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현세귀환록
077. 실전(2)
‘이대로는 안 돼. 십여 분도 버티기 힘들겠어. 역시 살을 주고 뼈를 칠 수밖에 없겠어.’
하지만 살을 주고 뼈를 치는 것도 기회가 날 때의 이야기였다. 빠른 속도를 내세우며 최강훈을 공략해가던 암살자는 이제는 샤이닝 소드를 만들 생각도 않고 최강훈의 마나를 고갈시켜 그를 해치우려는 계획인지, 더 빠른 속도로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5분여가 지나자 최강훈은 혈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미 온몸은 상처투성이였고 어느 한 곳 성한 데가 없었다.
반면 암살자는 아직 상처 하나도 나지 않은 상태였다. 두 등급 위의 강자를 상대하는 것은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다.
이제 최강훈의 머릿속에는 이곳이 마법진 속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가 살아오며 치렀던 그 어떤 전투보다 지금의 전투가 흉험했고 위험했다.
최강훈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3분가량이 지나자 이제 최강훈의 마나가 얼마 남게 되었다. 더 이상 샤이닝조차 유지하기 힘들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최강훈에게 암살자의 단도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단도에 난 가느다란 금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샤이닝 상태인 최강훈의 환도에 수백여 차례 부딪혔던 암살자의 단도는 이미 미세한 금이 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번개처럼 휘두르는 단도의 표면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최강훈 역시 지금처럼 집중력이 최고조에 오른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것을 보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 금들을 본 최강훈은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단전에서 미미한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마나가 거의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최강훈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단전의 마나를 끌어올려 암살자의 단도를 가격했다. 이번에는 암살자 자체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단도를 노린 일격이었다.
파삭-!
몸을 노린 공격이 아니었기에 암살자는 단도로 최강훈의 공격을 받아냈는데, 이미 단도의 내구도가 한계에 다다랐는지 최강훈의 강력한 일격에 단도가 대여섯 조각으로 박살 나고 말았다.
갑자기 무기가 상실됨에 따라 암살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당황하는 순간이 최강훈이 생각한 마지막 기회였다.
만일 최강훈 역시 그것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면 그 또한 암살자와 마찬가지로 당황하여 기회를 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은 최강훈이 노리고 만든 상황이었기에 최강훈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단도를 상실한 암살자가 제대로 된 자세를 잡기도 전에, 최강훈의 환도는 단도를 부순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아 암살자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여전히 마나를 담고 빛나는 상태로 날아오는 최강훈의 환도를 보고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암살자는 목을 한껏 젖혀 재빨리 검의 궤적을 피하려 하였으나, 검의 속도는 암살자가 피하는 속도보다 빨랐다.
사샥-!
결국 환도는 암살자의 목 삼분의 일가량을 잘라냈다. 전체가 아닌 삼분의 일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에는 충분하였다.
갈려진 암살자의 목에서는 분수 같은 피가 쏟아져 나왔는데 그 모습은 마치 진짜 사람과 같이 느껴졌다.
“헉…… 헉…….”
암살자의 죽음과 함께 극도로 고조되었던 집중력이 서서히 내려갔고, 그에 따라 신체의 고통도 다시금 느껴졌다.
최강훈은 살아남았다는 기쁨과 동시에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내려다본 자신의 몸은 어느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곳곳이 갈라지고 찢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왼쪽 어깨는 살이 한 뭉텅이는 날아가 있었고 오른쪽 옆구리는 깊이 갈라졌는지 아직도 울컥울컥 피가 솟고 있었다.
* * *
강민과 유리엘은 마법진 표면의 화면을 통해 최강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법진의 표면에는 다양한 각도에서 최강훈을 보여주는 스크린과 그의 체내 마나 흐름까지 잡아내는 스크린 등 십여 개의 스크린이 있었다. 그리고 정시아의 마법진 역시 같은 방식의 스크린이 있었다.
둘은 마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듯한 모습으로 최강훈과 정시아가 각각 싸우는 모습을 보았는데, 정시아보다 최강훈이 먼저 상대방에게 승리하자 둘은 동시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최강훈이 이기는 것을 본 유리엘이 먼저 강민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 민의 말대로 시아보다 강훈이가 먼저 이겼네요. 전 그래도 등급 차가 적은 시아가 먼저 이길 줄 알았는데 말이죠.”
“강훈이는 승부 감각이 있어. 두 등급이나 떨어지는 자신이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힘들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래도 강훈이는 상성이 좀 불리했고, 시아는 상대적으로 상성이 유리한 편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실전 경험에서도 차이가 있지.”
“그렇다면 민은 저런 식으로 끝날 줄도 알았어요?”
“방식까지는 몰랐지만, 필사의 각오를 한 강훈이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낼 줄 알았어.”
강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리엘은 강민에게 다시 물었다.
“여튼 오늘은 이기긴 했지만, 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이니…… 한 단계 낮추는 게 어떨까요? 힐링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만신창이가 된다면 한동안 움직이기 힘들 것이고, 서영이도 걱정할 거잖아요.”
유리엘이 하는 걱정의 절반은 최강훈이 아니라 강서영에게 가 있었다.
어차피 강민이 잔류 마나를 남겨둔 이상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상처 입은 모습을 본다면 일반인인 그녀로서는 충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리엘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강민이 그녀에게 대답했다.
“내가 과대평가를 한 것이 아니라면 강훈이가 계속 이 단계로 하고 싶어 할 거야. 그 녀석 보기보다 승부 근성과 투쟁심이 있거든. 그리고 위험해야 실전 감각을 기를 수 있겠지. 그렇지 않다면 단순 수련과 다를 바가 없을 거야.”
“그렇긴 하죠. 일단 다시 불러와야겠네요.”
* * *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최강훈은 언제 유리엘이 수련 마법진을 닫고 자신을 부를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마법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최강훈은 마법의 종료를 기다리면서 방금 해치운 암살자를 살펴보았다.
암살자의 잘린 목 부위에서는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기에, 마치 자신이 실제 사람을 죽인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었다.
‘이거 진짜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최강훈이 이 상황에 대해서 정말 현실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할 때 즈음이었다.
갑자기 주위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암살자의 피와 시체가 빛나는 푸른 가루로 변하여 사라졌다. 그리고 여기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서 순간적으로 앞이 흐려졌다.
최강훈이 다시 눈을 떠보니 그가 있던 울창한 숲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있었고, 자신은 처음처럼 그 수련 마법진의 중앙에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몸만이 그 수련이 환상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유리엘은 최강훈이 돌아온 것을 보고 그에게 다가가려 하였는데, 최강훈은 유리엘이 다가서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마나 고갈에 체력까지 고갈되고 출혈까지 많은 최강훈의 상태는 예전에 기절했어야 마땅한 상태였으나, 그는 강한 정신력으로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며 강민과 유리엘을 얼굴을 보자 수련 마법진에서 한껏 끌어올렸던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기절해 버린 것이었다.
유리엘은 무너지는 최강훈을 향해 손짓하여 바닥에 닿기 전에 허공으로 몸을 띄워줬다.
1미터 정도 떠오른 최강훈의 몸은 유리엘이 가까이 가면서 점점 바닥으로 내려갔고, 유리엘이 그의 옆에 설 때쯤 최강훈의 등은 바닥에 닿아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최강훈을 바라보며 유리엘은 그의 몸을 향해 손짓했고 어느새 최강훈의 몸은 따뜻한 은색의 빛에 휩싸였다.
빛 속에서 최강훈의 상처는 하나둘 아물었고, 가장 큰 옆구리와 팔의 상처도 새살이 돋아나며 나아가고 있었다.
유리엘이 최강훈을 치료하는 동안 정시아도 상대를 처리했다. 화면상에 보이는 정시아의 상태는 최강훈에 비해서는 멀쩡하였으나, 그녀 역시 군데군데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정시아의 상대는 중세풍의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였는데, 최강훈의 경우와는 반대로 정시아가 빠른 움직임을 통해 주도권을 잡고 파상공세를 펼쳤다.
정시아는 공세를 펼치며 처음에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기사가 막는 것에 급급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사는 막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기회를 보고 있던 것이었다.
기사가 단순 공격에 충격을 입지 않는 것 같기에 정시아는 진혈을 끌어올려 더 강한 공격을 가하기 위해 마나를 모으려 하였다. 그런데 그사이 기사의 검이 번개처럼 날아왔다.
뜻밖의 공격에 정시아는 서둘러 피하려 하였으나, 그녀는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고 허벅지에 검상을 입고 말았다. 다리 부분을 공격당하여 속도가 좀 떨어졌지만 무거운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보다는 앞서고 있었다.
정시아에게 문제는 허벅지의 검상이 아니었다. 상처를 입으며 실전임을 자각한 후 기사의 강맹한 공격에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는 것이 문제였다.
실전이라도 그 기사가 자신보다 역량이 떨어지는 상대면 두려움까지는 들지 않았겠지만, 공방을 나눠보며 기사의 역량이 자신보다 우위라는 것을 확인한 상태였다. A+급 상대라는 유리엘의 말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정시아도 과거 실전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자신보다 낮은 능력자와의 싸움이었고 이렇게 자신보다 강한 사람과의 생사결을 펼친 적은 거의 없었다.
결국 이후의 페이스는 기사에게 넘어갔다. 정시아가 적극적인 공격보다는 방어에만 급급하였기 때문이었다.
몇 군데의 상처가 더 생기고 정시아가 궁지에 몰리며 정신적으로 위축될 무렵 그녀의 내부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는 오기와 양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이 수련을 이겨내고 더 강해져야겠다는 투쟁심의 발현이었다.
그녀 역시 필사의 각오로 전투에 임하자 상성상 유리했던 정시아가 서서히 주도권을 되찾아왔다.
결국 30㎝ 정도 길게 뻗친 손톱을 단도처럼 사용하여 기사의 뒷덜미에 꽂아넣으며 정시아는 승리할 수 있었다.
그 후 현실로 돌아온 정시아는 유리엘에게 간단한 치료를 받았다.
정시아는 최강훈이 먼저 돌아와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한 등급 위의 수련이지만, 최강훈은 두 등급 위의 수련이었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빨리 돌아와 있는 그의 모습에 패배감까지 들었다.
하지만 최강훈의 옷은 넝마나 다름없었고, 기절해 있는 거로 보아 자신의 상태가 더 낫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 덕분에 그 패배감을 다소 지울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강훈이 일어났고, 강민은 최강훈과 정시아를 앉혀놓고 전투를 복기하였다.
“강훈아, 마지막에 단도를 부수고 목을 잘라낸 일격은 좋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긴장을 놓치지 않고 기습을 당하지 않았다면 주도권을 잃지 않고 좀 더 쉽게 전투를 풀어갈 수 있었을 것이야. 어떻게 생각하나?”
“……네, 형님. 처음에 긴장이 풀어진 건 사실입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어떠냐, 두 단계 위의 수련이. 네 스스로 무리라고 판단한다면 한 단계는 낮춰줄 수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최강훈은 한 단계를 낮춘다는 말에 강민을 바라보고 말했다.
“저는 분명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최강훈은 결심을 굳히는 듯 잠시 멈췄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형님 말씀대로 저는 실전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강해질 것입니다.”
“그래. 그런 마음이라면……. 오늘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하자.”
최강훈과의 복기를 끝낸 강민이 이번엔 정시아를 보며 말했다.
“시아, 너는 이번 전투에서 어떤 잘못을 했다고 생각해?”
강민이 자신의 전투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정시아는 허벅지에 상처 입은 후 꼴사납게 전투를 치렀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대답했다.
“……실전에 익숙하지 않아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어. 미안해, 오빠. 앞으로는 안 그럴게.”
정시아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니 강민은 별도의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든 한 번의 잘못은 할 수 있었다. 그 잘못이 반복되면 문제라 할 수 있었다.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강민은 오늘 수련을 마치면서 둘에게 말했다.
“그래, 둘 다 앞으로 기대해 보지. 오늘보다 쉬운 날은 드물 것이니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오늘이 쉬웠다는 강민의 말에 최강훈과 정시아는 흠칫 놀랐지만, 그들의 눈에 담긴 결의는 약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새로이 굳은 결심을 한 지금부터가 진정한 수련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