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현세귀환록
101. 구출(5)
지금 유리 원통에 있는 사람들이 움찔거리고 있는 것은, 마법적인 자극을 통해 체내의 혈액과 진혈을 빼내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고통 때문이었다.
유니온에서는 의식이 없는 혼수상태라면 통각이 느끼지 못해 관계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영혼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었다.
식물인간의 혼수상태이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영혼이 있었다. 그리고 뱀파이어로 변이 중인 이들의 생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진혈을 뽑아내는 것은 그 영혼에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 고통은 살을 저며내고 뼈를 끊어내는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처절하고 극악한 고통이었다.
제물이 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죽음뿐일 것이다. 죽음만이 이 지옥과도 같은 고통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지금도 강민과 유리엘에게는 피실험자들이 내뱉는 영혼의 울부짖음이 너무도 잘 들리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상태로는 오래 살 수가 없었다. 생명 유지 장치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생명의 원천이라는 진혈이 소진되고 있었기 때문에 짧으면 6개월, 길어야 1년 정도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지상에 있는 센터에서 관리하고 있는 환자들은 이들이 죽고 나면 교체되는 여분의 재고와도 같았다.
한수강이 들은 말에 따르면 다음번이 유키가 들어갈 차례였다. 만일 강민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유키가 이런 취급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니 한수강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강민과 유리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통제실 가운데 콘솔에 붙어 있는 각종 계기판이 점점 더 요동을 쳤고, 램프의 불빛 또한 더욱 강렬해졌다.
무언가 사달이 난 것이 틀림없었다.
아까 지상에서 강민이 발을 굴렀을 때, 그는 단지 결계만을 파훼한 것은 아니었다. 지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두운 기운의 마법까지 함께 날려버린 것이었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마법적인 평형을 유지하고 있던 각종 기구가 오작동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 불빛들을 보던 유리엘이 강민에게 말을 건넸다.
“이미 저들은 틀린 것 같네요.”
유리엘이 틀렸다는 것은 육체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육체의 손상은 얼마든지 복원하고 치료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영혼이 파괴되어 있었다.
“그래, 이미 영혼이 반쯤 파괴되어서 육체를 구해준다고 해도 인간도 뱀파이어도 아닌 몬스터에 가까운 존재가 되고 말겠지.”
“영혼에 대한 이해도 없는 자가 이런 일까지 벌이다니. 이 일을 벌인 자는 저승으로 간다면 죽음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겠군요.”
“자업자득이겠지. 일단 저들은 보내줘야겠군.”
“그래요. 너무 힘들어하네요. 어서 보내줘요.”
강민의 몸에서 순간적으로 강렬한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라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몸에서 빛이 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빛이 발했다가 사라졌지만 주변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옆에 있던 벤자민조차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마스터의 경지에 있는 최강훈은 50여 개의 유리 원통에서 느껴지던 생명 반응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 최강훈이 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원통 속에서 고통받던 영혼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은 강민과 유리엘만이 볼 수 있었다.
아마 누군가가 원통 속의 시체를 보았으면 지금까지 고통스러운 표정만 하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껏 짓지 못하던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었다.
영혼들을 승천시킨 강민은 벤자민을 돌아보고 말을 건넸다.
“이제 정리해 보자. 벤자민, 너도 알아볼 수 있겠지?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말이다.”
강민의 말에 벤자민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곳에 와서부터 지금까지 벤자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유니온의 부총재이지만 이런 실험실과 실험 장비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 장소가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마나 공학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실험실의 장비와 콘솔의 화면에 떠오른 정보 등을 보다 보니 구체적인 원리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곳이 무슨 용도로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인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컨베이어 벨트 위에 있는 작은 알약들을 보니 지금까지 궁금했던 비약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총재인 앤더슨에게 어디서 비약을 가져오는지 몇 차례 물어보았지만 가문의 비밀이라는 식으로 말했기에 구체적으로 물어볼 수 없었던 그 비약의 출처가 이곳이었다.
으드득…….
벤자민의 입이 굳세게 다물어지며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우리…… 우리 요원들을 이렇게 희생시키다니……. 앤더슨…….”
벤자민이 상황을 파악한 듯하자 강민은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네가 앤더슨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
앤더슨은 상대한다는 말에 벤자민의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유니온의 유일한 마스터인 앤더슨을 상대할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가 상대할 수는 없겠지요. S급의 강자인 앤더슨을 처리하기에는 제 역량이 떨어집니다. 위원회에 보고해서 처리할 생각입니다.”
위원회의 위원 중에서는 앤더슨도 두려워하는 괴물들이 있었다. 그 괴물들이 나선다면 마스터인 앤더슨도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벤자민의 말에 강민이 의문을 표시했다.
“그렇게 된다면 유니온에서 바라던 위원회로부터의 독립은 이제 완전히 포기하는 건가?”
지금도 인식 장애 상태였기에 벤자민은 강민의 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니온이 위원회로부터 독립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퍼니셔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체념한 듯 털어놓았다.
“유니온이 독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능력자들을 위한다는 유니온의 기본 가치조차 지키지 못하는 총재를 두고 위원회에서 독립해 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강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벤자민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스터 하나 없이 유니온을 이끌어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입니다. 아마 앤더슨을 처리하고 나면 위원회에서 마스터 급의 강자를 새로운 총재로 내려보내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이제 유니온의 독립은 거의 불가능해지기는 하겠군요…….”
몇십 년간 유니온의 독립을 위해서 힘썼던 벤자민은 더 이상 독립을 추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큰 허탈감이 느껴졌다.
앤더슨은 최초 유니온이 성립될 때 위원회와 담판을 지어서 총재가 된 인물이었다. 그래서 위원회에 끌려다니지 않고 적당한 거래와 대립으로 독립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앤더슨을 처리하고 위원회에서 별도로 선발한 사람이 총재로 내려온다면 더 이상 유니온의 독립성을 지키기는 힘들 것이 자명했다.
그렇다고 마스터 하나 없이 유니온을 운영할 수도 없었다. 위원회와의 대립은 둘째치고 A급 요원들도 상대하기 힘든 S급 마물이 출현할 경우 마스터의 힘이 분명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항마 무구의 재료가 되었던 S급 마물도 앤더슨이 나서서 잡지 않았던가. 물론 지금은 그때 만든 항마 무구가 있어서 마스터를 상대할 수도 있지만, 항마력이 듣지 않는 S급 마물이 출현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마스터는 꼭 필요하였다.
또한 유니온의 위상 문제도 있었다. 위원회야 아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집단이지만, 유니온은 표면적으로 이능계를 장악하고 있는 단체였다.
그런 대표적인 단체에서 마스터 하나 없다는 것은 그 위상이 상당히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위상이 낮다면 다른 이능력자들을 통제하는 일도 쉽지가 않을 것이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마스터는 필수적인 존재였고 현재 유니온에는 그런 마스터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은 위원회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벤자민의 말에 강민은 충분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상황이라면 유니온은 완전히 위원회의 하수인이 되고 말 것이었다.
유니온은 향후 차원 교차가 발생했을 때 이능력자와 일반인 간의 가교가 될 수 있는 의미 있는 존재였다.
실제로 지금도 유니온의 국가별 각 지부는 그 국가의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마물을 처리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최근 웜홀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상황에서 유니온이 힘을 잃게 된다면 일반 세계의 혼란은 가속화될 것이었다.
물론 위원회에서 유니온을 없애려 하지는 않겠지만, 위원회의 위원들은 자신들의 소속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세상의 안정보다는 각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일 가능성이 컸다.
차원 교차의 날까지 유니온이 지금처럼 유지되는 것이 나중의 혼란을 그나마 줄이는 방법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강민이 벤자민에게 말했다.
“만약 내가 앤더슨을 처리해 준다면 어떻게 하겠나?”
“아…….”
벤자민의 판단에 퍼니셔라면 충분히 앤더슨에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마스터급에 오른 지 오래된 쇼군과 A+급 수뇌부를 한 번에 처리한 퍼니셔라면 앤더슨도 어렵지 않으리라.
잠시 생각을 하던 벤자민이 강민에게 물었다.
“그럼 앤더슨을 처리하고 퍼니셔 님이 총재가 되실 생각입니까?”
“아니, 그런 귀찮은 자리까지 맡을 수는 없지.”
강민의 말에 실망한 표정으로 벤자민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위원회에서 내려보내는 마스터급 인물을 새로 총재로 들여야 하겠지요. 그럼 결국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를 대신할 수 있는 마스터를 한 명 보내주지.”
강민의 말이 끝나자 유리엘의 심어가 들려왔다.
[강훈이를 보낼 생각이에요?]
[그래, 일단 유니온 내부에서 마스터가 나올 때까지 보내두는 거지.]
[음…… 그래도 총재라는 자리는 위원회와 정치 싸움을 해야 할 텐데 강훈이가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위원회에는 강훈이가 상대하기 힘든 능력자들도 있을 텐데 말이에요.]
[일단은 퍼니셔의 이름으로 경고를 해 줄 생각이야. 어차피 길어야 5년이야. 5년 정도면 차원 교차가 시작 될 거고, 차원장은 조금 더 걸리더라도 최소 마나장 정도는 통합되겠지. 그렇게 된다면 그런 이전투구를 할 시간 따위는 없을 거야.]
[하긴 그렇겠네요. 살아남기에도 바쁜 시간이 될 테니 말이에요.]
강민과 유리엘이 심어를 나누는 동안 벤자민의 머릿속도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스터를 내준다라. 그의 수하가 있다는 이야기 같은데, 지금까지 본 퍼니셔의 성향상 유니온의 운영에 직접 개입할 가능성은 작았다.
결국 앤더슨을 처리하고 그 자리를 대신할 마스터까지 생긴다면, 유니온은 지금과 같은 시스템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남은 문제는 하나밖에 없었다. 총재 교체에 따른 위원회의 승인이었다.
유니온의 창설 이래 지금까지 총재를 맡고 있는 앤더슨이었기에 아직 총재가 바뀐 전례는 없었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 총재를 바꿀 것인지에 관한 규정이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다.
다만 위원회의 의결을 통해서 창설된 유니온의 특성상 총재가 변경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위원회의 승인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사전승인이 되든 사후승인이 되든 말이다.
‘일단 비약과 실험 장비들을 증거로 제출하면 앤더슨의 실각은 당연한 일일 것인데…… 앤더슨을 퍼니셔가 처리하고 그의 부하를 총재로 앉히는 것에 위원회의 승인을 받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겠군…….’
강민은 벤자민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강민의 눈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벤자민의 생각은 끝나지 않았다.
‘퍼니셔의 부하라…… 괜찮을까? 그래도 확실히 위원회에서 내려오는 총재보다는 간섭이 덜 하겠지……. 위원회는 어떻게든 유니온을 뜯어먹을 생각만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