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현세귀환록
104. 징벌(3)
딱~!
유리엘이 손가락을 튕기자 숨이 끊어져 추락하는 앤더슨의 몸이 금세 불타올라 두 개의 작은 붉은 돌을 제외하고는 모두 재로 변해 사라졌다.
그 붉은 돌은 유리엘의 손짓에 따라 그녀에게 날아왔고, 유리엘은 그것을 갈무리하였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앤더슨의 최후였다.
앤더슨의 최후와 동시에 커다란 마나 유동이 강민 일행에게서 터져 나왔다. 정확하게는 벤자민에게서 나온 마나 유동이었다.
유리엘과 앤더슨의 전투를 뚫어지라 바라보던 벤자민은, 뜻밖의 깨달음을 얻었는지 앤더슨의 죽음과 동시에 갑작스러운 마나 유동을 발하며 새로운 경지로 발을 디디고 있었다.
이십여 년이 넘게 6서클에서 머물러 있던 벤자민이, 6서클의 벽을 넘어 7서클에 들어선 것이었다.
7서클 마법사라면 무투형 능력자가 마스터에 오른 것과 비슷한 정도의 경지였다. 실제로 유니온에서는 7서클 마법사는 S급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벤자민은 아직 마나를 갈무리하고 있는지 눈을 감은 채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그런 벤자민을 보던 유리엘은 강민에게 말했다.
“마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더니 결국 넘어 서는군요.”
“그래, 이미 그는 티핑 포인트에 서 있어서 계기만 있으면 넘을 수 있었지. 유리의 마법이 그 계기가 된 것 같군.”
강민은 쉽게 말을 하였지만, 그 계기를 찾지 못하여서 무수히 많은 A+급 능력자들이 결국 마스터에 오르지 못하고 생명이 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벤자민 스스로도 마스터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미 20여 년간을 노력했지만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몇 년간 퍼니셔가 펼쳐놓은 인식 장애 마법을 연구하면서 크고 작은 깨달음이 있었고, 조금만 연구를 더 한다면 어쩌면 7서클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요원한 일이었다. 다만 일말의 희망을 잡았기에, 7서클에 대한 열망이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부분이 있었다. 마법 체계가 달랐기 때문에 특정 부분에 사용한 마나 흐름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만 해결하면 퍼니셔가 펼쳐놓은 인식 장애를 일부나마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어쩌면 7서클에도 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부분은 벤자민의 상식, 아니, 이 세계 마법 체계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일반 세계의 상식에 빗대어 말하자면 물로 종이를 태우는 것처럼, 불 속을 수영하는 것처럼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에서 막힌 이후로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그의 기준으로는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으니 구현도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벤자민은 유리엘의 마법을 보았다. 만약 그녀가 고서클의 마법만을 사용했다면 벤자민은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을 것이나, 그녀는 1서클의 기초마법인 매직 미사일을 사용했다. 그것도 수천 수만 발의 매직 미사일을 사용했다.
아무리 유리엘의 마법이 이곳의 마법과 궤를 달리한다지만, 1서클의 매직 미사일 정도의 마나 패턴을 파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 역시 6서클의 마법사였기 때문이었다.
유리엘이 엄청난 양의 매직 미사일을 여러 차례 사용하는 것을 지켜보던 벤자민은 무언가가 트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인식 장애 마법 역시 유리엘의 마법이었기에 같은 마법 체계를 공유하는 마법에서 일맥상통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느낌은 앤더슨을 감싸던 화염 구체가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것을 보면서 극에 달했고, 어느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세계의 마나가 그에게 손짓하는 것이 느껴졌다. 벽을 넘은 것이었다.
벽을 넘는 동안 아른아른거리는 마나의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의 모양이, 바람의 움직임이, 자연의 섭리가 손에 잡힐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 느낌은 순간에 불과했고, 눈을 뜬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느낌은 강하게 남아 있었고 그것을 반증하는 듯, 지금은 저서클 마법은 무영창으로 손쉽게 발현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벤자민이 고민했던 부분들이 지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이제는 마치 위에서 아래로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서 과거 고민했던 자신이 우스워질 정도였다.
벤자민은 진정 벽을 넘어 7서클의 마법사가 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마스터의 죽음이, 다른 마스터를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었다.
* * *
앤더슨이 머물던 집무실에는 벤자민을 포함한 강민 일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벤자민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유리엘이 이리로 데려온 것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기운을 수습한 벤자민에게 강민이 말했다.
“어떠냐? 벽을 넘은 기분이.”
“묘한 느낌이군요. 7서클 마법사, 아니, 마스터들은 이런 흐름 속에서 있었던 것이군요.”
벤자민은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마나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묘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그가 알기 전에도 이런 흐름은 있었고, 그 역시 어느 정도는 이런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알게 된 지금 보이는 마나의 흐름은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문득 마스터들이 마스터가 되지 못한 능력자를 보는 시선이, 이능력자가 일반인을 보는 것과 같은 시선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쨌든, 잘 되었군. 네가 7서클이 되었다면 굳이 내가 마스터급 능력자를 파견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야. 네가 총재의 자리에 오르면 되겠군.”
“아…….”
강민의 말에 벤자민은 자신의 상황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이제는 유니온의 이인자로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앤더슨의 실각을 위원회에 보고하고 자신이 총재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된 것 몇 가지 알려줄 것이 있다.”
“어떤……?”
7서클이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퍼니셔는 두려운 존재였다. 아니, 7서클이 되었기에 그들의 두려움을 더욱더 잘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벤자민은 조심스럽게 궁금증을 표시했다.
“우선 우리의 정체부터 밝히고 시작하지.”
강민은 유리엘에게 눈짓을 하였고 유리엘은 일행을 뒤덮고 있던 인식 장애 마법을 풀었다.
“헉! 당신들은…… 연금의 일족!”
이미 강민과 몇 차례 안면이 있던 벤자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벤자민이 알고 있는 강민과 유리엘은 연금의 일족이었다. 퍼니셔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벤자민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 어떻게……. 분명 마나 파문이…… 마나 파문이 달랐는데…….”
최초 일본에 퍼니셔가 나타났을 때, 유니온에서는 연금의 일족으로 알고 있던 강민과 유리엘을 의심했었다. 하지만 이능 세계의 지문과도 같은 마나 파문이 달랐기에 의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둘이 동일 인물이라니, 벤자민이 경악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마나 파문을 변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벤자민을 놀리듯 유리엘은 말했다.
“마나 파문 정도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죠. 이렇게 말이죠. 여기서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몇몇은 가능할걸요?”
유리엘은 수차례 마나 파문을 바꿔가면서 그에게 말했다.
“이런 것이 가능했다니…….”
“당신도 마스터가 되었으니 몇 가지 요령만 알면 바꿀 수 있을 거예요. 물론 그 바꾼 것을 찾아내는 기술이나, 찾는 기술에도 걸리지 않는 응용까지는 아직 힘들겠지만 말이죠.”
아직도 마나 파문 변조에 놀라고 있는 벤자민에게 강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가 무슨 이유로 우리를 연금의 일족이라고 추정하는지는 알겠지만, 우리는 그들과는 무관하다.”
“그럼 어떻게 그런 황금과 아공간을…….”
“그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다만 이렇게 정체를 밝히는 것은 앞으로 우리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차피 한수강과 유키가 강민의 보호 아래 들어왔고 마나 파문이야 변조를 하면 된다지만, 이미 둘의 외모나 DNA 등에 관한 정보는 유니온에서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마나 파문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유키와 한수강을 데리고 있는 이상 이번 일을 찬찬히 파고들면 결국 강민이 퍼니셔임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런 정보 역시 위변조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유니온의 수장을 손에 쥐고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기에, 굳이 한수강이나 유키의 정보를 변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더 번거로워지는 상황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지금 말했듯이 유니온에서 강민을 연금의 일족으로 오인하고, 지속적으로 방문하여 귀찮게 하는 것을 피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벤자민은 강민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섣불리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조금 전 확인했듯이, 강민과 유리엘은 마스터급의 강자라도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괴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퍼니셔가 연금의 일족이고 이들이 이렇게 정체를 밝혔다면 향후 유니온과 위원회 사이의 대립에서 유니온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추측한 대로 퍼니셔는 이런 굳이 지배하거나 군림하려는 성격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만일 이들이 유니온의 편에 서서 위원회의 괴물들만 처리해 준다면, 유니온의 독립, 아니, 유니온이 이능계 전체를 장악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벤자민의 생각을 읽었는지 강민이 그에게 이야기했다.
“지금도 위원회와 대립해서 이능 세계의 장악 운운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제 그럴 시간이 없다.”
갑자기 시간이 없다는 말에 벤자민은 의아했다.
“무슨 시간 말씀이신지……?”
“길어야 5년 정도 뒤면 차원 교차가 일어난다. 차원장의 통합은 좀 더 걸리겠지만, 마나장은 5년 정도면 통합될 거야.”
뜬금없는 강민의 말을 벤자민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이쪽의 지식이 없는 벤자민은 강민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마나장은 알겠지만, 차원 교차는 뭐고 차원장은 뭡니까? 그리고 마나장이 어디랑 어디가 통합된다는 것이지요?”
“차원 교차는…….”
벤자민을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려면 최소한의 설명은 필요했기에 강민은 대강의 설명을 해줬다.
한참 동안 강민의 설명을 듣던 벤자민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강민의 말대로라면 정말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최근 웜홀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도……?”
“그래 마나장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방증이지. 실제로 비슷한 마물이 많이 나오지 않던가?”
“그것도 이 영향입니까?”
정말 그랬다. 과거에는 비슷한 마물은 극히 드물게 나타났고, 대부분의 마물이 다른 형태와 마나 성질을 갖고 있었다. 마물마다 마나 충돌의 불꽃이 달랐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비슷한 마물이 많이 나오고 있어서, 현재는 마물을 분류하여 코드 네임을 부여하고 마물에 따른 대처 매뉴얼까지 만들고 있었다. 또한 마물들의 마나 충돌도 현저히 약해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 과거처럼 전혀 다른 차원에서도 웜홀이 발생하기는 하겠지만, 앞으로는 대부분 교차할 차원에서 마물이 넘어올 거야. 그리고 그쪽 차원의 마물 혹은 문명의 수준에 따라서 이곳의 문명이 지켜질지 아니면 사멸할지가 결정되겠지.”
“길어야 5년이라고 하셨는데, 좀 더 정확한 시간은 알 수가 없겠습니까?”
이제 유니온의 수장이 될 벤자민의 입장에서는 디데이를 알고 준비를 하고 싶었다.
“차원 교차에는 변수가 많지. 이 차원의 변수는 대부분 알 수 있지만, 그쪽 차원의 변수는 여기서 파악할 수 없으니 알 수가 없는 노릇이지. 만일 그쪽 차원에서 변수가 발생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마나장이 통합될 수도 있지. 5년은 두 차원 다 별다른 변수가 없이 이대로 진행되었을 때를 가정한 것이다.”
“음…….”
벤자민은 무거운 표정으로 신음성을 내었다. 강민의 말대로라면 지금 유니온과 위원회의 싸움은 너무도 허망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내가 위원회를 두고 보고 있는 것도 이것 때문이지. 굳이 위원회를 처리해서 나중에 있을 차원 교차에서 인간들을 지킬 힘을 뺄 필요는 없으니 말이야.”
벤자민은 위원회를 처리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강민의 말에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강민과 유리엘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위원회의 괴물들도 그 못지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괴물들은 7서클에 오른 지금도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그 정도가 벤자민의 안목이었다. 강민과 유리엘은 기세를 갈무리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벤자민은 둘의 무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느 누구도 그들의 무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강민은 벤자민의 내심이 짐작이 갔으나 굳이 그것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또한, 차원 교차에도 강민이 나서면 인류를 지킬 수 있다는 말 또한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었으니 말이었다.
벤자민이 어떻게 위원회에 이 사실을 전달할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정도 조치만으로도 앞으로 유니온과 위원회의 대립은 없을 것이었다. 이제 살아남기에도 힘든 시간이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