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현세귀환록
088. 출장(1)
김강숙 차장과 강서영, 그리고 그녀들을 경호하기로 한 말론도, 엘렌과 최강훈은 예정대로 화요일 오전 김포공항에서 일본행 비행기를 타고 도쿄 인근의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강서영이 강민의 동생의 입장으로 간다면 전용기를 통해서 움직였겠지만, 한 명의 직원으로 업무상 출장을 가는 것이기에 당연히 일반 비행기를 이용했다.
김강숙 차장은 출장에 경호원이 따라 오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어제 새로 KM가드 이사에 취임한 최강훈이 경호 시스템을 파악하기 위한 동행이라는 말에 표면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일종의 경호 시스템 평가 및 테스트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핑계고 최강훈 이사가 강서영과 같이 일본을 가기 위해 일부러 테스트라는 명목을 사용한 것이라고 내심 의심하고 있었다. 김강숙 외에 다른 직원들도 아마 그런 의심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너무 급작스럽고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임원급의 요인도 아니었고 출장 장소가 치안이 불안한 곳도 아닌데 경호원을 동행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 아니었다.
어제, 그러니까 월요일자로 KM가드의 이사로 부임한 최강훈은 부임 첫날부터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이사가 된다는 것은 재벌가의 가족들에게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이사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강민이 후견인으로 있다는 말에 논란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야깃거리는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정작 놀라운 일은 KM가드의 임원진들과 인사를 마친 최강훈이 두 번째로 향한 곳이 그룹 지주의 전략기획실이었다는 것이다.
단지 기획실을 방문했다는 것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이 아니라, 그룹의 전략기획실을 방문하여 자신의 여자 친구인 강서영을 잘 부탁한다고 팀원들에게 이야기한 것이 모두를 놀라게 한 이유였다.
강서영과 미리 이야기했던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최강훈은 다시 한번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며 고개 숙여 팀원들에게 인사했다.
당연히 그룹 내 메신저는 난리가 났다. 그 날 하루 내내 열녀가 키운 연하남이 왕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수군거렸다.
어차피 나중에 강서영의 정체가 밝혀지면 모든 것이 이해될 상황이지만, 그 전까지는 최강훈이 아깝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몇몇 여직원들은 강서영을 질투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타입의 강서영이 3년간 쌓아왔던 이미지가 있었기에, 최강훈이 그녀의 남자 친구라는 사실에 대한 질투나 시기보다는 축하를 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업무 파악도 되지 않은 신임 이사가 경호 테스트를 위해서 일본에 간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순수한 의도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강서영의 출장 일정은 최강훈이 이사로 취임하기도 전에 정해져 있던 상황이라 강서영과 사전에 서로 맞춘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다들 최강훈이 강서영과 함께하기 위해서 무리한 일정을 잡아서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김강숙 차장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직급이 깡패라고, 그것을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심지어 KM가드의 사장조차 강민이 직접 지시를 했다고 하니 그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스페셜팀은 강민의 직속이었고 최강훈은 그 스페셜팀을 관리하는 이사로 왔으니 KM가드 사장의 지시를 받을 입장도 아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계획되어 있는 일정에 따라 공항에서 바로 신주쿠에 있는 스즈키 그룹의 본사로 이동하였다. 사전에 약속을 잡아놓았기에 스즈키 그룹의 본사에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장년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맞이하였다.
“반갑습니다, 김 차장님. 저는 니시오 과장입니다.
“늘 전화 통화만 하다가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김강숙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강서영 대리입니다.”
김강숙 차장 역시 일본어에는 능통하였기에 자연스럽게 니시오 과장과 인사를 주고받은 후 강서영을 인사시켰다.
“안녕하십니까. 강서영 대리입니다.”
“아, 강 대리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그런데 원래 한 대리님이 오시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원래 한민호가 오는 것으로 알고 있던 니시오 과장은 그가 아닌 강서영이 온 것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김 차장에게 물었다.
“한 대리는 얼마 전 사고를 당해서 병원 치료를 받는다고 같이하지 못했네요. 그래서 강 대리가 같이 왔어요.”
“아, 그러시군요. 일단 이리로 오시지요.”
니시오 과장은 뒤에 서 있는 최강훈 일행을 보았지만 누가 보아도 경호원의 복장이었기에 별도로 인사를 나누진 않았다.
그러면서 니시오 과장은 내심 치안이 확실한 일본에 오면서 무슨 경호원이냐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을 밖으로 표현할 만큼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김강숙, 강서영과 인사를 나눈 니시오 과장은 회의장으로 그녀들을 안내했다. 그리고 잠시 양해를 구한 뒤 곧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인을 모시고 왔다. 니시오 과장이 그를 수행하는 모습이 한눈에 봐도 그의 상급자임을 알 수 있었다.
니시오 과장이 데리고 온 키무라 부장은 깔끔하게 다듬어진 머리 스타일에, 다소 통통한 체형으로 무테안경까지 쓴 모습이 전형적인 일본의 비즈니스맨으로 보였다.
“반갑습니다. 저는 키무라 부장이라고 합니다.”
키무라 부장은 자신을 소개하며 김강숙과 강서영에게 악수를 권했고, 그렇게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은 후 회의를 시작하였다.
먼저 김강숙 차장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장님, 저희 KM과 스즈키 정밀 산업 매각 건은 거의 다 합의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일정을 지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시 협상을 파기하실 생각입니까?”
김강숙은 은근히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핵심을 물어봤다.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것이 김강숙의 전략이었다.
예상대로 키무라 부장은 약간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키무라 부장 역시 비즈니스 쪽에서는 산전수전을 다 겪어보았기에 이내 자세를 잡고 대답하였다.
“허허, 김 차장님, 성격도 급하십니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물어보시는군요. 벌써 협상만 한 달째 하고 있는데 그렇게 쉽게 협상을 접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시기가 좋지 않아서 그 시기를 보자는 것입니다.”
“시기는 지금이 딱 적절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만? 어차피 스즈키 그룹에서 정밀 공업을 매각하실 생각이라면 지금 상황이 좋지요. 이제 스즈키 정밀 공업도 노후기기 교체 시기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노후기기 교체 이야기가 나오자 강서영이 준비했던 자료를 찾아 김강숙 차장에게 건네주었다. 이번 미팅에서 서포트를 맡은 그녀의 역할이었다.
원래는 김강숙과 한민호가 담당한 업무이기에 며칠 만에 업무를 파악해야 했던 강서영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강서영이 건네준 자료를 받은 김강숙은 해당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지금 이 시기가 지나면 기기 노후화로 인해 매출이 본격적으로 감소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계속 사업을 영위하려면 기기 교체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매각하려면 지금이 딱 좋은 시기이지요.”
김강숙 차장이 날카롭게 핵심을 찔렀다. 이미 KM그룹에서는 각종 보고서 및 조사를 통해서 스즈키 정밀 공업의 기기 상당 부분이 노후화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김강숙의 말처럼 기기를 교체하지 않는다면 기기 노후화 때문에 매출액 감소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스즈키 정밀 공업에서는 지금이 회사의 가치를 가장 높게 받을 수 있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김강숙의 말에 키무라의 눈이 약간 커졌다. 이 정도까지 자세하게 자신의 회사를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자료 조사를 많이 해오셨군요. 좋은 시기라……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룹의 입장에서는 가장 높은 가격을 쳐주는 회사와 거래를 하는 것이 맞는 일이겠지요. 조금 더 시기를 기다리다 보면 더 좋은 가격이 형성될 것 같기도 하고요.”
좋은 가격이라는 이야기에 김강숙은 다시 한번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던졌다.
“현승 이야기입니까?”
현승이라는 이야기에 당황했는지 키무라는 자세를 바로 하며 외마디 신음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어, 어떻게…….”
현승에서 극비리에 접촉을 해왔고, 아직 협상 테이블조차 오픈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키무라는 김강숙이 현승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희 KM그룹을 과소평가하시는 것 같네요. 저희도 내외부적인 정보망이 있습니다.”
키무라는 김강숙의 말에 더 이상 숨길 수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허…… 제가 한 방 먹었네요. 차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현승에서 접촉해 왔는데, 협상도 해보지 않고 저희가 헐값에 스즈키 정밀을 넘길 수는 없지요.”
“저희가 제시한 가격이 헐값은 아닐 텐데요?”
“아, 저희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껏 협상을 진행해 왔지요. 하지만 가격이라는 것은 항상 상대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현승에서 더 높은 가격을 부른다면 저희로서는 그쪽과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요.”
김강숙 차장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현승에서 관심을 둔다는 첩보만 입수하였을 뿐인데 키무라의 반응을 보니 벌써 한 차례 접촉을 한 것 같았다.
어차피 키무라의 입장에서는 경쟁을 통해서 가격을 올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니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려 했다면 그녀가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부장님도 저희 KM의 자금력을 아시니 다른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단지 가격만을 생각하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많지 않습니까? 예컨대 고용 승계의 문제나, 사업 물량의 문제 등도 있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현승에는 이미 현승테크라는 정밀기계 쪽에서 선두권에 있는 업체가 계열사로 있지 않습니까? 아마 스즈키 정밀이 인수되면 현승테크와 업무 영역이 상당히 겹치고 그로 인해서 인력 구조조정이나 사업 물량의 감소는 당연한 수순이겠지요.”
“흐음…….”
키무라 부장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현승과의 협상 테이블 마련을 다소 망설인 감도 있었다.
키무라 부장의 반응에 이야기가 먹힌다고 생각한 김강숙 차장은 준비했던 당근과 채찍을 풀어내며 그를 설득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한참 동안 회의를 이어갔음에도 키무라 부장의 권한에 한계가 있는 것인지 최종적인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김강숙 차장 역시 키무라 부장이 위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내일 오전에 다시 회의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였다.
미팅을 마치고 나니 이미 시간은 저녁 무렵이 되었고 그제야 일행은 숙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호텔 앞에 도착하자 김강숙 차장이 뒤에 있는 경호원들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그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강서영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능력자인 세 명은 김강숙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강 대리, 일단 오늘 미팅은 끝났으니까. 남자 친구랑 시내 구경이라도 좀 하고 와.”
김강숙의 말에 강서영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네? 그래도 돼요, 차장님?”
“그래, 강 대리는 서포트하러 왔으니 너무 신경 쓰지는 말아. 어차피 디테일한 부분에서는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이 많을 테니까. 난 숙소로 들어가 한 대리랑 전화 좀 해야겠어.”
“아…….”
“그래도 내일 일정이 있으니 너무 늦게 들어오지는 말고. 그리고 잠은 호텔에 들어와서 잘 거지?”
김강숙은 잠을 이야기하며 눈을 찡긋거렸다. 최강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그런 김강숙의 농담에 강서영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직 키스 한 번 못한 강서영에겐 너무 자극적인 농담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