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89화 (89/203)

# 89

현세귀환록

089. 출장(2)

뒤에서 듣고 있던 최강훈 역시 김강숙의 농담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 모습을 보며 말론도와 엘렌은 재미있다는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만일 강서영이 뒤를 돌아보았다면 최강훈도 얼굴이 달아올라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지만, 강서영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을 뿐이었다.

“다, 당연히 들어오죠…….”

“호호호. 그래 너무 늦지 않게 들어와. 키 하나는 카운터에 맡겨놓을게.”

“네, 차장님.”

남자 선배가 그런 말을 했다면 성희롱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40대 중반의 골드미스 김강숙 차장은 이런 수위 있는 농담도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적절하게 구사할 수 있는 센스가 있는 여자였다.

김강숙은 뒤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숙소로 들어갔다. 다른 계열사이지만 그래도 이사 직급에 있는 최강훈이 함께 있었으니 인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김강숙이 들어가자 말론도가 최강훈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최 이사님, 저도 엘렌과 먼저 숙소로 들어가 있겠습니다.”

말론도 역시 아까 전 김강숙의 말을 들었기에, 자신과 엘렌이 당연히 자리를 피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최강훈이 이사로 취임한 뒤로 말론도는 그에게 깍듯이 상급자의 대우를 해주었다.

어차피 최강훈은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자신보다 월등한 무력 수준을 갖고 있었고, 강민의 의동생과도 같은 존재였기에 비록 말론도가 나이는 훨씬 많을지라도 존대를 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론도는 전과 같은 약간 미묘한 관계보다 이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아……. 그, 그래요.”

말론도의 말에 최강훈은 아직도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대답했고, 이내 호텔 앞에는 최강훈과 강서영만이 남아 있었다.

다들 자리를 떠나고 나자 강서영은 아까 농담의 여파로 생긴 어색한 분위기를 덮기 위해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최강훈에게 말했다.

“강훈아, 우리 어디 갈까? 아. 출장 온 거니 최 이사님이라 불러야 하나?”

강서영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는지, 최강훈도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최 이사는 무슨. 평소처럼 불러요, 누나.”

“히히, 그렇지?”

짧은 대화에도 어느새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졌다. 평소처럼 분위기가 돌아오자 둘은 여행을 온 보통의 연인들처럼 신주쿠 근처 유명 관광지를 이리저리 찾아보았다.

출장이라 관광 가이드북 같은 것은 따로 챙기지 않았기에 강서영은 스마트폰으로 이리저리 구경할 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이미 저녁이니 멀리까지 갈 수는 없을 것 같고 여기 인근만 돌아보자. 어차피 여기도 신주쿠니까 이 인근에도 구경할 거리 많을 것 같아.”

“그래요, 누나.”

회사 일로 온다고 생각해서 이런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이렇게 단둘이 관광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최강훈은 물론이고 강서영까지 살짝 들뜨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둘 다 해외여행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서 강서영은 신주쿠 맛집을 검색했다. 아무래도 이런 기기를 사용하는 데는 최강훈보다 강서영이 익숙했기에 그녀가 리드할 수밖에 없었다.

“음…… 돈친칸이라는 돈카츠집이 유명하다던데 그리로 가 보자.”

“네, 누나.”

식사를 마친 이후 신주쿠 내 명소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는데 그 모습이 어느 연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관광지를 찾아가는 것은 주로 강서영이 리드했는데, 최강훈은 둘이 이렇게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나는지 여행 장소를 고르는 것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여자 친구와의 여행 자체가 처음이라 리드라는 자체를 잘 모르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너덧 시간을 넘게 신주쿠 인근을 구경하며 돌아다닌 최강훈과 강서영은 자정이 다되어가는 시간이 되자 내일을 기약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 * *

다음날도 스즈키 그룹과의 협상은 비슷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오전부터 키무라 부장과 줄다리기 협상을 했는데, 스즈키 그룹의 고위층에서는 아직 결정을 짓지 못했는지 지지부진한 상황만 이어졌다.

아무래도 그룹 고위층의 결단이 없다면 이번 출장에서 큰 진전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김강숙 차장의 분위기는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그녀는 이 프로젝트에만 두세 달 집중했었기에 어떻게든 성과를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김강숙의 눈치를 보고는 있지만, 강서영은 생전 처음 오는 해외에서 연인과 함께하고 있어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강서영의 담당 업무도 아니었고 단지 서포트를 위해서 온 것이라 그녀는 김강숙보다 부담감이 덜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김강숙은 어차피 업무 때문에 강서영에게 신경을 써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미팅을 마치고 나면, 김강숙이 먼저 강서영에게 밖으로 나가길 권했다. 최강훈과 데이트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화요일부터 오늘 목요일까지 3일 연속으로 미팅을 했지만 여전히 성과는 없었고 내일까지 성과가 없으면 이제 귀국을 할 시점이 되었다.

오늘도 성과 없이 미팅을 마친 김강숙은 다소 가라앉은 표정으로 먼저 숙소로 들어갔다.

강서영은 그런 김강숙의 모습에 왠지 모를 미안한 감정이 들어서 오늘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같이 숙소로 들어갔다. 하지만 김강숙은 강서영에게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후회 없이 놀다 오라고 오히려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강서영이 최강훈을 3년이나 기다린 이야기는 김강숙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배려해 준 것이었다. 또한 내일까지 일본에 있기는 하지만 내일은 미팅을 마친 후 바로 귀국이기 때문에,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김강숙의 말 역시 맞는 말이었다.

강서영은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김강숙의 말처럼 오늘이 일본에서 데이트를 할 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에 김강숙의 배려에 감사함을 느끼며 다시 최강훈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강서영과 최강훈은 데이트를 즐기며 하라주쿠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최강훈이 우뚝 멈춰섰다. 뜻밖의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익숙하기는 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잠시 멈춰 눈을 감고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마스터의 기감은 집중하지 않더라도 인근 100미터 정도는 자신의 영역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손에 잡힐 듯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최강훈은 그보다 넓은 범위를 보려 하고 있었다.

강서영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최강훈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최강훈의 심각해 보이는 모습에 그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난 뒤 최강훈은 눈을 떴다. 최강훈이 눈을 뜬 것을 확인하자 강서영이 그에게 물었다.

“강훈아, 무슨 일이야?”

최강훈은 뭔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만 크게 내색을 하지 않고, 그녀에게 답했다.

“누나, 미안한데 내가 확인해 봐야 할 일이 있어요. 오늘은 그만 숙소로 들어가지 않겠어요? 내가 말론도에게 연락을 할게요.”

갑작스러운 최강훈의 말에 강서영은 약간 당황했다. 일본에 처음 온 최강훈이 확인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에 강서영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 수 있게 설명해 주면 안 될까? 이렇게 그냥 숙소로 돌아간다면 나 너무 답답해질 것 같은데 말이야.”

강서영의 조리 있는 말에, 최강훈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미안해요, 누나. 제가 너무 성급했네요. 수아한테 쌍둥이 남동생이 있는 거 알죠?”

“아, 수강이라고 했던가? 우리 집에 같이 오지 못한 동생이 있다고 했었지. 근데 왜?”

“맞아요, 수강이. 그런데 조금 전에 마치 수강이의 기감이 느껴진 것 같아요. 근데 확실한 게 아니라서 한번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뭐? 제주도에서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어?”

“네. 3년이 넘게 지났으니 뭍으로 올라갔을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죠. 여기까지 왔는지 말이에요. 아직은 긴가민가하는 상황이라 한번 확인해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아요.”

과거에는 몰랐지만 마스터가 된 이후에는 사람마다 기감이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능력자의 마나 파문을 느낄 수가 있게 된 것이었다. 아직 일반인들의 미약한 마나 파문까지 구분하기는 힘들었지만, 능력자들의 마나 파문은 확실히 차이가 났다.

다만 한수강의 기감은 마스터가 된 이후에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에 방금 느낀 기감이 한수강의 것인지 아닌지 다소 헷갈리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최강훈의 설명을 듣고 나니 강서영은 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 한수강을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최강훈에게는 그가 돌봐줘야 하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마치 강민이 그들을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음…… 그래, 그런 일이라면 가 봐야겠네. 여기서 숙소까지 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론도한테 연락 안 해도 돼.”

“그래도, 만일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말론도 올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만일은 무슨, 일본처럼 치안이 좋은 곳에서 말이야. 그럼 나중에 봐~”

강서영은 강민이 그녀와 최강훈이 같이 있게 하려고 최강훈을 출장에 동행시켰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최강훈은 실제로 강서영의 경호를 위해서 따라온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최강훈은 돌아선 그녀의 팔을 덥석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누나, 제 말 들어주세요. 말론도에게 연락하면 5분도 안 돼서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최강훈의 진지한 모습에 강서영은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연하남이지만 이럴 때는 마치 오빠와 같다는 생각을 하며 강서영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래…….”

강서영의 대답을 들은 최강훈은 말론도에게 연락하여 이곳의 좌표를 불러주었다. 말론도의 능력이라면 5분은커녕 1분도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최강훈이 그녀를 데려다주고 올 수도 있었지만 지금 한수강으로 추정되는 기감은 최강훈이 느낄 수 있는 기감의 경계에 거의 다다라 있었다.

기감이 느껴지는 곳과 반대 방향인 숙소 쪽으로 그녀를 데려다준다면 그의 기감을 놓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멈추어 있어 그 기감을 잡고 있지만, 얼마나 멈추어 있을 것인지는 몰랐기에 그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다만 이런 사실을 알아챈다면 강서영은 그녀를 두고 어서 떠날 것을 종용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런 기색을 그녀에게 보이지는 않았다.

최강훈의 급한 연락을 받은 말론도는 전화를 마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최강훈과 강서영 옆에 갑자기 나타났다. 급하다는 것을 알아챈 말론도가 안개화를 통해서 순식간에 날아온 것이다.

말론도가 나타난 것을 알아챈 최강훈은 급히 강서영에게 인사했다.

“누나, 여기 말론도가 왔으니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럼 내일 봬요!”

“강훈아! 늦더라도 숙소 들어오면 문자라도 남겨!”

“네! 누나!”

최강훈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속도를 내어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최강훈은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기 위해서 마법기의 인식 장애 마법까지 가동해 달려나갔다.

공교롭게도 최강훈이 이동을 시작한 시점부터 한수강이라고 추정되는 인물 또한 도쿄 외곽을 향해서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최강훈의 속도는 보통 능력자에 비해 월등히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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