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87화 (87/203)

# 87

현세귀환록

087. 대화(2)

벤자민의 말처럼 오래전부터 천왕가의 태상가주는 헤이안의 쇼군과 친분을 나누고 있는 사이였다. 그래서 이능 세계의 많은 사람은 쇼군이 죽은 이후 어떤 방식으로든 천왕가에서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추측했는데, 의외로 천왕가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덕분에 유니온에서는 외부의 방해 없이 일본 내부의 세력들을 정리했고, 2년간 차근차근 일반 세계와 이능 세계 양쪽에서 헤이안의 세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결국 2년 만에 4조각으로 갈라진 헤이안의 2조각을 유니온의 일본 지부로 흡수 합병하였다.

하지만 쇼군이 죽은 지 2년이 지난 시점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갑자기 천왕가에서 일본의 이능 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천왕가의 태상가주 이극민이 직접 일본에 진출하여 헤이안의 출신 이능력자들 규합하기 시작했다. 명분은 과거 쇼군과의 친분을 빌미로 그의 복수를 내세웠다. 지리멸렬하며 유니온의 일본 지부로 점차 흡수되고 있던 헤이안의 잔당 중 상당수는 이런 이극민의 명분에 넘어갔다.

헤이안이 다시 이극민을 중심으로 결집하려 하는 모습을 보이자, 유니온에서는 이극민을 저지하기 위해 A1팀과 A2팀을 투입했다.

이들은 AA급 팀에 비해서는 다소 떨어졌지만 A급 2개 팀이면 A+등급인 이극민 정도는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유니온의 판단은 빗나갔다. 이극민이 예전의 이극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유니온의 공작에 의해 이극민이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A1, A2 두 개 팀이 그를 처리하기 위해 나섰다.

궁지에 몰린 이극민을 보고 팀원들은 이제 그를 잡았다고 판단했는데, 그 순간 이극민의 검에서 눈부신 흰 빛이 쏟아져 나왔다.

마스터의 상징, 오러 블레이드였다.

오러 블레이드로 마스터임을 증명한 이극민은 패닉에 빠진 A1, A2팀을 도륙해 버렸다. 애초에 이극민이 마스터인 것을 알고 대응했다면, 이렇게 무기력하게 죽지는 않았을 요원들이었지만 마스터라는 이름에서 주는 공포로 인하여 제대로 된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모두 이극민에게 척살당해 버린 것이었다.

이후 유니온은 과거와 같이 적극적으로 헤이안을 흡수하지 못했고, 반면 천왕가에서는 유니온의 방해에도 쇼군의 복수라는 명분을 내세워 헤이안의 나머지 1조각을 그들의 손에 넣었다.

한편 이렇게 외부의 세력이 일본의 이능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위기를 느낀 마지막 한 조각에 소속된 이능력자들은 북해도에 있는 나카타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카타를 수장으로 옹립하며 마지막 반전의 기회를 노렸다.

이렇듯 지금 일본의 이능계는 크게 3파전 양상이었다.

많은 요원을 투입하고 헤이안의 절반 가까이 되는 조직을 흡수한 유니온의 일본 지부가 규모로는 가장 컸지만, 마스터인 태상가주까지 나선 천왕가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앤더슨 총재가 직접 나선다면 이제 갓 마스터가 된 이극민을 처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총재가 직접 나서기에는 아무래도 위원회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왕가에서는 적극적으로 한국에 있는 본진까지 투입하며 유니온과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마치 이번 일에 사활을 건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북해도에 있는 나카타의 세력은 유니온과 천왕가가 양패구상(兩敗俱傷)하기를 기다리는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고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앤더슨은 벤자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AA1팀 장비 제작은 다 끝났습니까?”

장비라는 이야기에 벤자민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걸 말씀드리려 하였습니다. 테스트해 본 결과 이제는 더 이상 마스터를 두려워하고만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마스터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앤더슨은 반색하며 벤자민에게 되물었다.

“그래요?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성능이 우수한 것인가요?”

“네. 이제는 더 이상 A팀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AA1팀의 이름을 이제부터는 S1팀이라고 바꾸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장비를 사용하는 AA2팀과 AA3팀도 S2팀과 S3팀으로 같이 변경할 예정입니다. 어떻습니까?”

“S급을 상대할 수 있으니 당연히 S의 이름을 가져야죠.”

1년 전 미국에서 나타난 S급 마물은 유니온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S급 마물은 지금까지는 십여 년에 한 번 정도 나타났었는데, 최근 웜홀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5년간 벌써 세 차례나 나타났다. 그러니 S급 마물이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 유니온에게 충격을 준 것은 아니었다.

유니온에 충격을 준 이유는 이번에 나타난 S급 마물이 마나 공격에 대한 저항력, 즉 항마력이 무척이나 뛰어났다는 데 있었다.

마나 장비로 무장한 유니온 요원들의 공격은 마물에게 큰 효과가 없었고 못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원래 S급으로 강한 마물이 항마력까지 지니고 있자, 기존의 마나 장비로는 거의 피해를 주기 힘들었다. 그나마 A급 이상 요원들의 직접 공격은 다소 피해를 줄 수 있었지만 마물을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앤더슨 총재가 나서서 극에 다다른 염동력으로 마물의 몸을 붙잡고, 방어 장막으로 마물의 항마력을 중화시키며 강화된 주먹으로 마물의 핵에 타격을 주어 마물을 해치웠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잡은 마물의 사체는 여전히 항마력을 띄고 있었고, 마물의 마정석 역시 마나를 억누르는 항마력을 지닌 희귀한 성질의 마정석이었다.

이를 토대로 유니온의 연구개발진은 무기와 방어구를 개발했고, 그것이 이번에 완료되어 현장에 지급된 것이었다.

“그런데 세 개 팀이나 구성이 되던가요?”

“네, 그 마물에서 얻은 마정석과 사체로 세 개 팀 분량의 장비 제작이 가능했습니다. AA3팀은 AA1팀과 AA2팀에 비해서 다소 역량이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이번 장비를 착용하면 과거 AA1팀보다는 강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S1팀이라면 마스터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오, 단지 막는 것이 아니라 잡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네. 마스터를 잡을 전술 플랜까지 이미 만들어진 상태입니다. 나중에 총재님께서 직접 테스트를 한번 해보시지요.”

“흐음, 좋습니다. 아, 어차피 실전 테스트라면 이번에 일본에서 시험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군요.”

앤더슨 총재는 이극민 태상가주를 염두에 두고 일본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벤자민의 생각은 다른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을 꺼냈다.

“그것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새로운 장비를 갖춘 S팀은 나중에 위원회를 상대하는 데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히 위원회에 우리 전력을 다 보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도 맞는 말씀이군요. 음…… 그럼 이렇게 합시다. S3팀만 사용해봅시다. 어차피 S3팀이라 하더라도 과거 AA1팀보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하니 마스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천왕가의 태상가주는 견제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사실 이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단은 북해도에 머무르고 있는 나카타를 이용하여 천왕가의 태상가주와 붙여볼 생각을 했습니다. 최근 정보부의 공작으로 인해서 둘 사이가 많이 틀어져서 조만간 한번 대결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이극민 태상가주와 나카타의 대결이라는 말에 앤더슨 총재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호오, 그런가요?”

“그런데 총재님 말씀을 들으니 전투가 끝난 후 우리가 그 뒤를 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때 S3팀을 운영하는 것이지요.”

“그렇군요. 그런 확실한 기회가 있다면 S2팀까지는 동원해도 되겠네요. 잘하면 이번 일로 일본의 이능 세계를 모두 정리할 수도 있겠군요.”

일본에서의 계획이 개괄적으로 세워지자 앤더슨은 무언가 생각난 듯 벤자민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 한국에 있다는 연금의 일족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설득이 안 되고 있나요?”

연금의 일족이라는 이야기에 벤자민은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네. 작년에 제가 직접 가서 접촉한 이후로 한국 지부장이 종종 들러서 반응을 보는데 전혀 반응이 없는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연금의 일족이 가졌던 유산은 얻었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같은 일족이라는 책임 의식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작년 여름 이극민 태상가주가 마스터인 것을 알게 된 이후, 유니온에서는 연금의 일족이라 판단되는 강민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었다. 아무래도 그때까지는 마스터를 상대할 역량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앤더슨 총재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마스터에 오른 이극민을 잡기는 힘들었기에 같은 마스터 급인 강민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계획했던 대로 벤자민이 강민을 방문하여 위원회가 연금의 일족이 사멸하게 된 원인임을 알렸다. 그러면서 당시 유니온의 불가피성 또한 알리며, 장차 유니온 역시 위원회와 대적할 것임을 알렸다.

즉, 위원회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상호 간의 협조를 요청했으나, 강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고 결국 협상은 무산되고 말았다.

벤자민의 말에 앤더슨 총재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벤자민에게 물었다.

“흐음…… 다른 설득할 만한 요인은 없던가요?”

“이미 평생 쓰고도 남을 부를 가졌고, KM그룹을 만들어서 사회적으로 높은 명망도 얻었습니다. 무력 또한 마스터급에 이르는 상황이니 저희가 제시할 만한 카드가 없더군요.”

“참 아쉽군요. 그런데 혹시 천왕가처럼 우리 유니온에게 적대적으로 변할 가능성은 없나요?”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그쪽에서는 우리 유니온을 이용하여 거래를 하고 있는 입장이니 지속적인 거래 관계를 유지하다 보면 그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여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S급의 강자니 관리를 소홀히 하지는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벤자민에게 앤더슨이 물었다.

“그런데 아직도 올림포스에서는 퍼니셔의 인식 장애 마법을 해제하지 못하고 있는가요?”

“네. 올림포스의 평소 역량으로 보면 예상 밖의 상황인데, 아직도 해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올림포스에서는 쇼군이 죽은 이후 그곳에 펼쳐진 대지의 기억을 읽었는데, 그곳에는 유리엘이 인식 장애 마법을 펼쳐놓았기에 아직도 그때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마법의 조종(祖宗)이라고 자부하는 올림포스로서는 자존심이 무척 상하는 일이겠군요.”

“그렇지요. 상황이 그렇다 보니 위원회의 위원 중에서도 올림포스의 능력에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허허, 그 정도일 줄이야. 의장이 제대로 마음먹고 나선다면 그 앞에서 당당할 사람들이 몇 없을 텐데. 황제도 자리에 없는 곳에서는 욕을 먹는다더니 딱 그 꼴이군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길어야 몇 달을 호언장담했던 올림포스에서 3년이 지나도록 해제를 못 하고 있으니, 올림포스에서도 할 말은 없을 것입니다.”

“의장의 체면이 말이 아니겠군요.”

“뭐 그렇다고 해도, 전혀 새로운 체계의 마법을 푸는 것이다 보니 그 마법을 연구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깨나 성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올림포스로서도 손해만 보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기는 하겠군요.”

“아무튼 퍼니셔가 누군지 확인되면 위원회보다 우리가 먼저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적의 적은 친구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벤자민의 대답을 듣고자 한 질문이 아닌지 앤더슨은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국에서 활용 가능한 마스터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올림포스도 노력하겠지만 우리도 정보부를 총동원해서라도 퍼니셔를 확인하고 영입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위원회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요.”

“네,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치는 앤더슨과 벤자민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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