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100화 (100/203)

# 100

현세귀환록

100. 구출(4)

벤자민의 말에 유리엘이 반색하며 말했다.

“호오, 그때의 인식 장애와 이 인식 장애를 뚫고 알아봤을 리는 없고 마나 파문을 확인한 건가? 알아볼 수 있도록 약하게 재밍(Jamming) 하긴 했어도, 이렇게 빨리 알아차릴줄 몰랐는데?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실력인데 안목은 꽤 좋은가 봐?”

이것은 유리엘의 과대평가였다. 벤자민은 재밍된 마나 파문을 확인해서 알아차린 것이 아니라 인식 장애의 수준 자체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추측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추측이 맞아떨어졌던 것뿐이었다.

유리엘이 벤자민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강민은 다시 한번 그의 성향을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벤자민에게는 이런 짓을 할 정도의 악한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벤자민,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하던 벤자민은 강민의 말에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당연히 강민의 얼굴 역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갑작스러운 강민의 말에 벤자민은 당황하며 말했다.

“무, 무얼 말이오?”

퍼니셔라면 마스터에 오른 헤이안의 쇼군과 A+급으로 이루어진 수뇌부들을 한순간에 도륙해 버린 인물이다. 6서클 마법사에 불과한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리는 말투가 나와버렸다.

그런 벤자민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민이 그에게 물었다.

“지금 너는 이 상황을 알고 있었나?”

“무슨 상황 말이오?”

다짜고짜 상황을 알고 있냐는 강민의 질문에 벤자민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벤자민의 얼빠진 표정을 본 강민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파사삭!

발을 굴렀는데 발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얇은 유리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다음 순간 벤자민은 지금 강민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센터의 지하에서 음습하고 어두운 마나의 기운이 거세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강민이 치료 센터 지하에 펼쳐져 있던 결계를 부순 것이었다.

“이, 이게…… 무슨…….”

벤자민은 뜻밖의 기운에 당황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아는 치료 센터에서는 이런 음습한 마나가 나올 수가 없었다.

“역시 모르고 있었군. 부총재씩이나 되어서도 이 일을 몰랐다는 것은 이를 꾸민 것이 총재라는 말인가?”

강민의 나직한 중얼거림 속에서 총재라는 부분이라는 말이 들리자, 벤자민은 번뜩 머리를 들었다.

“설마…… 그럴 리가…….”

벤자민은 무언가 아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으며 애써 부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뭔가 있긴 있나 보군.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는 너는 모르는 것 같으니 같이 현장을 확인해 보지.”

벤자민에게 말을 건넨 강민은 지금껏 옆에서 눈을 크게 뜨고 멀뚱거리고만 있는 한수강에게 말을 건넸다.

“어차피 너는 그녀를 데리러 온 것이니까, 순간 이동으로 보내줄 테니 그녀와 먼저 집으로 가 있어.”

벤자민이 있으니 강민은 굳이 유키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런 강민의 말에 한수강이 번쩍 정신이 들었다.

“형님, 저도 무슨 일인지 알면 안 되겠습니까?”

그때 연구자들의 대화로 판단해 보면 아직 유키가 직접적인 실험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한수강은 어떤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한수강의 말에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유리엘에게 눈짓을 주었다. 유리엘은 강민의 의도를 바로 알아채고 일행들을 모두 지하의 실험실로 공간 이동시켰다.

* * *

강민 일행은 처음 치료 센터 앞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실험실 안으로 들어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실험실을 관리하는 통제실로 들어왔다.

통제실은 가로세로 각각 30미터 정도 되는 좁지 않은 공간이었는데, 정면으로 보이는 공간에는 50여 개의 스크린이 장착되어 있었다.

나머지 3면은 두꺼운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 밖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통제실의 밖으로는 50여 개의 유리 원통이 서 있었는데, 그 안에는 섬뜩한 느낌을 주는 옅은 붉은색의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원통 안에는 호흡기를 착용한 사람들이 둥둥 떠 있었는데, 움찔거리는 몸을 보아서는 아직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원통의 하단에는 각각 가느다란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파이프는 통제실 앞에 설치된 커다란 원형의 은빛 금속 통으로 모여들었다.

유리 원통에서 금속 통으로 모인 액체가 어떤 장치를 통해서 가공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판단되는 이유는 통의 아래쪽으로는 작은 컨베이어 벨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컨베이어 벨트 위에는 통에서 만들어진 조그만 알약들이 아주 느린 속도로 옮겨지고 있었다. 지금도 하나의 알약이 은빛 통에서 나와 컨베이어 벨트 위로 떨어졌다.

통제실 안에는 흰색 가운을 입은 연구원으로 보이는 5명과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 혹은 감시자로 보이는 5명, 총 10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들 중,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중앙에 설치된 콘솔을 조작하고 있었다.

강민 일행이 나타났음에도 연구원으로 보이는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은 무언가 문제가 있는지 콘솔을 조작하는 것에 집중하느라 강민 일행이 나타난 것조차 모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 서 있던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뒤에 나타난 강민 일행의 기척을 느끼고 재빨리 돌아보았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30대 초반의 노란 머리 청년이 강민 일행에게 외쳤다.

“누구냐!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온 것이냐?”

“허, 변종 뱀파이어라.”

강민의 말에 5명의 경호원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날카로운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노란 머리 청년은 강민 일행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벤자민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다.

일행 중 벤자민은 유니온의 부총재로 이능 세계에서는 유명한 인물이라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지만, 벤자민 역시 지금은 유리엘의 인식 장애 마법의 영향력 아래 들어와 있어 청년은 벤자민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청년의 수준이 낮아서 그런지 이것이 인식 장애의 영향인 것까지는 알지 못했고, 단지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난입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양손에 핏빛 손톱을 길게 빼내고 외쳤다.

“어떻게 이곳으로 순간 이동해서 들어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서 나갈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거다!”

인식 장애가 일행의 실력까지 가리고 있었기에 역량이 떨어지는 청년은 강민 일행의 역량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청년은 강민 일행이 어떤 식으로 이곳으로 들어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은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허가 없이 이곳에 온 이상 살려서 보내줄 수는 없었다.

“해치워라!”

청년의 말에 뒤의 경호원 4명 중 2명은 청년처럼 손톱을 빼내고, 2명은 팔뚝 길이의 소검을 빼 들었다.

청년은 B+등급 정도의 능력자, 다른 인원들은 C급에서 C+급 정도의 능력자였다.

그러나 변종 뱀파이어로서 태양 빛이 들지 않는 이곳에서는 그 등급보다는 월등히 높은 힘을 낼 수 있었기에 실력이 잘 추정되지 않는 괴인들이지만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민 일행은 그들이 상대할 역량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형님,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굳이 강민이 나설 것도 없었다. 강민에게 말하고 앞으로 나선 최강훈은 자신의 무기인 환도조차 뽑아 들지 않고 몸을 날렸다.

퍽퍽퍽퍽~ 퍼억~! 쾅~!

딱 다섯 수였다. 최강훈이 5명을 처리하는 데까지는 5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번개처럼 날아온 최강훈은 4명의 C급 뱀파이어는 목덜미를 쳐서 기절을 시켰고, B+급의 노란 머리 청년은 손날로 복부를 가격하여 날려 보냈다.

사실 최강훈은 모두 다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킬 계획이었는데, 그래도 우두머리인 노란 머리 청년은 부하들이 당하는 것을 보고 간신히 몸을 틀어 최강훈의 손날을 피했다.

하지만 최강훈의 손날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노란 머리의 복부로 날아갔고 노란 머리는 그것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벽면의 강화유리에 부딪힌 노란 머리는 한 손으로 배를 감싸며 일어서려 하였지만, 충격이 만만치 않았는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주저앉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중앙의 콘솔에서는 연신 삐빅거리는 비프음을 내뱉고 있었고 빨갛고 노란 램프들이 불을 반짝였지만, 연구원들은 방금 일어난 사태에 콘솔을 만질 생각조차 못 하고 동상처럼 서 있었다.

조금 전 상황은 신경도 쓰지 않고, 통제실 밖으로 보이는 유리 원통을 가만히 살펴보던 유리엘이 말했다.

“이건, 뱀파이어의 진혈을 추출해서 정제하는 장비네요.”

“진혈이라 하기도 힘든 수준이네, 저들을 보니 이제 뱀파이어가 되어가고 있는 변이 중인데 말이야.”

“아무래도 부작용을 피하려고 그랬던 것 같죠?”

“그래, 아무리 정제했다 하더라도 뱀파이어의 진혈을 계속 흡수하면 원치 않아도 뱀파이어화가 진행되니 말이야. 그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 같네. 대신 더 큰 것을 놓치고 있지만 말이야.”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뱀파이어 헌터들은 상처의 치료나 뱀파이어를 잡기 위해서 순간적으로 강한 힘이 필요한 경우 뱀파이어의 진혈을 종종 섭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순간적으로는 뱀파어어의 힘을 내게 해주었지만, 이것이 누적되어 헌터가 견딜 수 있는 이상의 진혈이 체내로 흡수되면 자신이 그간 사냥한 뱀파이어로 변해 버린다는 큰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진혈이 주는 강대한 힘에도 불구하고 진혈을 섭취하는 것은 극히 자제해서 특별한 경우에만 행하여졌다.

만일 이런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혁신이 될 것이었다. 지금 강민과 유리엘의 말은 유니온에서 이런 부작용을 해결했다는 것 같았다.

유니온이 부작용을 해결한 방법은 뱀파이어에게서 진혈을 채취하는 것이 아니라 뱀파이어로 변이 중인 사람에게서 진혈을 채취하는 것이었다.

지금 유리 원통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온전한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뱀파이어의 진혈이 대법을 통해서 주입되어, 인간에서 뱀파이어로 변이가 진행 중인 사람들이었다.

아마 유니온은 그들에게서 혈액을 채취하여 추출하면 뱀파이어로 변이가 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런 시설을 만들었던 것 같았다.

진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성능이 낮지만, 뱀파이어화가 된다는 부작용을 피할 수 있다면 충분히 이점을 가지는 방법이었다.

성능 역시 수십 명에게서 추출한 진혈을 극도로 정제해서 사용한다면 오히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높은 성능을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크나큰 문제점이 있었다. 강민의 더 큰 것을 놓쳤다는 말에 유리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나 문명이 떨어지다 보니 영혼에 대한 이해도 역시 낮군요. 이렇게 영혼의 통곡이 나올 정도로 고통을 주어서 뽑아낸다면, 정제된 진혈을 흡수한 쪽에서 영혼의 변질까지 발생할 가능성이 있겠는데요?”

유리엘이 말한 대로 영혼의 통곡이 그대로 담긴, 그것도 수십 명의 영혼의 고통이 담긴 진혈을 정제한 저 알약을 복용한다면 웬만큼 영혼이 단련된 사람이 아니고서야 상당한 영혼의 변질이 올 것이었다.

만약 지속적으로 복용한다면 파괴적인 욕구가 가득 찬 광인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즉, 이 방식대로라면 뱀파이어화가 되는 부작용보다도 훨씬 심각하고 치명적인 부작용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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