악했을 것이지만, 지금은 거리도 떨어져 있었고 그녀 스스로가 이런 상황에 짜증이 났던 상황이라 최강훈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더군다나 능력의 정도와는 무관하게 평소에는 순둥이처럼 그녀가 요구하는 무리한 부탁도 다 들어주는 최강훈이라, 지금도 그녀의 이런 말을 최강훈은 당연히 받아줄 것이라고 정시아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최강훈은 화난 눈빛을 가라앉히지 않고 정시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정시아! 넌 서영이 누나 옆에 있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최강훈이 마스터의 힘을 온전히 드러내며 말하자 정시아가 끌어올리고 있는 기세마저 덮어버렸다.
“아, 알겠어요…….”
처음 보는 최강훈의 박력에 정시아는 그녀의 외모와도 같이 20대 초반 아가씨처럼 얌전해져 버렸다.
그 말의 끝에는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까지 붙어버렸다. 최강훈에게 압도되었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