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현세귀환록
096. 난입(2)
유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천왕가가 유니온에게 당해서 멸문하게 된 것을 알게 된 이상, 기존 세력들도 유니온을 신뢰하긴 힘들겠네요. 언제 자신들도 그런 취급을 받아 유니온에게 공격당할지 모르잖아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아. 유니온의 입장이 있으니 아마 천왕가와 현승간의 내전(內戰) 정도로 마무리할 가능성이 크겠지.”
“음……. 그럴 가능성이 더 크겠네요. 유니온이 각 이능 단체를 공격한다는 이미지가 생기면 더 이상 이능계를 통제할 명분이 사라질 테니 말이에요.”
“그렇지. 어차피 유니온은 위원회 눈치를 봐야 할 테니 드러내 놓고 움직이기도 힘들 거야. 지금 행동도 선을 긋는 것의 일환이겠지.”
유리엘의 말처럼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유니온이 각국의 자생적인 이능 단체들을 공격해서 그들의 기득권을 빼앗는다는 이미지가 생기면 더 이상 유니온은 이능력자들의 협력 단체가 아니라 패권 단체로 취급받을 것이다.
물론 유니온은 장기적으로는 패권화를 지향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위원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위원회의 눈치를 보는 유니온에게 이번 천왕가에 대한 공격도 상당히 무리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유니온은 위원회의 선을 보는 중이었다.
쇼군이 죽으면서 위원회에서 일본을 포기한 이후, 유니온이 나서서 일본의 이능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유니온의 행동에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만일 위원회에서 경고나 주의가 있었다면 유니온에서 이렇게 본격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유니온에서는 자신들의 운신의 폭을 파악하기 위해서 위원회가 용인하는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이번 천왕가 공격도 그 확인 작업의 일환이었다. 위원회에서 경고를 한다면 일본 일의 연장 정도라고 변명을 하였을 것이었다.
강민과 유리엘이 대화하는 동안 스크린 상에서 보이던 전투는 모두 끝이 났다. 일본 쪽의 전투는 아까 벌써 끝났고, 한국 쪽의 전투가 조금 전에 끝났다.
한국 쪽의 스크린에는 딱 보아도 오랜 역사를 지닌 것 같은 고풍스러운 장원이 보였는데, 조금 전 끝난 전투의 여파로 곳곳이 파괴된 것이 눈에 띄었다.
천왕가와 현승 간의 내전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강민의 추측이 맞았는지, 유니온의 무기를 든 전투 요원들은 현승 디펜스의 마크가 붙은 방호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전투의 흔적을 지우려고 하는지 장원 곳곳에 불을 놓기 시작했다.
그 장면까지 본 유리엘은 더 이상 스크린을 띄워 놓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지, 손을 저어 스크린을 모두 내리고 강민에게 말했다.
“현승에서 저렇게 나오다니, 천왕가도 완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겠어요.”
“그렇지, 기르던 개에게 물린 기분일걸? 유니온까지 끌어들여서 자신들을 칠 줄은 전혀 몰랐겠지.”
“이렇게 되면 현승도 유니온 산하로 들어갈까요?”
“글쎄, 현승이 호락호락하게 유니온 밑으로 들어갈까? 천왕의 밑에 있기 싫어서 저렇게 유니온과 함께 천왕의 뒤통수를 쳤는데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유리엘의 생각에는 현승 자체만의 무력으로는 과거 천왕가의 힘을 업고 했던 사업은 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강민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렇지만 재계 2위라고 해봤자, 천왕가에서 떨어져 나온 이상 이능 세계에서 자신들의 뒤를 보아줄 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능계에 간섭을 안 한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이능 세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현승이 이능계를 포기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에요.”
“그렇겠지,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지금 하는 것을 보니, 현승 디펜스에서 나온 저 녀석들을 이용해서 이능계에 영향력을 보이려는 것 같은데 말이야.”
“A급 능력자조차 한 명도 없고 B급 두 명, C급 세 명에 대부분 C급 미만의 능력자인데 저들로 가능할까요?”
“지금 동원한 세력만 저 정도고, 숨겨둔 세력이 있을지도 모르지.”
강민 역시 지금 스크린으로 본 인원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숨겨둔 세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숨겨뒀다라……. 천왕가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들의 최고 목표인데, 그렇게 많은 이능력자들이 숨겼을 것 같지는 않아요. 기껏해야 호위 인원 몇 명이겠죠. 한 번 찾아볼까요? 몇 명이나 남았는지?”
“굳이 그런 곳에 마나 위성의 마나를 쓸 필요까진 없겠지. 어차피 숨겨뒀다 하더라도 A급 한두 명일 테니."
유리엘이 만든 마나 위성은 가공할 만한 정보력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신기(神器)였지만, 전능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유니온의 본부나 위원회의 각 세력의 본부는 마나 위성으로도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마나 결계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스터급 이상의 능력자라면 마나 위성이 자신들을 지켜보는 것을 알아챌지도 몰랐다. 물론 어디서 어떻게 보는지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 정도의 막연한 느낌 정도는 가질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 모드였고, 저장된 마나를 활용해 은폐 모드나 침투 모드를 이용한다면, 마스터의 시선에도 걸리지 않을 것이고, 약한 마나 결계 정도는 뚫어서 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특수 모드 사용에는 위성이 저장해 놓은 마나를 사용해야 했고, 결계의 수준이 높을수록 마나의 사용량은 늘어났다. 그리고 위성의 마나는 충전되기는 했지만 무제한으로 사용할 만큼 넉넉하지는 않았다. 이것도 지구의 마나장이 약해서 그런 것이었다.
지금 강민이 말하는 마나를 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는 그런 것이었다.
현승의 본사에도 그런 마나 결계가 펼쳐져 있었고, 그곳의 이능력자들을 파악하려면 마나 위성의 마나를 사용해야 할 것인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 같자, 유리엘이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아~ 어디서나 주도권을 쥐기 위한 싸움은 끊이지가 않네요.”
“인간의 본성이겠지.”
“하긴, 그런 투쟁심이 인간을 살아남게 했겠지요?”
“그렇겠지. 그런 투쟁심이 없었다면 인간은 마물의 먹이밖에 되지 못했을 거야.”
“조만간 다가올 차원의 교차에서도 그 투쟁심이 살아 있길 바라야겠네요.”
“그렇지. 그렇지 않다면 마물의 먹이가 되고 말 테니 말이야.”
* * *
해가 떨어진 지도 한참이 지나 이미 어두워진 회장실에는 한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검은 가죽 의자에 기대어 앉은 노인은 유현승이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어두운 회장실과 대비되는 서울 시내의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던 유현승은 갑자기 들려온 휴대전화 벨소리에 침중한 얼굴로 수신 버튼을 눌렀다.
“어떻게 되었느냐?”
어떻게 되었냐는 유현승의 말에 유태우의 감격스러운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
-아버지! 이젠 더 이상 천왕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지리산에 있는 본가도 다 처리했고, 일본으로 넘어간 천왕가의 세력도 유니온에서 이미 다 처리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유태우의 말을 들은 유현승은 비어 있는 왼손을 꾹 쥐었다. 왈칵 눈물이 나려는 것을 애써 감추며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유현승은 유태우에게 말했다.
“빠져나간 인물들은 없느냐?”
-외부에 상주하는 인력은 몇몇 살아남았겠지만, 우리가 주최한 회합에 참여한다고 원로들을 포함한 주요 인물은 다 모여 있었습니다. 그중 살아남은 인물은 없습니다.
현승에서는 이번 일을 위해 화합의 장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본가에서 회합을 주최하였다.
천왕가의 돈줄인 현승에서 모임을 주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과거에도 이미 몇 차례나 개최했었기에 천왕에서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보통 현승에서 주최하는 모임에 참석하면 차비 등을 명목으로 기본적으로 억 단위의 돈이 오갔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라도 멀리 있는 가솔들까지 모이곤 했었다.
그랬기에 누구도 현승이 품은 칼을 보지는 못했고, 그것은 그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애초에 전투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기에 대부분이 평상복이나 가벼운 무구만을 착용하고 회합에 참석하였다.
회합의 시작 시간까지 주최자가 나타나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유니온과 S포스의 연합팀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회합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외부에 파견된 인물이나 일이 있어 나가 있던 인원까지 완전하게 처리하지는 못하였다.
외부에 사람들이 몇몇 남아 있다는 이야기에 유현승은 침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긴 하다는 말이구나.”
-그렇지만 그들 역시 조만간 처리할 생각입니다. 어차피 그들 정도는 S포스만으로도 충분히 처리 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너무 방심하지 말아라. 천왕가는 저력이 있는 조직이야. 우리가 그들을 등지려고 마음먹은 이상 철저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야.”
유현승은 신중하게 말했지만, 유태우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천왕가를 멸문시킨 흥분이 가라앉지 않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 이번 유니온과 협상을 통해서 유니온에서 제작한 우수한 무구를 많이 확보해서 전보다 전력이 좋아졌습니다. 어린 녀석들 정도는 충분히 처리가 가능할 것입니다.
“다른 단체들의 움직임은 아직 없느냐?”
-우리 현승과 천왕가 사이의 내전으로 알려져 있으니, 다른 곳에서 움직일 명분은 없겠지요. 그리고 천왕가가 평소에 한 행태가 있으니 지원 세력은 없었습니다.
“……수고했다. 정리 잘하고 돌아오너라. 와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자꾸나.”
-네, 아버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날 것 같아 유현승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10년을 보고 생각했던 계획이 불과 3년 만에 이렇게 결론이 나니 기쁘기보다는 허무한 감정이 앞서서 들었다. 이렇게 쉬웠는데, 그동안 왜 그런 모멸감을 참아왔는지…….
하지만 유현승도 알고 있었다. 유니온의 힘이 없었다면 10년이 지나도 힘들었을 것을 말이다.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유현승은 잠시 눈을 감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유현승의 머릿속에서 어렸을 때부터의 일이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갔다.
단전이 형성되지 않아서 갖은 모멸과 멸시를 겪은 어린 시절부터, 가문에서 축출되다시피 일반 세상으로 나간 젊은 시절, 이후 고생고생하며 현승의 기틀을 만들던 장년 시절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또 현승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다시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던 중년 시기, 가문의 지원을 입고 현승을 재계 2위까지 만든 노년의 시기까지. 자신의 전 생애가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아련히 지나갔다.
유현승이라고 복수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적부터 겪었던 모멸감만 해도 증오할 만한데, 자리를 잡고 나니 그제야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는 그 기회주의적 행태에 복수심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아무리 돈이 많다 하더라도, 이능을 지닌 초인들과 상대하기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으로 그런 마음을 누르고 또 누르고 있었었다.
반면, 아들은 달랐다. 태생부터 천왕가의 가신으로, 아니, 하인과 다름없는 처지로 태어난 자신과는 달리, 아들은 자신감이 넘치는 재계 2위 현승의 주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문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으니 아들은 그런 상황을 참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했던 계획이었다. 사실 유태우는 어떨지 몰랐지만 유현승은 지금처럼 가문을 멸하는 것이 아닌, 가문으로부터의 독립 정도를 생각하고 진행했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의 결과는 가문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유현승은 독립에 대한 감격스러움과 함께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이루었다면 감격하기만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현승이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유니온이 만든 것이었다.
아들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늑대를 쫓기 위해서 호랑이를 불러온 것일지도 몰랐다.
천왕가야 현승을 하수인처럼 보더라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집단이라 보고 있었기에 내부적으로는 무시 할지언정, 현승과 다른 이능 단체가 부딪히면 전적으로 현승의 편에 서서 대응해 주었다.
그러나 유니온은 전혀 달랐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만난 집단이기에, 그 이해관계가 끝나면 현승은 끈 떨어진 낚싯바늘 신세가 될 가능성이 컸다.
유니온이 없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자구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계획대로 10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면 S포스의 역량이 지금의 열 배 이상은 되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S포스의 힘이 너무 약해……. 다른 세력과의 연수를 알아봐야 하나…….’
천왕가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은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지만, 그 뒤의 일을 생각하니 유현승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