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현세귀환록
082. 결실(4)
둘의 이야기를 듣던 진창식 과장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며 강서영을 공격했다.
“아무튼 3년의 결실을 맺었다니, 부럽네 부러워. 이거 애인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런 진창식의 말에 강서영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
“부러우시면 과장님도 얼른 여자 친구 만드세요~ 아, 그때 그 소개팅은 어떻게 됐어요?”
“아, 그, 그게…….”
“에이~ 또 그러셨나 보네. 진 과장님은 눈 좀 낮추셔야겠어요. 그래도 최 대리님이 신경 써서 해줬다던데 또 이렇게 끝난 거 보면 말이에요.”
“아, 그게 아니고. 그 여성분이 내가 별로 마음에 안 드신 것 같아서…….”
“에~ 제가 듣기에는 과장님이 연락도 잘 안 받아주셨다고 하던데요? 대답도 뜸하게 하고. 아닌가요?”
강서영의 추궁에 진창식은 속삭이는 말로 작게 이야기했다.
“그, 그래. 내 스타일이 아니었어. 강 대리, 최 대리한테는 비밀로 해줘. 내 입장이 곤란해지니 말이야.”
진창식의 속삭이는 말투에 강서영 역시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네, 과장님. 비밀 지켜드릴게요. 히히.”
강서영과 학과는 다르지만 같은 대학교 선배인 진창식 과장은 신입 사원으로 들어온 강서영을 잘 챙겨주었다.
물론 처음에는 이성으로서의 호감이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감정은 지웠다.
그래서 이런 장난 섞인 사적인 이야기에도 어색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물론 진창식 과장은 강서영이 강민의 동생인 것은 모르고 있었다.
현재 회사에서 강서영이 강민의 동생인 것을 아는 사람은 강민과 유리엘을 제외하면 단 네 명밖에는 없었다. 그 네 명은 장태성 기획실장, 이현수 인사팀장, 비서실의 이진욱 과장, 그리고 김세나였다.
장태성 실장과 이현수 팀장은 강서영을 입사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알아야 하는 입장이었고, 이진욱 과장은 몇 년 전 한경련 총회에서 강서영을 직접 보았기에 비밀로 하기는 힘든 상황이어서 알리게 된 경우였다. 김세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전부터 알고 있던 상황이었다. 네 명 모두 강민의 지시에 의해서 입단속이 된 상태였다. 그 네 명을 제외하고는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장태성은 자신의 아들인 장찬영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강민이 당분간 강서영이 자신의 동생인 것을 감추고 회사에 다니게 하고 싶다고 장태성에게 부탁하였고, 고지식한 장태성은 보안을 위해서 자신의 아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김세나 역시 장찬영과 사귀면서도 강서영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강서영이 강민의 동생임이 알려진다면 그녀와 함께 근무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장찬영을 믿지만 비밀이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고, 그녀와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는 장찬영이 불편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반면 초반에 정보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장찬영은 모두가 장태성의 아들인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회사 임직원들은 장태성이 원칙주의자인 것을 알고 있기에 장찬영이 장태성의 힘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장찬영을 일반 신입 사원 다루듯이 함부로 다루지는 않았다. 장태성이 별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룹의 이인자인 장태성의 눈치가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띠리링~ 띠리링~
한창 세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강서영의 자리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강서영이 전화를 들기 전에 모니터의 액정을 살펴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해 보니 직속 상관인 장태성 실장이었다.
“어? 실장님이시네. 무슨 일이시지?”
이미 5시 반이 넘어 퇴근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고, 현안 사안은 이미 오전에 보고했기 때문에 자신을 찾을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기에 강서영은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강서영 대리입니다.”
-강 대리, 자리에 있었네요. 잠시 실장실로 와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강서영은 오늘 데이트를 기대하며 퇴근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 장태성이 자신을 찾아 약간 놀랐다. 강서영은 곧장 업무용 수첩을 들고 실장실로 들어갔다.
실장실의 비서도 이미 언질을 들었는지 강서영이 오자 내부 인터폰을 통해서 그녀가 왔음을 알렸고, 바로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실장실에는 장태성 실장 외에도 김강숙 차장과 한민호 대리가 함께 앉아 있었는데, 회의용 테이블에 이런저런 서류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한창 회의가 진행 중이었던 것 같았다.
“아, 강 대리 왔어요? 여기 앉아요.”
강서영이 자리에 앉자, 장태성 실장은 다짜고짜 그녀에게 물었다.
“강 대리 다음 주에 바쁜 일정 있나요?”
장태성의 의도를 알 수는 없었으나 강서영은 빠르게 다음 주 일정을 생각해 보았고 중요 일정 몇 가지를 언급했다.
“이번에 엔터테인먼트 사업 신규 진출 건에 대해서 검토 중인데, 다음 주 중에 엔터테인먼트 업체 세 군데와 미팅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것 외에는 지금 당장 바쁜 일은 없습니다.”
“그렇죠. 강 대리가 엔터 사업 건을 맡고 있었죠. 그것도 올해 진출할 사업이긴 한데…… 음, 어쩐다…….”
장태성이 무언가 시킬 것이 있는 뉘앙스를 풍기자 강서영이 먼저 물어보았다.
“실장님,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아, 김강숙 차장이 헤이안 그룹 산하에 있던 스즈키 정밀 공업 인수를 추진하던 것은 알고 있죠?”
헤이안 그룹은 일본 최대 규모의 그룹이었는데 몇 년 전에 대주주 및 수뇌부 간의 갈등 때문에 계열 분리를 단행하여 지금은 네 개의 회사로 쪼개진 상태였다.
그중 스즈키 그룹으로 분리된 계열에서 헤이안 정밀 공업, 지금은 스즈키 정밀 공업을 시장에 매물로 내놓았는데, KM그룹에서 그 회사의 인수를 추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밀기계 쪽은 국내 기업보다는 일본 기업의 실력이 나은 부분 많았기에 KM정밀이 있었지만, 스즈키 정밀기계를 인수하여 시너지를 낼 계획이었다.
사실 스즈키 정밀의 규모가 KM정밀보다 월등히 크기에 인수한다면 스즈키 정밀을 중심으로 그룹 내 정밀기계 산업을 재편할 계획에 있었다. 그리고 김강숙 차장이 그 담당자였다.
지난 3년간 KM그룹은 극적인 성장을 하였다. 다각적인 신규 사업 진출 및 M&A, 그리고 기존 사업의 과감한 투자로, 현재는 자산 규모 순위로 치면 백산과 현승에 이어 재계서열 3위의 자리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이러한 급격한 성장은 강민의 과감한 자금 투자를 기반으로 하여, 우량 사업과 기업을 발굴하는 장태성의 사업 안목과 적재적소에 있는 인재들의 노력이 함께 어우러진 결과였다.
김강숙 차장과 같은 부서인 강서영은 김강숙이 하는 일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대답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 설명하기가 쉽겠군요. 그간 협상을 통해서 스즈키 그룹과는 어느 정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현승그룹에서 이 협상에 뛰어들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요.”
현승그룹이라는 이야기에 강서영 역시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현승은 이미 현승테크가 정밀기계 업계의 선두권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중복 투자를 하려고 하는 건지…….”
아직 규모가 작은 KM정밀에 비해서 현승테크는 업계 선두권의 정밀기계 업체였다. 그렇기에 비슷한 규모의 스즈키 정밀을 인수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녀가 의문을 가질 만하였다.
“우리도 그 이유를 알아보려 노력했지만, 그룹 고위층의 결정이라는 정보밖에 입수하지 못했네요. 그래서 담당자였던 김 차장을 보내서 스즈키 그룹의 현장의 분위기를 살펴 가능하다면 협상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왜……?”
“강 대리도 알다시피 최근 한민호 대리가 계단에서 낙상하여 오른쪽 어깨를 다치지 않았습니까? 왼쪽 다리도 좀 불편한 상황이고. 이런 상황에서 김 차장을 서포트 하기가 힘들겠지요. 그래서 김 차장을 서포트 하며 같이 움직일 사람을 찾다 보니 강 대리가 생각나서 부르게 된 겁니다. 부서에서 강 대리처럼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도 몇 명 없잖아요?”
“아…….”
그제야 강서영은 장태성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을 한민호의 대타로 일본에 보낼 계획이었던 것이었다.
강서영은 과가 불문과여서 불어로는 상당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그 외 영어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사실 일본어는 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리엘이 전에 만들어 준 마법기에는 통역마법 또한 들어 있었기에 언어에 문제를 겪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일본 클라이언트가 방문하였을 때 통역을 맡은 경험도 있었다. 따라서 사내에서는 그녀가 일본어도 잘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김 차장과 강 대리가 우리 전략기획실에 단둘 있는 여자 직원이지 않나요? 한 대리가 괜찮으면 당연히 업무를 같이한 한 대리가 가야겠지만, 어차피 해당 업무를 잘 모르는 사람을 보낼 거면 같은 여직원이 더 편할 것 같아서 말이죠.”
지금 전략기획실의 현원이 12명인데 여자 직원은 비서를 제외하면, 여기 김강숙 차장과 자신 둘뿐이었다. 비서는 소속 또한 전략기획실이 아니었기에 실제로도 여자 직원은 두 명뿐이라 할 수 있었다.
장태성의 말처럼 여태껏 한민호가 서포트를 해왔었기에 그가 가는 것이 당연했지만, 지금 상태라면 서포트는커녕 짐이 될 판이었다. 그래서 일본어에 능통하고 같은 여자 직원인 강서영을 부른 것이었다.
사실 엔터사와의 약속은 한 주 정도 미룬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최강훈이 수련이 끝나서 데이트할 생각에 부풀어 있는 강서영에게는 다소 김빠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회사 일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강서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실장님 말씀 알겠습니다. 엔터사와의 약속은 한 주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요?”
강서영이 간다고 하자 김강숙 차장이 말을 받았다.
“서영 씨, 아니, 강 대리가 간다면 나도 편하지요. 일단 다음 주 화요일에 출발해서 금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이에요. 오늘 금요일이라 이런 지시하기는 미안한데, 디테일하게는 아니더라도 출발하기 전에 스즈키사와 협상했던 내용에 대해서 숙지를 해주세요. 그래야 인수에 대한 서포트가 가능할 거니 말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차장님.
이야기가 잘 풀린 것 같자 장태성이 웃으며 회의를 마쳤다.
“그럼 이렇게 정리한 것으로 합시다. 김 차장은 일본에서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바로 보고해 주세요. 합의되면 바로 우리 쪽에서는 제반 인수 절차 진행할 테니 말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실장님.”
다 일어서서 나가려는데 장태성이 강서영을 다시 불렀다.
“아, 강 대리는 잠깐 남아줘요. 따로 할 말 있으니.”
이윽고 김강숙과 한민호가 나가고 실장실에는 장태성과 강서영만 남게 되었다. 둘만 남으니 장태성의 카리스마 있던 표정에 온화한 미소가 감돌았다.
“강 대리, 아니, 서영 아가씨는 요즘 힘든 일 없는가요?”
아가씨라는 말에 강서영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가씨라뇨. 그냥 강 대리라고 해주세요. 여긴 회사잖아요.”
“그럼 호칭은 강 대리라고 하지요, 허허. 아무튼 회장님께서 강 대리 이야기 많이 합니다.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언제든지 그만두게 하려고 하시더군요.”
“그래요? 집에서는 전혀 그런 이야기를 안 해서…….”
“저도 처음에는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벌써 3년이 지났네요.”
“실장님도 제가 버티지 못할 거로 생각하셨나 봐요?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