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현세귀환록
094. 격돌(5)
순간 이극민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살길을 마련해 주려는 나카타의 생각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게 그렇게 해주려는 이유가 뭐냐?]
[내 이 가주를 좋게 보진 않지만, 저따위 협잡질을 하는 유니온에게 당신과 같은 무인이 죽게 놔두고 싶지는 않소. 그뿐이오.]
나카타는 끝까지 사무라이였다. 비록 생사 대전을 벌이기는 했지만, 배신과 계략으로 이 정도 무인이 죽게 놔두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천왕을 처리하고 유니온과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이런 유니온이라면 차라리 천왕이 일본의 이능계를 장악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호의는 거절하지 않으마. 여기서 벗어난다면 네가 돌보았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별도로 챙겨주도록 하지.]
[고맙소. 아, 내 측근 중에서 히무라라는 놈이 있는데, 그놈이 유니온의 간세요. 이 가주가 이리로 온다고 말해준 것도 그놈이지.]
[음……. 그렇군. 알겠다.]
이제 전음은 끝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카타의 온몸이 붉어지더니 폭발적인 기세가 뻗어 나왔다. 역혈공이 시전된 것이었다.
집단마다 부르는 이름은 달랐지만 선천진기를 태워 일시적인 힘을 내는 역혈공 계열의 무공은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선천진기가 다 타고 나면 그 끝은 죽음이라는 것은 역혈공을 쓰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파팍! 펑! 콰직!
마지막 선천진기까지 태우는 나카타는 마치 상처를 입지 않은 것처럼, 자신을 둘러싼 복면인들을 처리해 나갔다.
한 복면인을 장(掌)으로 튕겨내고 다른 복면인의 다리뼈를 부러뜨렸다. 하지만 복면인들도 만만한 전력은 아니었다. 그리고 방금 아웃된 복면인들은 기이한 기운을 내는 복면인이 아닌, 일반 복면인이었다.
기이한 기운을 쏘아내는 복면인들은 실력 또한 일반 복면인들에 비해서 우월했는지 나카타의 그런 공세를 힘겨워하면서도 버티고 있었다.
그런 복면인들의 모습에 나카타는 역혈공을 한층 더 빠르게 돌려 폭발적인 기의 운용을 하였다. 선천진기의 소모 속도 역시 한층 더 빨라졌다.
강렬한 기파를 뿜어 복면인들을 잠시 물린 나카타는, 자신을 둘러싼 복면인들은 놓아두고 이극민을 공격하고 있는 복면인들에게 날아갔다.
나카타를 공격하던 복면인들은 당황하여 그의 뒤를 서둘러 쫓아갔는데, 어느새 나카타는 이극민의 인근에 도착하였다. 이극민을 공격하던 복면인들은 나카타의 출현에 당황하며 손발이 얽혔는데, 이 틈을 이극민은 놓치지 않았다.
[고맙다. 나카타.]
[고마우면 살아남으시오. 이 가주]
도망치려는 이극민을 쫓아가려는 복면인들은 다시 나카타에게 가로막혔다. 무리한 움직임에 나카타 역시 몇 차례의 공격을 허용했지만, 이미 역혈공을 끌어올려 선천진기가 타는 고통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어 나카타는 공격에 별다른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나카타가 복면인들을 잡고 있는 사이 이극민은 이미 멀리 도망치고 말았다. 만일 이극민을 쫓으려 한다면 남아 있는 인원이 나카타에게 몰살을 당할 것 같았다. 그만큼 나카타의 기세는 흉흉했다.
결국 이극민을 포기한 복면인들은 나카타라도 확실히 잡기 위해서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5명이 아니라 10명이 뭉치니 아까 전의 기이한 기운은 2배가 아니라 4배 가까이 증가했다. 멀쩡한 몸이라도 쉽사리 이겨내지 못할 기이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나카타는 지금 역혈공의 상태였다. 삶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런 기이한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복면인들과 공방을 펼쳐나갔다.
몇 차례의 공방 끝에 일반 복면인은 2명을 제외하고는 다 죽어버렸고, 기이한 기세의 복면인들 역시 2명은 죽고 3명이나 팔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아웃되었다.
그들을 처리하면서 나카타 역시 멀쩡하지만은 못했다. 이미 등과 옆구리에 큰 검상을 입었고, 그 검상에서 나오는 기이한 기운에 자신의 마나 흐름이 가닥가닥 끊어지고 있었다.
나카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선천진기를 태워 한 명이라도 더 저승길에 동반할 생각뿐이었다.
이들 역시 유니온 고위층의 명령을 받는 입장이겠지만, 지금 나카타는 그런 사정을 봐줄 상황은 아니었다.
장검보다는 약간 짧은 검을 휘두르는 복면인의 복부를 가격해 배를 터뜨려 한 명을 더 처리한 나카타가 그 옆에 있는 1미터가 조금 넘는 환도를 가진 복면인의 목을 끊어 가려는 찰나였다.
그 복면인을 처리하기 직전에 어디선가 한 인영이 쏜살같이 날아와 그의 공격을 막고 복면인의 목덜미를 잡고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최강훈이었다.
주위의 복면인들은 나카타에 대한 공격에 집중한다고 갑자기 나타난 최강훈에 대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
또한 동료가 한 명 납치되었지만, 아무도 최강훈을 쫓지 않았다. 아니, 쫓을 수가 없었다. 나카타의 공격에 대한 방어만으로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복면인의 마혈(痲穴)을 짚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최강훈은 그를 들쳐 메고 한참 동안을 뛰어서 전장에서 멀어졌다.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싶었지만, 이 녀석이 위험한 상황을 볼 수는 없으니…….’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의 전투를 보는 것은 최강훈에게는 하나하나가 큰 배움이었다.
이극민과 나카타의 전투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조금 전에 나카타가 역혈공을 끌어올린 이후의 싸움도 그에게는 좋은 경험이었다.
그래서 좀 더 그 전투를 보고 싶었지만, 한수강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위험해진 것을 보자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나서게 되었던 것이었다.
* * *
한참을 달려가던 최강훈은 저 멀리 전장에서 터진 강력한 마나 발현에 잠시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나카타가 쓴 역혈공은 마지막에 자신의 몸을 터뜨리는 폭혈공 방식의 역혈공인 것 같았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무인의 허무한 죽음에 최강훈은 잠시 발을 멈추어 그만의 애도를 표했다.
이미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기에 최강훈은 한수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복면을 벗겨 확인했다. 많이 변하긴 했지만 한수강이 맞았다.
최강훈은 자신의 인식 장애 마법을 거둔 후 서둘러 한수강의 마혈을 풀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수강아! 어떻게 된 일이냐? 네가 유니온에 가입한 것이야? 이 상처는 뭐고?”
복면을 벗은 한수강에게 과거의 앳된 모습은 없었다. 20대 초반같이 보이지 않는 음울하고 깊은 눈에 오른쪽 볼에는 깊은 자상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 그간의 고초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식 장애 마법으로 최강훈을 알아보지 못했던 한수강은 마법을 거둔 그를 확인하고 놀랍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강훈이 형? 형이 어떻게 여기에…….”
“내가 여기에 온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어떻게 거기에 있는 거야? 진짜 유니온에 가입한 거야?”
최강훈의 다그치는 듯한 말에 한수강은 자조적인 씁쓸한 웃음과 함께 대답하였다.
“후…… 그래. 나 유니온에 가입한 게 맞아. 지금 본부 기동타격대 AA3팀에 있어.”
최강훈은 완전히 변해 버린 한수강의 모습에 당황스러워하면서도, 그의 상황을 알아야 했기에 계속 질문을 던졌다.
“기동타격대? 이 얼굴의 상처는 뭐야?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 거야?”
“무슨 일이라니. 방금 전과 같은 일을 하는 거지……. 이 상처는…… 그냥 그렇게 되었어.”
“그렇게 되다니! 무슨 말이야?”
최강훈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한수강은 그의 질문에 더 이상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일단 지부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나 유니온에 있는 거 알았으니 앞으로는 그리로 연락하면 될 거야.”
한수강이 다시 전장 쪽으로 되돌아가려 하자 최강훈이 그를 잡고 다시 물어보았다.
“수강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니다. 어떻게 되었든, 이제 유니온에서 나와서 우리와 함께하자. 수아도 너 기다리고 있어.”
한수강이 마지막으로 본 한수아의 모습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한수아가 치료된 것을 보지 못하고 떠났던 한수강은 한수아가 건강해진 모습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에 강민이 치료해 준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녀가 건강해진 모습은 직접 보지 못했기에 최강훈에게 물었다.
“누나는 괜찮아?”
“그래, 수아는 건강해. 지금은 대학도 다니고 있는걸. 어서 나랑 같이 가자.”
한수아에 대한 언급에 약간 갈등하는 듯 보였던 한수강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 아버지 영전에 떳떳할 자신이 없어……. 그리고 할 일도 있고…….”
“무슨 소리야! 우리 백록원의 원수들은 이미 다 없어졌잖아!”
“그래.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없어졌지……. 하지만 아직도 잔당이 남아 있잖아. 그들을 처리하는 것에라도 일조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아버지 앞에서 떳떳할 수 있겠어?”
“복수할 대상도 이미 없어졌는데 무슨 복수야! 그리고 사부님이 원하시는 건 복수가 아니라 네가 행복하게 사는 것일 거야. 지금처럼 이런 슬픈 눈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슬픈 눈이라는 말에 한수강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입을 닫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난 후, 한수강은 마음을 굳혔는지 최강훈에게 말했다.
“형, 복수를 떠나서 나 할 일이 있어. 그 일 끝나고 나면 형하고 누나한테로 돌아갈게. 그때 나 받아줘.”
한수강의 처연하지만 확고한 말투에 최강훈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할 일이 뭔데? 내게 말해봐.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니, 내가 할 수 없는 일도 민이 형이면 무슨 일이든 다 해줄 수 있을 거야. 내가 부탁해 볼게.”
“민이 형?”
“너도 기억나지? 그때 사부님과 우리를 살려주었고, 수아까지 살려준 은인이잖아. 지금 수아도 나도 민이 형과 같이 살고 있어.”
당시 17살의 한수강은 그때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당연히 기억하지. 음…….”
불치병이라고 생각되는 한수아의 병까지 고쳐줬다면, 지금 자신의 고민도 해결해 줄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섣불리 판단하고 움직였다가 잘못하면 그녀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한수강은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수강이 뭔가 생각하는 듯하자 최강훈은 설득이 먹혀들었다는 판단에 좀 더 적극적으로 그에게 말했다.
“수강아. 네가 어떤 할 일이 있고, 어떤 고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함께한다면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 몇 배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만약 무력이 필요하다면 더 그렇겠지.”
무력이라는 말과 함께 아공간 주머니에서 자신의 환도를 꺼내든 최강훈은 소드 오러를 그의 검에 발현했다.
고개를 떨구고 생각을 하고 있던 한수강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강대한 마나에 깜짝 놀라 최강훈을 바라보았고, 불같이 타오르는 녹색 빛의 소드 오러를 목격할 수 있었다.
“검기? 형! 마스터가 된 거야?”
조금 전까지 마스터와 싸우던 한수강은 마스터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최강훈이 헤어진 지 불과 5년도 채 안 되는 사이 마스터가 되어 있다니, 한수강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는 마스터가 되었어. 너도 그동안 피나는 수련을 했나 보구나. 내가 네 나이 정도였을 때는 그 정도 성취는 보이지 못했는데 말이야. 네 나이에 비해서 월등히 빠른 성취야.”
최강훈은 한수강의 나이였을 때 C+급 정도의 이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한수강은 B급은 족히 되어 보이는 마나가 단전에 들어차 있음이 느껴졌다.
20대 초반에 C급도 빠른 성취라고 할 수 있는데 B급이라면 정말 빠른 성취였다. 한수강이 얼마나 열심히 수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한수강은 자신의 능력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그래 봤자 B급이지 뭐. 그나저나 어떻게 마스터까지 올라간 거야? 우리가 헤어진 지 4년 좀 넘은 것 같은데 그사이에 마스터까지 될 수 있는 거야?”
“말하자면 긴데, 짧게 말하자면 민이 형님과 유리 누님의 도움으로 된 거야. 나 혼자 수련했다면 결코 오르지 못했을 경지이지.”
“정말 대단한데, 마스터라……. 형, 형이 말하는 강민이라는 분은 정말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사람인 거야?”
한수강이 무슨 의도로 물어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강훈에게 강민은 신적인 존재였다. 그의 생각에 강민이 못 할 일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래, 민이 형님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 수아의 치료 역시 불가능한 줄 알았지만, 민이 형님이 나서서 치료해 줬잖아.”
“음…….”
“고민만 하지 말고 털어놔 봐. 사부님께서 너희들을 부탁한다 하셨는데, 널 돌봐주지 못해서 항상 마음이 걸렸어. 네가 어떤 상황에 있던지 내가 도울 테니까 내게 말해봐.”
최강훈의 계속되는 설득에 한수강도 마음을 바꾸었는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수강의 이야기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4년이 넘는 세월을 한두 마디로 풀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