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현세귀환록
111. 공개(1)
의장의 말이 끝나자 검은 로브를 둘러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음…… 굳이 일반인들을 그렇게까지 배려해야 합니까? 본격적으로 타 차원과 대립이 생기면 어차피 살아남기도 힘든 자들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타 차원의 침공이 생기면 우리 이능계가 일반인을 통제해야 할 것이고 힘도 없는 그들은 우리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텐데요.”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이야기요. 애초에 왜 우리가 위원회를 만들었소? 어차피 우리 이능계는 일반 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소. 암중지배를 한다면 모를까 직접통제에 나선다면 분명 그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들과 대립관계가 된다면 지금의 문명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오. 실제로 이렇게 폭발적인 문명의 성장은 우리 이능 세계보다는 일반인들이 이끌었다고 할 수 있지 않소?”
의장의 말에도 검은 로브 남자가 납득하지 못했는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만 그것은 평상시의 이야기이고, 지금처럼 외부의 적이 있는 상황이라면 자연스럽게 직접 통제에 나서도 되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고래(古來)로 내부의 단합을 위해서 외부의 적을 이용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하지만 의장의 추가적인 답변을 듣고 나니 납득이 되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소, 하지만 이것도 생각해보시오. 퍼니셔의 말에 따르면 마나장이 통합되면 지금처럼 드물게 마나 적합자나 각성자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폭발적으로 어쩌면 인류의 반 이상이 각성할지도 모른다 하지 않소. 지금도 그런 조짐이 보이고 말이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강압적인 정책을 펼친다면 일반인에서 새로이 이능력자가 되는 사람들이 우리 위원회를 적대할 수도 있을 것이오. 외부의 적이 있는 상황에서 내부의 조력자가 될 수 있는 자들과 적대관계가 될 필요는 없지 않소?”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검은 로브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자 의장은 미소를 지으며 회의를 마무리 지으려 하였다.
“다른 반대 의견이 없으시다면 유니온에 지시하여 일반 세계에 천천히 이능에 대해서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배 세력에게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능력 세계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도록 하지요. 그래야 나중에 우리가 신규로 각성하는 인재들을 확보하기가 쉬울 테니 말입니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음? 로드 할 말이 남았습니까?”
회의를 마친다는 의장의 말에 검은 정장의 중년인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다.
“네, 일반 세계에 우리 이능계를 알린다는 것까지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카오틱에빌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그레이 울프는 몰라도 카오틱에빌은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일반인들은 우리나 그레이 울프나 카오틱에빌을 구분하지 못할 것이고, 카오틱에빌이 악행을 저지른다면 이능력자 자체에 대한 악감정이 생길 텐데요. 그렇게 된다면 결국 의장님의 최초 생각을 이루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만.”
간과하고 있었는지 의장은 탐스러운 흰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위원들도 로드의 말에 동의하였는지 잠시간의 침묵이 회의장에 흘렀다.
“옳으신 말씀 같소, 그럼 이렇게 합시다. 지금까지는 일반 세계에 심각한 악행을 하는 경우에만 징계했지만, 마나장이 통합될 때까지 즉, 향후 5년간 최대한 카오틱에빌의 뿌리를 뽑도록 말이오. 어차피 힘을 과시하거나 남용하려는 모든 카오틱 에빌을 없애버릴 수는 없을 테지만, 소수가 나서봤자 힘을 쓰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은 단체를 이룬 카오틱에빌을 타깃으로 하여 정리해 보지요.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어차피 각국 정부에서도 이능력자를 육성할 테니 소수의 카오틱 에빌들은 그들이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장의 말에 동의했는지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로드의 모습을 보며 의장이 한 번 더 강조하며 말했다.
“로드 역시 그때까지는 벨리알과의 관계를 확실히 정리해서 처리하셔야 할 것이오.”
벨리알이라는 말에 로드는 다소 표정을 굳히며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의장님.”
이제 다른 의견이 없어 보이자 의장은 다시 회의 종결을 이야기했다.
“다른 의견이 없으시다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회의가 종결되면서 모든 위원의 모습은 등장했던 것처럼 사라졌다. 테이블에 공간이동의 술식이 부여되어 있는지 웜홀 탐색기 역시 사라졌다.
모든 의원이 한 명씩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의장은,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은 흰색 도포를 입은 70대 노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응? 백가주의 얼굴이 이렇게 굳은 적이 있었던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 * *
“강서영 이사장님. 이제 취임하신 지 1년 정도가 지나셨는데 KM재단의 파격적인 움직임에 대해서 국민들이 많이 놀라고 있습니다. 주변에서는 파격적이라고 하는데 이사장님 본인 생각은 어떠십니까?”
“파격적이라…… 사실 저는 다른 곳에서 어떤 식으로 재단이 운영되는지까지는 알 수 없어서 우리 KM재단의 움직임이 파격적이냐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하기가 좀 곤란해요. 다만, 제 짧은 생각에는 만약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 재단과 다른 재단들과의 자금 조달 방식에서 차이가 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금 조달 방식이라면……?”
“우리 KM재단은 KM그룹 지주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5할 이상이 매년 적립금으로 들어오거든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회장님께서 별도의 개인 자산을 출연해 주시기로 하였으니 사업을 진행하면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일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타 재단에 비해서 자금력이 풍부한 편이죠. 그래서 하고 싶은 사업은 자금과 관계없이 진행하다 보니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강서영은 지상파 3사 중 하나인 KBC에서 진행하는 대담에 출연하고 있었다. 과거 기자 출신인 유명 아나운서인 석진일이 진행하는 대담 프로그램으로, 사회의 유명 인사들을 불러와서 개인의 생각이나 삶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대담 프로그램인지라 시청률이 그렇게 높게 나오는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촌철살인의 석진일의 질문이 날카로워서인지 방송 후에는 항상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등 영향력이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사실 예전에 강서영은 이런 인터뷰나 대담을 하는 것에 대해서 좀 꺼리는 마음이 있었다.
괜히 얼굴이 팔리는 것 같고, 혹시 사람들이 알아보면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 개인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강민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질문이 더 많았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이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KM재단의 이사장에 오르고 나서는 마음이 달라졌다. KM재단뿐만 아니라 많은 복지 재단에서 많은 좋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그런 내용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강서영은 언론 접촉을 크게 늘렸다. 언론에서 역시 혜성같이 나타난 KM그룹 회장의 동생인 강서영은 좋은 기삿거리였다.
더군다나 십수조 규모의 국내 최대, 세계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엄청난 복지 재단을 운영하는 사람이 이십대 중반의 젊은 여성이라는 것은 웬만한 연예인들보다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언론사와 강서영의 가진 생각이 맞아떨어졌기에 그녀가 취임 한 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10여 차례가 넘는 신문, 잡지, 방송 인터뷰를 진행했다.
물론 강서영이 이사장을 하기 전 유리엘 역시 비슷한 조건으로 이사장을 역임했고, 외모 역시 연예인들을 능가하는 외모였기에 언론에서 크게 관심을 가졌으나 유리엘 스스로가 언론 접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재단의 운영 역시 중요한 사항만을 체크 하였을 뿐, 대부분 시간을 마나 위성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기 때문에 재단 자체에 대한 이슈도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강서영은 재단의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여태껏 그녀가 생각만 해왔던 많은 복지 사업을 실제로 시행하였다.
취임한 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아직은 완전히 정착된 사업은 적었으나, 그 청사진만으로도 시민들과 언론의 관심이 뜨거웠다.
강서영의 대답에 앵커가 묻고 싶어 했던 내용을 잡은 듯 이어서 질문을 던졌다.
“그 부분도 많은 분이 궁금해하는 부분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많은 회사, 아니, 모든 회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요. 모든 회사에서는 수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고 수익을 적립해 재투자하는 데 반해, KM그룹에서는 이렇게 수익금의 반 이상을 재단에 기부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향후 사업을 추진하는 동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시각도 있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KM재단 이사장인 제가 답변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닌 것 같아요. KM그룹의 회장님께 직접 여쭤봐야 하는 사항이 아닐까요?”
“그렇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친동생인 이사장님은 회장님의 의중을 좀 아실 것 같아서 질문드립니다.”
“음……. 회장님의 생각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는 제가 속단해서 말씀드릴 수는 없으니, 제 생각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하, 그거면 충분합니다.”
“사실 지금 대기업들이 사내 유보금을 쌓아놓은 것이 작년 말을 기준으로 600조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결국 돈을 쌓아만 두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유보금을 줄이고 기부를 통해 사회에 그 돈이 다시 환원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 아닐까요?”
“그렇지만, 대기업들은 훗날 사업 참여에 적합한 상황이 왔을 때 적극적으로 자금을 투입하기 위해서 시기를 보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만.”
“물론 나중에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적립하고 있다는 말씀도 하시지만, 실제 연구 개발이나 시설 확대 등의 적극적인 사업으로 자금이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더군요. 대부분은 부동산 등에 투자해서 땅값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아,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말을 잇던 강서영은 문득 말이 공격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을 끊었다. 하지만 생방송으로 이어지는 대담이라 이미 가감 없이 그녀의 말이 전달되고 말았다.
석진일은 그녀의 말에서 좋은 이야깃거리를 잡았다는 듯 계속 질문을 던졌다.
“부동산 투자라고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최근 KM재단에서 서울 인근 경기도에 700만 평 규모의 토지를 구매한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명목은 보육 시설의 설립이라는 말이 있던데, 그 정도 규모의 토지가 필요할까요? 700만 평이라면 어마어마한 규모가 아닙니까? 이런 부지에 보육 시설이라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힘든데……. 결국 아까 전 이사장님이 말했던 다른 대기업들의 땅 투기와 비슷한 상황 아닙니까?”
석진일의 질문에 강서영이 지금까지의 온화했던 표정을 다소 굳히며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보육 시설의 설립이라는 것을 아신다면, 계획의 최종 목적도 아실 텐데 이렇게 말씀하시다니 재단의 의도를 오해하시는 건지, 역량을 낮추어 보시는 것인지 의문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