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현세귀환록
106. 소문(2)
한참을 강민의 품에 안겨 울던 강서영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집무실에 있는 접견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아직도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강서영이 무언가 이야기하려고 하자, 강민이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다 알고 있으니까,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돼.”
강민의 말에 강서영은 놀라며 물었다.
“오빠가 어떻게……?”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을 강민이 모를 리 없었다.
다만 다른 소문들처럼 금세 시들해질 것으로 생각하고 별도의 대응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단순한 소문에 점점 살이 붙으면서 커졌고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마 인터넷에 올라온 글이 파급력을 더 했던 것 같았다.
처음에는 단지 최강훈이 강서영을 꽂아줬다는 소문이었는데, 며칠이 지난 지금은 강서영이 꽃뱀처럼 최강훈을 유혹했다는 식의 소문이 나버렸다.
최초 유포자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이 정도쯤 되자 최초 유포자를 색출하여 처리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뚜렷한 반박 증거가 없다면 어차피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을 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지만 소문이 불어남에 따라 강민 역시 따로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강서영에 대한 이런 소문이 퍼진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의 시기심이었다.
회장을 후견인으로 둔 전도유망한 젊은 이사의 애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질투를 샀던 것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속해 있던 기획실에서는 강서영의 평소 모습과 성품을 알기에 이런 소문을 그리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부서에서는 완전히 기정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곳도 있었다.
“다 아는 수가 있어.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강민의 물음에 강서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일단 며칠 쉬려고, 아무래도 지금 들불처럼 일어난 소문이 가라앉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어차피 헛소문이니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들겠지.”
“과연 그럴까? 악의적인 유포자가 있는데 또 다른 악성 루머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그, 그건…….”
“그리고 시간 좀 지난다고 하더라도 지금 네게 씌워진 불명예는 벗겨지지 않을 거야. 단지 앞에서는 말하지 않겠지만, 뒤에서 쉬쉬거리면서 계속 뒷담화의 주제가 되겠지.”
강서영은 강민의 말에 잠시 대화를 멈추고 생각을 하였다. 그녀의 생각에도 강민의 말처럼 될 가능성이 컸다.
시간이 지나도 단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뿐이지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그녀 역시 이런 오명이 달갑지는 않았다. 그녀가 호인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악질적으로 자신을 음해하는 사람까지 허허 웃고 넘길 만큼 마냥 좋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자신이 강구한 방법을 강민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럼 최초 유포자를 찾아서 헛소문임을 밝히고, 공개적인 사과를 받으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이런 소문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만일 강서영의 말처럼 최초 유포자를 밝혀 그 사람의 공개 사과가 이루어진다면 그녀의 오명은 벗을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의 평소 행동을 보았을 때 동정의 여론이 생길지도 몰랐다.
강서영의 말에 강민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강민의 침묵을 동의라고 생각했는지 강서영은 말을 이었다.
“물론 최초 유포자를 찾기 힘들 긴 하겠지. 그렇지만 경찰 수사를 통한다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강민의 생각은 달랐다.
“최초 유포자는 이미 찾았어. 그리고 당연히 그에 따른 합당한 처벌을 할 예정이고. 지금 말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
“찾았어? 그리고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니 무슨 소리야?”
“이제 네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가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다는 거야. 어떻게 생각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면…….”
“일반 직원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도 충분히 했고, 이런 일까지 벌어졌는데 굳이 일반 직원으로 있을 필요가 있을까? 이제는 원래 계획 했던 대로 재단 이사장을 맡아봐.”
강서영에 대한 소문이 났을 때부터 생각했던 일이었다. 이런 소문에 흔들릴 정도로 그녀의 위치는 취약한 것이었다.
이제 이런 소문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자리로 갈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녀가 동의한다는 전제에서 하는 말이었다.
“아…….”
강서영은 뜻밖의 말에 말을 잇지 못하였다.
사실 그녀는 3년간 일반 직원으로 일하면서 재미도 있었고 적성에도 맞았기에, 이사장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고 있지 않았다.
강민 역시 그녀가 재미있게 일을 하고 있었기에 별도로 권하지도 않았었다. 어차피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주는 것이 강민이 바라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이런 오명을 벗지 않고서 전처럼 일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있어도 돼. 당연히 이런 소문은 싹 없어지게 할 수도 있고 말이야. 다만, 이제는 일을 배운다는 목적도 달성했으니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봐.”
강민의 말을 들은 강서영은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회장실에 올라왔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될 줄은 몰랐었다. 그냥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며칠 정도 쉴 생각이 다였다.
하지만 이사장이라는 말을 다시 들은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짧지 않은 침묵이 그들 사이에 흘렀고 강서영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래, 한번 해보자. 그간 기획실에서 수익성이 없어서 포기했던 사업들도 거기서는 해 볼 수 있을 거야.’
강서영은 기획실에 처음 발령받은 이후 원래 그녀가 하고 싶었던 사회 공헌 사업을 신규 사업 안건으로 올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업들은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기각되었고, 약간 실망하기도 하였다.
물론 지금은 그녀 역시 그런 수익성이 없는 사업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회사의 최우선적인 가치는 수익의 창출을 통한 사업체의 유지 발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재단은 달랐다. 애초에 사회 공헌을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이기 때문에, 그런 사업들을 주도적으로 실행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번에 생긴 악성 루머가 그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단지 그 소문 때문이라면 강민이 말한 대로 소문에 대한 처리만을 부탁했을 것이다.
이제 그녀의 머릿속에는 소문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새로운 일에 대한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빠, 나 해볼게.”
강서영의 결심에 찬 표정을 본 강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이번 주는 쉬고, 다음 주부터 유리한테 인수인계받도록 해. 장 실장에게는 내가 말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니야. 그래도 상사로 모셨던 분인데, 내가 말할게.”
“어차피 이사장 이야기를 하려면 내가 별도로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래, 너도 따로 이야기해 주렴.”
“근데 다른 직원들한테는 어떻게…….”
“어차피 오늘 중에 사내 공고 올릴 거니, 네가 별도로 말하지 않아도 될 거야.”
“……사람들이 자기들을 속였다고 배신감 느끼지 않을까?”
강서영은 그게 걱정이었다. 나름 잘 행동해왔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제 회장의 동생임이 알려지게 된다면 다른 직원들이 보기에는 여태까지의 행동이 다 가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소문에 휩쓸려 너를 오해하고 섣불리 판단한 사람들이라는 거야. 굳이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잘 보이려 할 필요는 없어.”
“그런가…….”
“그래, 지금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은, 나중에라도 네가 내 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네가 어떤 행동을 하고 삶을 살아왔든 배신감을 느낄 거야. 굳이 그런 사람들까지 고려해서 네 판단을 제약하지 마. 다만 정말 가깝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배려 차원에서 미리 알려주는 것도 괜찮겠지.”
“그래, 알겠어. 고마워, 오빠!”
“고맙기는. 어차피 네가 갈 자리에 네가 가는 건데.”
애초에 회사를 만든 것 자체가 그녀 때문이었기에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강서영은 다시금 강민에게 아버지와 같은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강민과 이야기를 마치고 회장실에서 나온 강서영은 곧바로 실장실로 들어갔다.
장태성은 그사이에 강민에게 연락을 받았는지 강서영이 오자마자 자연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이제 가신다면서요?”
“오빠가 벌써 이야기드렸나 봐요?”
“네, 조금 전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도 그 소문을 듣긴 했었는데 그거 때문인가요?”
장태성 역시 강서영에 대한 소문을 듣긴 했다. 강서영이 강민의 동생임을 알고 있는 그는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소문임을 알았으나, 아직 어린 강서영은 그런 소문에도 상처를 입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였다.
그래서 지금 그녀의 결정이 이 소문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그……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닌데, 복지 재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것 같아서요. 그쪽 일을 한번 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렇군요. 여튼 업무 인수인계까지 굳이 신경 쓰지 마세요. 회장님 말씀으로는 다음 주부터 이사장 자리를 맡으실 거라던데, 그거 인수인계받기도 빠듯할 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하던 일은 제대로 인계하고 가야죠. 어차피 큰일들은 없어서 오늘 정도만 하면 급한 현안들은 다 인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어차피 같은 건물에 있으니 나중에라도 알려줄 수 있을 테고요.”
“이사장님이 인계하러 온다면 다들 놀라겠군요. 허허허.
“그런데 누구한테 인계하면 될까요?”
잠시 생각하던 장태성은 한 명을 지목하며 입을 열었다.
“음…… 장 대리한테 하시면 될 것 같네요.”
“장찬영 대리 말씀이지요? 잘됐네요. 어차피 장 대리님한테는 먼저 알려주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장 실장님도 대단하시네요. 장 대리님이 아드님이신데 아직 알려주시지 않았다니 말이에요.”
장태성 실장은 강서영이 강민의 동생임을 아들인 장찬영에게도 비밀로 하고 있었다. 강서영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들이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지요. 이 장태성 그렇게 신의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허허허.”
* * *
“장 대리님, 잠시 커피나 한잔해요.”
실장실을 나온 강서영은 장찬영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장찬영은 아까 전까지 어두웠던 강서영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진 것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녀와 함께 휴게실로 갔다.
“오빠, 나 할 말이 있어.”
“무슨?”
“나 기획실 일 그만두게 되었어. 장 실장님께 말씀드리니 오빠한테 인수인계하라고 하시더라고.”
갑자기 일을 그만둔다는 강서영의 말에 장찬영은 뜨악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야. 너, 소문 때문에 그러는 거야? 기분 나쁜 소문이긴 하지만 곧 사그라들 거야. 이런 일로 회사까지 그만둬야겠어? 다시 한번 생각해 봐!”
“회사를 그만두는 건 아냐. 기획실 일을 그만두는 거지.”
다시 생각해 보니 강서영은 분명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기획실 일을 그만둔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부서이동 아니면 계열사 전출인데, 장찬영의 생각으로는 지금 상황에서 부서 이동은 의미가 없을 테니, 전출일 가능성이 컸다.
“그럼……. 아, 타 계열사 전출인 거야? 하긴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 어차피 여기서는 안 좋은 소문이 퍼졌으니……. 근데 그렇게 되면 그 소문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소문인데 그런 소문 때문에 그룹의 핵심인 우리 기획실에서 나가는 건 아깝지 않아?”
장찬영은 능력 있는 강서영이 이런 소문 때문에 기획실에서 나가 다른 계열사로 간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타 계열사이긴 하지, KM재단으로 가. 거기 이사장으로.”
“KM재단이면 나름 중요 계열이긴 한데……. 응? 뭐? 이사장이라고??”
“그동안 오빠한테 말 못 해서 미안해. 사실 회장님이 우리 오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