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현세귀환록
109. 회의(1)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남자의 전면에서 은은한 붉은 빛이 발생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얼굴을 확인할 만큼 충분하지는 않아 남자의 모습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남자는 통화를 하다 놀라운 말을 들었는지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반문했다.
“뭐? 앤더슨이 축출되었다고? 그럼 총재의 자리는 어떻게 되었나?”
-위원회에서 새로이 총재를 임명할 때까지 벤자민이 총재대리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음…… 그럼 앤더슨은 어떻게 되었나? 순순히 물러날 놈은 아니지 않나.”
-그게……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는데, 행방이 확인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다만 벤자민의 측근 사이에서는 퍼니셔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퍼니셔라는 말에 잠시 침묵을 하던 남자는 조용히 상대방에게 반문하였다.
“……사실인가?”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축출된 것으로 보아 죽거나 최소한 치명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흐음…… 아깝게 되었군. 그래도 꽤나 투자했던 녀석인데 말이야. 몇 년만 더 작업한다면 완전히 종속자로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일단 행방을 수소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너무 눈에 띄게 행동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앤더슨이 살아 있다면 우리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으니 찾을 필요도 없겠지. 쫓겨난 입장에서 갈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을 테니 말이다. 우선 벤자민을 예의 주시하고 있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으려던 남자는 말을 이으려는 상대방에게 물었다.
“또 다른 일이 있는가?”
-네, 유니온에서 관리하던 비약 제조실에 파견되었던 형제들에게서 다 연락이 끊겼습니다. 제조실 또한 폐쇄된 것으로 보아, 다 척살된 것 같습니다.
“여덟 군데 모두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앤더슨이 축출된 이유가 비약 때문인 건가……. 혹시 위원회에서 눈치를 챈 건가? 위원회, 아니, 올림포스와 루시페르의 움직임은 없나?”
-소수의 수뇌부라면 모르겠지만, 전면적인 움직임은 아직 없어 보입니다.
“그래? 위원회가 아니라면 소문대로 진짜 퍼니셔라는 건가? 흐음……. 관련 정보가 들어오면 지체하지 말고 바로 연락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앤더슨은 아깝게 되었군. 마스터급 종속자는 드문 케이스인데 말이야. 그래도, 대체할 재료를 구했으니 손해 본 것은 아닌가? 흐흐.”
어둠 속에 있는 남자의 앞에는 은은한 붉은 빛을 내는 관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관 안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관에서 발생하는 약한 붉은 빛이 밝지 않아서 관 안의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젊은이인지 노인인지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관에 누워 있지만 몸이 움찔거리면서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인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관 안에 있는 사람이 움직임이 커지면 커질수록 관의 붉은 빛은 그에 반응하듯이 더 강한 빛을 발하였다.
한동안 작은 움직임만을 보여서 관이 발하던 붉은 빛도 점점 옅어질 무렵, 갑자기 관 안의 사람의 가슴이 크게 튕기며 마치 일어나는 것과 같은 큰 움직임을 보였다.
동시에 관의 붉은 빛 역시 순간적으로 공간을 다 비출 수 있을 만큼 밝아졌다.
당연히 관 안에 있는 사람의 얼굴과 옷차림 역시 붉은 빛 속에서 드러났다. 그 사람은 도포를 입고 있는 70대 정도의 노인이었다. 바로 이극민이었다.
이극민은 핏자국과 찢어진 도포를 입고 있어 나카타와 대결한 직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전에 있었던 큰 움직임에 만족했는지, 관을 바라보던 30대 초반의 남자는 클클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크크. 이극민 가주, 이제 그만 포기하고 대법을 받아들이시지 그러오? 버텨봤자 소용없다니까. 크크큭.”
남자의 말이 들리는 것인지, 고통스러워하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이극민의 표정은 더욱더 구겨졌다.
그런 이극민의 표정을 보던 남자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하긴, 마스터의 자존심이 있는데 이렇게 쉽게 포기할 리 없겠지. 어쨌든 시간 문제니까 조만간 다시 봅시다. 이극민 가주. 하하.”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관에서 발하던 빛도 서서히 약해져 다시금 어둠이 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 * *
“다들 모이셨으니 회의를 개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임시회의를 개최하는 것은 쇼군이 사망한 이후로 처음이군요.”
의장이 위원회의 개회를 선언하였다. 위원회를 개최하는 장소와 위원 개개인의 모습은 전과 바뀐 것이 없었다.
여전히 어두운 수정구의 빛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밝지 않았고, 8인의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의 안건은 무엇이오, 의장?”
과거 나카타의 위원회 가입을 반대했던 성질 급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그 성정은 어디 가지 않는군요. 맹주. 오늘 안건은 유니온의 총재 교체에 관한 건입니다.”
맹주라 불린 사내는 유니온 총재 교체라는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앤더슨의 사망에 대해서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소식이 늦는지 의장에게 되물었다.
“총재의 교체라니? 앤더슨 총재는 어쩌고 말입니까?”
“앤더슨 총재에게 변고라도 있습니까?”
의장은 손을 들어 좌중의 시선을 끌어모은 후 질문들에 대답하였다.
“앤더슨 총재는 퍼니셔에 의해서 척살되었다고 합니다.”
역시 몇몇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처음 듣는 소식인 양 놀라워하였다.
“허…… 척살이라니…….”
“또 퍼니셔인가요?”
그런 반응을 예상이나 한 듯 의장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또 퍼니셔이지요. 다만, 이번에는 우리가 그에게 고마워해야겠더군요. 그가 아니었더라도 우리가 처리해야 할 일이었으니 말이죠.”
“고마워한다니, 그리고 우리가 처리해야 한다니 무슨 말입니까?”
“앞에 보고서를 보시지요.”
의장이 말을 함과 동시에 위원들의 각 테이블 위에는 홀로그램과 같은 스크린이 떠올라 왔다.
스크린이 광원(光源)이 되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각 위원의 모습 또한 드러났다.
불빛에 드러난 위원들은 다양한 인종, 다양한 나이, 다양한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위원들은 이미 이런 스크린 형태의 보고서에 익숙하였는지 자연스럽게 허공에 손짓하며 보고서와 첨부된 이미지를 읽어나갔다.
이 보고서에는 이번 앤더슨이 벌인 치료 센터와 비약에 관한 사건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앤더슨이 치료 센터를 개조해서 비약 생산 시설을 만든 것부터, 비약을 먹었을 때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지도 나타나 있었다.
부작용 역시 서술되어 있었는데 아직 영혼에 대한 정보가 적은지라, 비약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어 종국에는 광인이 되어버린다는 식으로 쓰여 있었다.
또한 지금은 유니온에서 모든 치료 센터와 비약 생산 시설을 다 폐쇄했다는 보고 역시 첨부되어 있었다.
대강의 내용을 알고 있는 위원들도 있었지만, 이런 구체적인 보고서는 보지 못했었는지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가며 보고서를 읽었다.
“음…… 앤더슨이 과한 욕심을 부렸군요.”
보고서를 다 읽었는지 파라오의 가면을 쓴 남자가 신음성을 내며 말했다.
스크린이 나타나면서 생긴 불빛 덕분에 지금 위원회의 위원들의 모습이 어느 정도 드러난 상태였지만 이 남자는 가면을 쓴 상태라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연륜이 적지 않은 나이임을 짐작하게 하였다.
파라오 가면의 말이 끝나자 그의 옆에 있던 인도 전통 복식인 쿠르타를 입은 중년인도 보고서를 다 읽었는지 입을 열었다.
“보고서대로라면 아까 의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퍼니셔가 우리가 할 일을 대신했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앤더슨이 뒤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의 말이 끝나자 옛 중국의 무복(武服)을 입은 호랑이 눈을 가진 중년의 동양인 맹주가 말을 받았다.
“그래서 내가 애초에 앤더슨 그자가 유니온의 총재가 되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오. 뭔가 뒤가 구려 보였거든. 흥!”
그의 말을 상석에 앉아 있는 의장이 받았다. 의장은 흰색 로브를 입은 70대 백인 노인으로 맹주라 불리는 동양인 사내를 타이르듯 말했다.
“어찌 되었든 맹주 역시 거부권까지는 행사하지 않았잖소. 이제 와서 잘잘못을 가린다는 것은 우스운 일일 것이오.”
의장의 말이 맞는지 맹주라 불린 사내 역시 반박은 하지 않았다. 다만, 화제를 전환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앤더슨이 잘못을 해서 축출당한 것까지는 이해하겠소. 그럼 의장은 유니온의 새로운 총재를 퍼니셔로 하자는 것이오?”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의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퍼니셔는 앤더슨을 처리하고 다시 사라졌다 하는군요. 새로운 총재는 부총재였던 벤자민을 올리려고 하오.”
벤자민이라는 말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벤자민은 아직 마스터급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랬었죠, 저번 달까지는 말이오. 지금은 어엿한 7서클 마법사가 되었다오. 저번 주에 우리 올림포스로 와서 인증도 받은 사항이요.”
의장의 말에 궁금증이 해결되었는지 검은 로브의 사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검은 로브와 마찬가지로 의문을 갖고 있던 쿠르타를 입은 중년인도 동의를 표시했다.
“벤자민이 S급이 되었다면야…….”
물론 반대하는 의견 또한 있었다. 파라오 가면을 쓴 사람이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그래도 이제 갓 S급이 된 벤자민에게 유니온을 맡길 수 있겠소?”
“하지만, 지금까지 앤더슨과 함께 유니온을 운영해 왔으니 잘할 수 있지 않겠소?”
여기저기에서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각자의 의견이 다르기에 당연한 상황이었다.
얼마간의 의견 교환을 지켜보던 의장이 손을 내저어 좌중을 정리했다.
“대략 이야기들을 나누셨으니, 표결에 붙이겠소. 벤자민이 총재가 되는 것에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시오.”
의장의 말이 끝나자 하나둘씩 손이 올라왔다. 굳이 비밀투표를 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8명 중에서 5명의 손이 올라왔다. 거수된 숫자만 본다면 당연히 통과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임위원에게는 거부권이 있었다.
의장은 손을 올리지 않은 사람 중 유일하게 거부권을 가진 무복의 중년인에게 물었다.
“맹주, 이번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오?”
거부권이라는 말에 맹주는 짙은 눈썹을 한번 찡그리더니 대답했다.
“끙…… 거부권까지는 아니오. 딱히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오. 그런데 이렇게 된다면 전에 앤더슨 때랑 다를 것이 없군. 그때도 반대는 했지만, 거부권까지 행사한 것은 아니니…….”
의장은 다시 맹주를 달래며 말했다.
“맹주 역시 맹주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소, 대안이 없다고 말이오. 벤자민이 마스터에 오르지 못했다면 별도의 인물을 선발해야 할 것이고, 각 세력에 속하지 않은 마스터급 인물은 구하기도 힘들 것이오. 오랜 경험이 있고 이제 마스터에도 오른 벤자민을 한번 지켜봅시다, 맹주.”
“흠, 의장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알겠소, 의장. 동의하는 것으로 하지요.”
“그럼 벤자민의 총재 건은 가결된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 안건으로 넘어갑시다.”
두 번째 안건이라는 소리에 깔끔한 검은 정장을 입은 30대 장년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두 번째 안건도 있습니까, 의장님?”
“로드라고 다 아는 것은 아니군요, 허허.”
“비록 우리 혈족들이 많은 곳에 퍼져 있지만, 마법사들의 정보력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과한 겸손이시오. 혈족들의 능력을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다만 이번 안건은 벤자민이 퍼니셔에게 들은 사항에 내용이라 로드가 알기 힘들었을 것이오.”
“이번에도 퍼니셔인가요.”
“그렇소, 이것도 퍼니셔에게서 나온 정보요. 차원 교차에 관한 내용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