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현세귀환록
092. 격돌(3)
처음 이극민이 히데오가 죽은 것을 알고도 2년 동안이나 나서지 못했던 이유도 이 비밀과 관련이 있었다.
퍼니셔라는 알 수 없는 인물이 히데오를 죽인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단지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문구만이 그가 남긴 전부였다.
하지만 이극민은 만일 그가 히데오와 자신과의 관계를 안다면 자신 역시 그의 타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퍼니셔가 히데오를 죽인 이유가 자신과 관계가 없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인 히데오가 그에게 죽었다면, 마스터도 되지 못한 이극민은 상대도 되지 못할 것이었기에 복수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결국 이극민은 자주 가던 일본에도 발을 끊고, 히데오의 묘소에 참배조차 하지 못하고 천왕가 본가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수련밖에 없었다.
1년이 넘도록 미친 듯 수련만 하다 보니 어느덧 한 줄기 빛과 같은 깨달음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때까지 이극민은 여전히 A+ 등급으로 마스터가 되는 마지막 벽을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 마지막 벽은 시간이 지난다고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었다. 극적인 깨달음이 없다면 그 벽을 넘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컸다.
그런 상황에서 마스터가 되는 깨달음이 그에게 내려왔고 그는 당당히 마스터가 되었다. 하지만 이극민은 마스터가 되었다고 바로 수련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검기, 즉 소드 오러를 쓰는 것은 가능했지만 아직 초월의 영역에는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히데오가 살아 있을 당시 마스터에 오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마스터가 된 이후의 수련까지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중 히데오가 가장 강조했던 것 중의 하나가 초월의 영역이었다.
그 초월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하면 마스터들 사이에서는 반쪽짜리 마스터로 불린다는 것 또한 이극민은 히데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스터에 올랐다고 수련을 그만두지는 않고 1년여의 수련을 더 하여, 결국 초월의 영역에까지 들어갔다. 예전부터 히데오에게 초월의 영역에 오르는 수련에 관한 요령을 들었던 것이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이후 자신감을 얻은 이극민은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2년 동안이나 퍼니셔가 자신을 찾지 않았기에 히데오의 죽음이 자신과 관련이 없다는 확신도 들었고, 오히려 마스터에 올라 자신감이 최고조에 달한 지금은 그 퍼니셔와 한 번 붙어 히데오의 복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이런 생각으로 이극민은 일본으로 넘어가 히데오가 밟았던 길을 다시 밟으려고 하였다. 헤이안의 재창설을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향후 일본의 이능계를 통합한다면 자신의 두 아들 중의 하나를 내세워, 히데오의 조카라는 명목으로 헤이안의 쇼군으로 만들 계획까지 세웠다. 자신이 직접 나선다면 일본 이능력자들의 반발이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유전자 검사를 하면 자신의 아들이 히데오의 조카임이 밝혀질 것이니 명분 역시 충분하였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물론 이극민은 유니온이 선수를 쳐서 일본의 이능 세계를 장악하려는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리 마스터에 올라 과거 히데오와 같은 무력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과거 헤이안처럼 일본의 이능 세계를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힘든 상황이었다.
유니온이 지금까지 획득한 일본 이능계에 대한 기득권을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극민은 현재는 유니온과 대립하며 일본의 이능계를 장악하려고 서로 겨루고 있지만, 나카타까지 잡고 그의 세력을 흡수한 뒤에는 유니온과 협상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헤이안의 두 조각을 흡수하여 나머지 두 조각을 흡수한 유니온과 어느 정도 대등한 상태가 되면, 협상을 통해 일본의 이능계를 이원화해서 관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극민은 조만간 나카타를 만나 그를 처리하고 그의 세력을 흡수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에서 그를 만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여기서 이극민은 나카타를 만났고, 많은 수하도 함께하지 않은 그에게는 나카타를 처리할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나카타 역시 마스터에 오른 인물이지만, 이극민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과거 히데오에게 들은 나카타라면 그는 초월의 영역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반쪽짜리 마스터이기 때문이었다.
히데오의 말에 따르면 나카타는 무에 대한 재능이 그렇게 높지는 않다고 했다. 오히려 무에 대한 재능만을 치면 낮은 편이라고 하였는데, 그가 어릴 적에 먹은 영약의 기운과 본능적인 투쟁심과 호전성이 결국 그를 마스터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고 하였다.
하지만 히데오는 나카타에 대해 기본적인 무에 대한 재능이 낮아서 초월의 영역까지는 오르지 못한 반쪽짜리 마스터라고 평가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극민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초월의 영역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나카타에게 그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신이 질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극민은 이제 더 이상 나카타와 대화를 주고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더 시간이 지난다면 나카타의 세력에서도 지원군이 올지도 몰랐다.
아마 자신의 연락이 끊긴 것을 알아챈 자신의 세력에서도 조만간 지원군이 올 것이지만, 난전이 펼쳐진다면 나카타를 놓칠 가능성도 있었기에 이극민은 지금 이 자리에서 나카타를 처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카타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여기가 네가 서 있는 마지막 장소가 될 것이야.”
그런 이극민의 말에 나카타 역시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마지막? 누가 마지막이 될지는 두고 보자고.”
“허어, 자신이 있나 보군. 반쪽짜리 마스터 주제에 말이야.”
반쪽짜리 마스터라는 말에 나카타의 얼굴에 노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를 수식하는 여러 호칭이 있었지만, 마스터들 사이에서 나카타는 반쪽짜리 마스터라는 호칭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 호칭은 불명예스러운 호칭이었다.
“이제 마스터에 오른 지 몇 년 안 된 당신이 어떻게 그 말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날 과거의 나로 본다면 오산이야. 만일 히데오 님과 지금 겨룬다면 과거처럼 허무하게 지지는 않을 것이다.”
히데오를 운운하는 나카타의 말에 이극민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렇다면 초월의 영역에 들어갔다는 말인가? 아니, 히데오의 말에 따르면 나카타에겐 그런 재능이 없을 것인데? 무언가 특별한 깨달음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나카타의 말에 이극민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자신이 나카타에게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나카타는 초월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었는데, 만일 나카타가 초월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면 자신이 더 불리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카타는 마스터에 오른 지 벌써 십 년이 넘었고, 자신은 이제 2년이 지난 시점이니 마스터의 단계에서 경험은 나카타가 월등히 높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무를 믿고 부딪쳐 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히데오의 말에 따르면 나카타가 초월의 영역에 들어가기는 힘들 것이라 했으니 지금 나카타는 허세를 부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이라 한들 네놈 따위가 히데오를 감히 상대할 수 있겠느냐? 이제 본격적으로 해보자.”
말을 마친 이극민의 환도에는 넘실거리는 푸른 빛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마스터의 상징 소드 오러였다.
이극민의 소드 오러를 본 나카타 역시 이제 대화의 시간은 끝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의 일본도에 붉은 기운의 소드 오러를 띄웠다.
소드 오러는 사용자의 마나 성향 및 무공의 성향에 따라 달랐는데 이극민의 푸른색과 나카타의 붉은 색이 대비되어 한층 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문답무용이었다. 아까 전의 대결에 비해서 한층 더 빨라진 몸놀림으로 나카타에게 뛰어든 이극민은 여전히 부드러움은 남아 있지만 강렬한 기운으로 나카타를 공격했다.
이극민의 공격에 나카타는 붉은 오러가 실린 일본도로 그 공격을 막아냈는데 그 기세의 날카로움이 일반인이라면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베일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쾅-!
푸른 오러와 붉은 오러가 부딪쳐 강렬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그 충격파를 시작으로 푸르고 붉은 두 기운이 부딪치며 엄청난 충격파와 충격음이 연이어 발생했다.
쾅쾅쾅콰앙!!
이극민은 공세를 흘리지 않고 맞받아치고 있는지 아까와 같은 부드럽고 우아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면충돌의 양상이었다.
공방이 이어지며 나카타의 붉은 일본도는 한층 더 짙어져 마치 핏빛을 연상케 할 정도로 검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이극민의 푸른 환도 역시 시리디시린 푸른빛을 줄기줄기 뻗어내고 있었다.
지금 상태는 아직 젊고 활력이 넘지는 나카타의 공세를 깊은 마나와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이극민이 받아치고 있는 상태였다. 이극민은 폭급한 나카타의 공세에서 발생하는 허점을 노려서 틈틈이 공격하고 있었지만, 지금 공격의 주도권은 나카타가 갖고 있는 상황이었다.
‘역시 검기를 다루는 데는 훨씬 능숙하군. 시간을 끌수록 내가 불리하겠어. 어서 승부를 걸어야겠군.’
승부결을 하려고 마음먹은 이극민의 집중력이 대결을 시작한 이후 최고조로 올라갔다.
그 집중력에 따라 내부의 마나와 외부의 마나가 공명하며 이극민이 느끼기에 모든 것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초월의 영역이었다.
나카타와 자신의 공방은 여전히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극민이 보기에는 너무도 느리게 보였다.
지금도 자신의 복부를 향해 날카롭게 날아드는 나카타의 일본도가 있었는데, 아까와는 다르게 너무 느리게 날아와 하품이 날 정도였다.
이극민은 역시 느리게 움직이는 자신의 환도를 이용하여 일본도를 쳐내고, 연결 동작으로 나카타의 목을 쳐갔다. 느리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공세가 나카타의 공세보다는 월등히 빨랐다.
나카타 역시 이극민의 상태가 변한 것을 느꼈다. 기세가 바뀐 것이었다. 이극민은 아까 전까지의 급박한 표정은 보이지 않고, 마치 그 혼자 홀로 다른 공간에 서 있는 듯한 위화감을 보였다.
그리고 그 상태의 이극민은 나카타의 검을 손쉽게 쳐내고, 아까 전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나카타의 목을 공격했다. 나카타는 이극민이 어떤 상황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크윽! 초월의 영역이군! 어쩔 수 없군, 이 방법을 쓸 수밖에는…….’
아직 초월의 영역에 이르지 못한 나카타로서는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비장의 방법이 있었다. 이극민의 공세를 간신히 막아내며 살짝 뒤로 빠진 나카타는 혀로 자신의 입안을 더듬더니 작은 알약을 씹어 먹었다.
그 알약이 깨짐과 동시에 속에 있던 액체가 입안의 피부로 스며들어버렸고, 나카타는 신세계를 볼 수 있었다.
신경의 속도가 몇십 배는 가속된 느낌이었다. 생각의 속도를 몸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초월의 영역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 전까지는 이극민의 공격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의 공격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자의 말에 따르면 이 상태는 길어야 5분이다. 오래가지는 못해. 승부를 걸어야겠군.’
이극민의 공세가 눈에 보이는 이상, 나카타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초월의 영역에 들어간 이후 이극민에게 넘어갔던 주도권은 어느새 나카타에게로 다시 넘어왔다.
이극민이 밀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