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현세귀환록
081. 결실(3)
“흐흥~”
강서영은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그녀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콧노래 소리를 들은 옆자리의 진창식 과장이 파티션 너머로 그녀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가 본 강서영은 이번 주 내내 작업하던 신규 사업에 대한 검토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회사 일로는 콧노래를 부를 만한 특별한 일이 없는 것이었다.
평소에 못 보던 강서영의 그런 모습에 궁금증이 생긴 진창식 과장은 그녀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강 대리,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콧노래까지 부르는 거야? 좋은 일이면 나도 같이 알자고. 나누면 두 배가 될지 아나? 허허허.”
진창식 과장의 말에 강서영은 무의식중에 부르던 콧노래 인식하고 약간 당황했지만, 별일 아니라는 듯이 진창식 과장에서 말했다.
“아, 별거 아니에요. 남자 친구가 좋은 일 있다고 맛있는 거 먹자고 해서요. 히히.”
강서영은 아까 점심을 먹고 나서 최강훈과 통화를 했는데, 최강훈이 상기된 목소리로 이제 집중적인 수련은 끝났으니 그 기념으로 퇴근 후에 만나서 저녁을 함께하자고 말했었다. 그 말이 그녀의 기분을 이렇게 좋게 만든 것이었다.
둘이 사귄 지는 3개월이 되었지만 최강훈의 수련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해서,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3년 가까이 기다린 이후 사귄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온지라 불만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녀는 인내심이 있었고 남자를 배려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상대가 중요한 일이 있다면 집중할 수 있게 해줄 만한 이해심도 있었다.
최강훈도 그런 상황이 미안했는지 실마리를 잡았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강민이 말하는 기준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녀를 달랬었다.
사실 이미 마스터에 올라서 강민이 말한 기준을 충족시켰으나, 그것은 최소 기준이었고 진정한 마스터에 올라야 완전한 인정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최강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잡았다던 실마리를 풀어서 성과를 얻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밖에서 데이트를 하는 것도 좋았지만, 이제 3년간의 결실이 완전히 맺어졌다고 생각하니 더 기분이 좋아 콧노래까지 나왔던 것이었다.
그런 강서영의 반응에 진창식 과장은 부럽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이거 참 남자 친구 생겼다고 너무 티 내는 거 아냐, 강 대리?”
강서영은 3개월 전 최강훈과 사귀면서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점심시간에 슬쩍 흘리듯 말했었다. 그래서 남자 친구를 언급하는데도 망설임은 없었다.
사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성격과 귀여운 외모 때문에, 신입 사원 때부터 강서영은 남자 직원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진창식 과장도 그런 남자 사원 중 하나였기에 잠시 그녀를 마음에 두기는 했지만, 10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 나이 때문에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물론 30대 후반, 당시에는 30대 중반의 진창식 과장은 아직 결혼 전이고 외모나 패션에도 관심이 있어서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키도 180센티미터 가까이 되었고, 안경을 쓴 외모도 지적으로 보이는 편이었다. 또한 한국대 경제학과를 나온 인재라 인기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애초에 나이도 어리고 신입 때부터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선을 그어 놓은 강서영에게 들이댈 만큼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강서영은 신입 사원 때부터 주변에서 들어오는 대시에 곤란한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데 왜 만나지 않느냐는 말에 다만 3년간 공부를 하러 가서, 다녀온 이후에 사귀기로 했다고 말해놓은 상태였다.
그녀의 그 말에, 사귀지도 않는 사이라면 틈이 있다고 본 몇몇 남자 직원들이 여전히 그녀에게 접근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안 된다고 항상 철벽을 친 덕분에 입사 후 1년 정도가 지나니 더 이상의 접근은 없었다. 다만 열녀라는 별명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3개월 전 드디어 그 남자가 공부를 마치고 와서 사귀기로 했다고 부서에 슬쩍 알렸고, 지금은 전 회사에서 열녀가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며 그녀를 축하해 주었다.
진창식의 말이 장난임을 알고 있는 강서영은 능청스럽게 맞대응하였다.
“3년을 기다렸는데 이 정도 티는 낼 수 있지 않겠어요?”
“하긴, 강 대리도 대단해. 사귀지도 않은 사이면서 3년이나 독수공방으로 기다렸으니 말이야. 그러니까 열녀라는 말이 나오지. 허허허.”
“호호, 독수공방은 무슨 독수공방이에요. 3년간 회사에 적응한다고 저도 정신없었어요. 연애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말이에요.”
“허 참, 강 대리가 그렇게 말하면 연애하는 신입 사원들은 뭐가 되나?”
“아. 그런 건 아니고요. 비상경계 출신인 제가 업무 따라가려면 그 친구들보다 훨씬 노력해야 해서 그렇죠, 뭐.”
실제로 강서영은 경영이나 경제 쪽으로는 지식이 많이 부족했다. 2년 차 때까지도 회사에 남아서 따로 공부를 할 정도로 업무 연찬에 노력을 쏟았다. 강민은 그런 그녀에게 굳이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말을 했지만, 그녀는 일을 배우는 것이 재미있다면서 계속할 것을 고집했었다.
진창식도 그녀의 그런 신입 시절을 봤었기에 인정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신입으로 들어오면 회사에서는 다시 일을 가르쳐야 하는데, 강 대리가 열심히 하기는 했지. 그러니까 이 전략기획실에서 신입부터 3년이나 버텼지.”
전략기획실은 그룹 내에서도 가장 힘이 있는 부서임과 동시에 능력이 안 되면 버티기조차 힘든 부서였다. 그래서 신입 사원이 들어와도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1년 차일 때는 잡무처리를 하다 2년 차가 되면 다른 곳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그녀 아래 기수로 전략기획실에 들어온 신입 사원 두 명은 팀 내에서 인정받지 못해서 1년을 채우고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고 말았다.
그렇기에 비상경계 출신인 강서영이 인정을 받고 3년째 이곳에 근무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뭐, 저만 그런가요? 찬영이 오빠. 아니, 장 대리도 3년째 하고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
장찬영 또한 강서영과 마찬가지로 3년째 전략기획실에 있었는데, 초반에는 장태성 실장의 입김이 어느 정도는 작용하지 않았냐는 이야기가 많이 돌기는 하였다. 입사 때는 장태성의 성향상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부서 배치 정도는 영향력을 행사할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같이 근무해 본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장태성의 입김이 있든 없든 장찬영의 업무 능력은 뛰어나고, 충분히 전략기획실에서 근무할 만한 인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다른 팀에서는 아직도 그런 말이 나올지 몰라도 기획실 내에서는 그런 말은 없었다.
강서영의 뒤쪽 파티션에 앉아 있던 장찬영은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그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진 과장님, 제 이야기하고 계신 거지요? 어쩐지 아까부터 귀가 가렵더라니. 하하.”
“이거 장 대리도 양반은 못 되겠구만. 허허.”
진 과장은 장찬영의 너스레를 받아치며 같이 웃었다. 둘의 대화에 끼어 한참을 이야기하던 장찬영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강서영에게 말을 건넸다.
“아, 서영아. 세나가 시간 되면 오늘 저녁 같이 먹자는데, 어때? 시간 괜찮아?”
“오늘은 안 돼. 강훈이가 저녁에 보자고 했거든. 이제 커플 사이에 안 끼어도 될 거야. 히히.”
“안 낀다니? 설마?”
“그래, 강훈이 이제 공부 다 마쳤다고 했어. 지난 1년간 커플 데이트에 나 끼워준다고 고생 많았어~”
“그래? 축하한다. 너도 드디어 3년간 기다린 보람이 생기겠구나. 근데 진짜 만 3년을 채우네. 너도 그 친구도 대단하다, 대단해.”
강서영은 대단하다는 말에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대단하기는 뭐. 히히.”
“아무튼 너도 이제 남자 친구 만난다고 하니, 이제 방해꾼 없이 우리끼리 데이트할 수 있겠네. 하하.”
방해꾼이라는 말이 걸렸는지 강서영은은 장찬영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뭐야? 진짜 방해꾼으로 생각한 거야? 세나한테 물어봐야겠다!”
“야, 농담이지 농담~ 세나한테 말하지 말고~”
장찬영과 김세나는 유명한 사내 커플이었다. 전략기획실장의 아들과 평범한 사원의 결합이라 유명해졌다기보다는 둘이 만나는 과정 때문에 더 유명해졌었다.
처음 장찬영은 강서영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부서 배치 이후 강서영이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깨끗이 마음을 접었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 여성에게 접근해 봤자 서로가 힘들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 호감이었지 아직 마음에 둔 상태까지는 아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같은 부서에 근무하면서 서로 친해졌는데, 함께 업무에 대한 공부를 하며 저녁 식사를 같이하는 일도 잦았다. 그때마다 강서영의 절친인 김세나도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부서이지만 같은 회사의 신입 사원이고 같은 기수의 동기였기에 큰 어색함은 없었고, 자주 만나며 자연스럽게 김세나와도 친해졌던 것이었다.
이후로도 3명이 같이 다니는 일이 많이 있었는데, 장찬영은 점점 김세나에게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끼다가 입사 후 1년 만에 고백했다. 장찬영의 판단에는 김세나도 자신에게 호감은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백을 들은 김세나는 뜻밖이라 생각했는지 시간을 좀 달라고 했었다.
그때는 이미 장찬영이 장태성 실장의 아들인 것이 암암리에 다 알려져 있었기에 김세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찬영이 그녀에게 고백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두가 김세나가 당연히 그 고백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세나는 고민 끝에 결국 장찬영의 고백을 거절했다. 어머니의 이혼 때문에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던 김세나는 아직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는지, 그녀 역시 장찬영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그를 밀어냈던 것이었다.
당연히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건도 변변치 않은 김세나가 그룹 이인자의 아들이자 우수한 신랑감인 장찬영의 고백을 거절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장찬영은 서로 호감이 있다고 생각해서 고백했는데 뜻밖의 거절을 당하자 약간 당황했지만, 사람 마음은 역시 모르는 것이라 생각하며 깔끔히 포기하려 하였다.
이미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했는데 그래도 자신을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사귀려고 계속 노력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둘 사이를 이어준 사람이 강서영이었다. 강서영이 둘 사이의 관계를 아쉬워하여 장찬영에게 자신만이 아는 김세나의 상황을 말해줬던 것이었다.
그녀는 김세나가 장찬영을 좋아하면서도 어머니의 일 때문에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그를 밀어낸 것이라고 조금만 노력을 해달라고 하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장찬영은 김세나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면 해볼 만하다고 판단하여 거의 1년간을 그녀의 트라우마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1년 만에 그녀의 마음을 치유하며 고백에 대한 승낙을 얻어냈던 것이었다. 이러니 회사에서 이 커플이 유명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김세나는 장찬영과의 데이트에 강서영을 자주 끼워 주었다. 전까지는 3명이 다니다가 둘이 사귄다고 강서영만 혼자 다니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둘이 사귀게 된 이유도 강서영의 노력 때문인 상황에서 그녀를 혼자 다니게 한다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강서영은 처음에는 부담스럽다고 싫다고 하였지만, 김세나가 그렇게 안 하면 자신이 불편해서 안 되겠다며 강권하여 어쩔 수 없이 종종 그들의 데이트에 함께 했었다.
장찬영이 말하는 방해꾼은 그런 의미였다. 물론 장찬영도 김세나와 강서영 사이를 알고 있고, 둘이 만나는데 결정적인 강서영의 역할을 알고 있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당연히 세 명이서 보는 것보다는 둘이 보는 것이 좋았기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방해꾼 이야기를 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