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현세귀환록
076. 실전(1)
다만 강민은 두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두 가지를 말해줄게.”
“두 가지?”
“먼저, 하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네가 복지 재단의 이사장이 되어서 회사의 시스템에 어긋난 결정을 하여도 관계없다는 거야. 어긋나면 어긋난 대로 거기에 맞추면 되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내가 그걸 맞춰줄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
“그리고 두 번째는, 네가 신입 사원으로 간다고 하니 더 이상 말리지는 않을게. 하지만 그곳에서 마음 상하며 지낼 필요는 없어. 언제든지 아니다 싶을 때는 말해. 너를 위한 자리는 준비되어 있으니 말이야. 굳이 힘든 사회생활을 참아가면서까지 버틸 필요는 없다는 거야.“
“알겠어, 오빠.”
강서영도 회사 생활이 힘들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다. 하지만 연수원에서 재미있었던 기억과 실무를 경험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함께하여 강민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강민은 아직 현실을 겪어보지 못한 강서영이 실무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행여 상처받는 일이 생긴다면 얼른 포기하고 그녀가 원래 가질 수 있었던 자리로 돌아오게끔 이런 부연설명을 하였다.
“아, 한 가지만 더 말해줄게.”
“어떤?”
“연수원에서는 네가 내 동생인 걸 몰랐지만, 회사에서는 아마 아는 사람이 생길 거야. 오히려 모를 가능성이 더 작겠지. 아무래도 회사에서 오래 지낸 사람들이니 말이야. 만약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네 눈치를 보고 네게 과도하게 잘해준다는 생각이 들면 아마 사람들이 네 정체를 알아차렸다고 생각해도 될 거야. 그때는 더 이상 신입 사원으로 있어 봤자 배울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테니, 그냥 이사장 자리를 맡도록 해.”
“아…… 알겠어, 오빠. 나 잘해볼게. 히히.”
강민은 강서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유리엘에게 말했다.
“유리, 당분간 재단 이사장은 유리가 겸직하는 게 어때?”
강서영이 연수원에서 나오는 시점에서 직무를 맡을 수 있도록 복지 재단의 구성은 끝난 상태였다.
그런데 강서영이 당분간 신입 사원으로 일을 배우고 싶다고 하니 유리엘에게 잠깐 재단의 이사장을 맡는 것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유리엘은 그것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그러죠, 그런 일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호호호.”
* * *
집 앞 공터에는 푸른 빛을 가진 마법진 2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영구 마법진은 아니었고, 당분간만 연습을 위해 활용할 마법진이었다.
유리엘은 마정석 가루로 마법진을 그린 후 손가락 세 마디 정도 크기의 스타 스톤 두 개를 각각 마법진의 핵으로 삼아서 진을 설치하였다.
마법진을 사용할 정시아와 최강훈은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신비로운 빛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는 되었나?”
강민의 말에 멍하게 마법진을 바라보던 둘은 흠칫 놀라며 대답하였다.
“네! 형님.”
“네~ 오빠.”
“아까도 말했지만, 이 마법진으로 하는 수련을 단순한 환상으로 본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거야. 실전과 동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거다.”
“네~!”
둘은 동시에 대답하였다. 하지만 아직 마법진에 들어서지 않아서 강민의 말을 실감하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사실 마법진으로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는 정시아도 최강훈도 들어보았지만,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았다.
원체 대단한 강민과 유리엘이기에 거짓을 말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겪어보지 않았기에 실감을 못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둘의 기색에 강민은 노파심이 들어 한 번 더 이야기하였다.
“일단 강훈이는 상급 익스퍼트 정도의 단계에 맞춰져 있어. 유니온 기준으로 한다면 A급 정도의 능력자에 맞춰진 것이지. 시아는 최상급 익스퍼트, A+급에 맞춰진 것이고.”
강민의 말에 정시아는 약간 따지듯 강민에게 물었다.
“오빠, 강훈이는 두 등급이나 높은 수련인데, 왜 난 한 등급 높은 수련이에요?”
정시아의 질문에 강민은 실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그럼 너도 두 등급 올려서 마스터급, 그러니까 S급으로 수련하고 싶다는 거야?”
아직 수련 마법진을 겪어보지 못한 정시아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대답했다.
“네, 오빠. 강훈이가 한다면 나도 할 수 있어요.”
“한 번 받아보면 그런 말이 안 나올 텐데. 지금 내 판단으로는 네가 S급 수련 마법진으로 들어간다면 시아 너 살아서 나오기는 힘들 거야.”
강민의 진지한 말에 정시아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정시아가 강민과 이야기하는 사이 최강훈은 몸을 풀면서 컨디션을 점검했다.
정시아의 수련 마법진보다는 한 단계 낮지만 자신의 등급보다는 두 단계나 높은 마법진이었다.
수련이라기보다는 현실과 같은 상황이니 실제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으나, 최강훈은 강민을 믿고 있기 때문에 강민이 자신이 이겨내지 못할 수련을 시킨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강민은 유리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유리엘은 마법진 앞에 서 있는 둘에게 말했다.
“준비가 다 되었으면 마법진의 중앙에 서 봐. 일단 처음이나 해당 등급의 몬스터를 한 마리 처치하면 수련을 종료하는 것으로 할게. 그러니까 시아는 A+급, 강훈이는 A급 몬스터를 한 마리씩 처치하면 귀환 마법진이 열릴 거야.”
정시아와 최강훈은 직경 5미터 정도의 마법진의 중앙에 각각 걸어 들어갔다.
그들이 각각의 마법진 중앙에 서자 잠잠하던 마법진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유리엘은 짧은 시동어를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들이 서 있는 마법진은 이제껏 은은한 빛만 뿌리고 있었는데,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3미터 정도의 빛이 바닥의 문양에서 솟구쳤다.
빛과 함께 둘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는데, 마치 순간 이동 마법진처럼 둘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것 같았다.
하지만 순간 이동 마법진과는 다르게 빛의 기둥은 없어지지 않았고, 둘을 집어삼킨 마법진의 외벽에는 기하학적인 문양과 일반인이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이 둥둥 떠 있어 마법진이 가동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 * *
순간적으로 몸이 아득하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정신을 놓을 뻔한 최강훈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강훈이 자리한 곳은 마치 정글과도 같은 숲이었는데, 주위에는 처음 보는 나무와 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나무 사이사이로 내리쬐는 햇볕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는 마치 실제 정글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와…… 현실과도 같은 수련이라고 하더니 진짜 현실감이 있네.”
아직도 강민이 말한 현실과 같다는 말을 마치 가상현실쯤으로 이해했던 최강훈은 압도적인 현실감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보았다.
“통증도 그대로인 걸 보니 진짜 현실과 같은 모양인가 보네. 누나 말대로라면 A등급의 마물이 있다는 말인데…… 어디 있지?”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최강훈이 생각한 수련 마법진은 정시아와 대련했을 때 유리엘이 만든 공간 왜곡 마법진과 같은 마법진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랬기에 마법진의 안으로 들어가면 A등급 몬스터가 떡하니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몬스터를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판국이었다.
‘일단 이 정글 속에는 있겠지? 어차피 수련 마법진인데 누님이 그리 크게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
혹시 모를 기습을 경계하며 최강훈은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한참을 둘러보아도 유리엘이 말한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뭐지? 누님이 실수할 리는 없을 텐데.’
한참 긴장하며 주위를 살폈지만 찾고 있던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자 내심 긴장이 풀린 최강훈은 새삼 수련 마법진의 환경에 감탄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현실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최강훈은 등 뒤에서 자신을 노리는 날카로운 기감이 느껴졌다. 기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뒤를 돌아본 최강훈은 달라붙는 검은색 옷을 입고 검은 복면까지 쓴 전형적인 암살자 복장의 괴인이 단도를 들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챙-
최강훈은 수련 마법진에 들어오면서부터 꺼내어 들고 있던 환도를 이용하여 단도를 쳐냈다.
원래는 단도를 걷어냄과 동시에 회전하는 힘으로 각법을 펼치려는 계획이었으나, 단도에 실린 힘이 최강훈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여태껏 상대해왔던 정시아의 힘에 육박하는 역도가 실려 있는 단도에, 역습은커녕 힘에 밀려 자세마저 흐트러졌다.
암살자는 그런 최강훈을 두고만 보지 않았다. 기회를 잡은 듯 최강훈의 요혈을 노려가며 단도를 휘둘렀다.
요혈만을 방어하는 최강훈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암살자는 방어가 약한 팔과 다리 역시 공격권에 넣고 있었는데, 드디어 암살자의 단도가 최강훈의 팔을 스쳐 지나가며 상처를 내었다.
‘윽, 이거 진짜야! 진짜!’
처음 암살자의 단도를 막을 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으나, 그 단도가 자신의 몸을 스치며 피륙에 상처를 내니 최강훈은 깨달았다. 이것이 정말 실제라는 것을 말이다.
실전과도 같다는 말을 들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마법진이라는 생각에 어차피 환상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던 최강훈은 실제 상처가 나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실제라는 것을 깨달으며 머리가 차갑게 식었지만, 한번 잃은 기세를 찾아오지는 못했다.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는 암살자의 공격에 최강훈은 간신히 방어만 하고 있었는데 요혈을 방어하기에도 급급해 다른 부위는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한참 동안 파상공세를 막아가던 최강훈은 이대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약간 무리를 해서 급하게 샤이닝 소드를 끌어 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샤이닝 소드를 쓰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기회를 보는 건지 암살자는 아직 샤이닝 소드를 끌어 올리지 않고 있었기에, 어기충검의 샤이닝 상태로 만든 자신의 검으로 암살자의 검을 튕겨냈다.
샤이닝 상태의 검은 절삭력뿐만 아니라 그에 실린 힘조차 일반 검에 비하여 월등하였기에 암살자의 단도를 튕겨내며 여태껏 밀리던 기세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암살자는 최강훈의 샤이닝 소드를 보곤 크게 뒤로 물러나며 다시 자세를 잡으려 하였다.
아마 자신의 단도에 기를 주입하여 샤이닝 상태로 만들려는 것 같았다. 이 암살자 역시 샤이닝 상태로 만드는 것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최강훈은 이번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암살자의 공세에 밀렸던 자신 역시 몸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였지만,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암살자 역시 샤이닝 소드를 만들어 다시금 파상공세에 나설 것이 틀림없었다.
방금 교전으로 아직 기량이 암살자에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판단한 최강훈은 샤이닝 소드까지 만든 암살자의 단도를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때문에 몸을 추스르지 않고 곧장 공격에 나섰다. 이미 몸의 이곳저곳에 난 상처가 신음을 내게 하였지만 최강훈은 이를 악물고 암살자에게 환도를 찔러넣었다.
채챙-!
암살자 역시 최강훈의 기세를 느꼈는지 기를 끌어올리는 것을 멈추고 환도를 쳐냈고, 다시 물러나 샤이닝 상태로 만들 틈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강훈도 필사적이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다음번에는 자신의 떨어진 목이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피륙의 상처에서 오는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집중력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었다.
암살자의 역량이 최강훈을 능가하였기에 여전히 상처는 최강훈이 입고 있었지만, 최강훈의 샤이닝 소드를 받아내는 암살자의 단도 자체에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최강훈이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마나량에는 한계가 있고 최강훈의 샤이닝 소드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최강훈 역시 B급의 자신보다 A급의 암살자가 더 많은 마나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현상만 유지하는 공방으로는 자신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예전 자신이 C등급 때 B등급의 슌스케를 꺾었던 것보다 오히려 더 힘든 상황일 수도 있었다.
최강훈은 수련 마법진이라고 긴장을 풀고 있던 조금 전의 자신에게 발길질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