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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귀환록-75화 (75/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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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세귀환록

    075. 재회(2)

    한미애와 반갑게 해후를 마친 강서영은 오랜만에 가족 모두와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은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최강훈과 정시아도 같이 자리를 하였다.

    다만 한수아는 지금 겨울방학이 끝나서 학교에 가 있는 상황이라 함께 하지 못하였다.

    식사 자리에서 강서영은 연수원에서 있었던 재미난 일들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하였는데, 연수원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었기 때문에 이야깃거리도 많았다. 식사가 끝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이야깃거리는 끊이지 않았다.

    지금도 강서영은 연수원에 있었던 연애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남녀 간의 애정사는 예나 지금이나 인기 있는 주제였다.

    “그러니까 C반에 있던 최진호가 D반의 김승아를 처음부터 좋아했다는 거야. 근데 그 좋아한다고 표시를 냈던 것들이, 오히려 승아 입장에서는 진호가 그녀를 싫어한다고 오해하게 만든 것들이었대.”

    강서영의 말에 옆에 있던 정시아가 말을 받았다.

    “그래서요, 언니? 그래서 둘이 사귀게 된 거예요? 아니에요?”

    강서영도 정시아가 적극적으로 반응해주자 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우리는 다들 승아가 진호를 찰 거라고 생각했거든. 우리가 봐도 진호가 한 일들은 좀 그랬으니까. 근데 승아도 진호한테 호감이 있었다 하더라고. 그래서 결국 사귀기로 했대. 모두 깜짝 놀랐지, 크크큭. 웃기지 않아?”

    “그러게요, 언니. 호호호. 진짜 웃기네요.”

    사실 연애 이야기는 재미있는 주제는 맞지만, 당사자들을 아는 경우에나 재미있었지 이렇게 다들 모르는 사람에 대한 연애 이야기는 그렇게 재미있는 소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시아는 적극적으로 그녀의 말에 호응해 주었다. 그런 정시아의 모습에 강서영은 그녀를 괜찮은 아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정시아가 노리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정시아는 강민이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파악한 강서영의 성향으로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설령 만약 자신이 강서영의 눈 밖에 나서 그녀가 자신과 같이 있기 싫다고 한다면, 강민은 당장 자신을 내보낼 것이라고 판단했다.

    때문에 강서영의 마음에 들기 위해 정시아는 그녀의 말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었다.

    강민은 강서영과 한미애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과거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떠났던 강민이 바라던 삶이 이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십만 년에 가까운 삶을 보냈지만, 망각을 할 수 없는 강민의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가족의 존재가 있었다.

    신문 배달을 하다 처음 웜홀에 빠졌을 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어머니와 서영이는 어쩌지라는 생각이었다.

    힘을 얻기 전이나 힘을 얻고 나서나, 강민은 힘들게 살아갔을 어머니와 서영이가 항상 마음에 걸렸다.

    이후 많은 일을 겪으며 유리엘을 만났고, 고향을 찾기 위해서 유리엘과 차원 여행을 하였다. 물론 고향을 찾는다고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차원 간의 시간 흐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흘러서 이미 가족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 가족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족이 이제는 힘들지 않고 편안히,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에 강민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강민의 내심을 짐작했는지 그의 어깨에 유리엘의 손이 올라왔다.

    강민과 영혼이 통하는 그녀는 강민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를 회상하며 아련하면서도 흐뭇함을 느끼는 강민의 감정을 유리엘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어깨에 올라온 유리엘의 손길에 강민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강민도 그런 그녀의 미소를 보고 마주 웃었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필요 없었다. 그들은 그런 사이였다.

    * * *

    식사를 마치고 강서영은 강민과 유리엘이 있는 방으로 올라왔다. 아까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노크를 하고 문을 살짝 연 강서영은 머리만 문 안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오빠, 시간 돼?”

    “그럼, 누구 동생이 보자는 건데.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지. 어서 들어와.”

    “언니랑 단둘이 있는데 방해할까 봐 그렇지.”

    방해라는 말을 하면서도 강서영은 이미 강민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녀의 모습의 유리엘이 웃으며 말했다.

    “서영아, 그런 말은 문밖에서 해야지. 이미 들어와 놓고 그런 말 하면 믿음이 안 가잖아. 호호호.”

    “언니라면 이해해 줄 것 같아서요. 히히.”

    강서영의 너스레에 웃음기를 거두지 못하고 강민이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혹시 연수원에서 남친이라도 생겼어?”

    갑자기 허점을 찔린 듯 강서영은 얼굴이 달아오르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나, 나, 남친은 무, 슨…… 하.하.하.”

    강서영이 어색해하는 것은 이런 쪽에 둔감한 강민도 알 수 있었다.

    “뭐야? 진짜야?”

    그런 강민의 질문에 유리엘이 대답을 하였다.

    “참, 민도 여전히 이쪽은 둔하네요. 서영이랑 강훈이 둘이 좋아하고 있잖아요.”

    “언니!”

    유리엘의 충격적인 대답에 강서영은 고함을 빽 질렀고, 강민은 그녀의 고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리엘에게 다시 물었다.

    “뭐? 그랬어? 흠, 어쩐지 둘이 인사할 때 마나가 흔들린다 싶더니. 그래서 그랬던 거였구나.”

    “마나에 대한 이해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높으면서, 인간 감정, 특히 타인에 대한 호감 같은 감정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둔하네요.”

    “하하, 난 뭐 유리가 있으니 다른 사람들과 그런 감정 자체를 나눠 본 적이 거의 없잖아. 그래서 그렇지, 뭐. 그래도 적대감은 바로바로 알아차리잖아. 하하.”

    강민은 머쓱해하며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카리나가 그렇게 속을 끓였죠. 하긴 카리나만 그랬나? 레오나도 그랬고 리디아, 아리아나…….”

    유리엘이 여자 이름을 하나둘 말하기 시작하자, 강민은 안 되겠다는 표정으로 유리엘의 말을 끊고 강서영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서영아. 유리 말이 사실이야?”

    “그, 그게…… 잘…….”

    “잘 안 들리는데 뭐라고?”

    강서영의 새빨갛게 변한 얼굴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을 강민이 웃으며 짓궂게 물어보았다.

    “그래! 나 강훈이 좋아해! 좋아한다고! 그치만 강훈이가 어떤지는 잘…….”

    강민의 장난치는 듯한 말에 강서영은 좋아한다는 말을 외치듯 말했지만, 그녀는 최강훈이 자신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는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강서영의 모습에 유리엘이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강훈이도 너 좋아해, 서영아. 아까 너 만났을 때 흔들리는 눈빛이 서영이 네가 강훈이를 보는 눈빛과 똑같더라.”

    유리엘의 말에 강서영은 반색하며 그녀에게 몇 차례나 물었다.

    “언니! 정말요? 강훈이도 그랬어요? 진짜죠?”

    “그래, 이 아가씨야. 민, 이것 봐요. 이래서 딸은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말이 나오나 봐요. 어머님 서운해하시겠다. 호호호.”

    강민도 강서영의 반응에 약간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흠, 우리 서영이 지켜주려면 강훈이를 더 열심히 굴려야겠는데. 지금 강훈이는 너무 허약한 것 같아서 말이야.”

    어디선가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강서영은 강민을 만류하며 말했다.

    “아냐, 아냐~ 지금도 경호원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면서? 지금으로 충분해. 안 굴려도 돼!”

    “허 참……. 우리 서영이가 이럴 줄이야. 유리, 강훈이 보고 나 이기기 전까진 우리 서영이 못 준다고 할까?”

    강민이 유리엘을 돌아보며 허탈한 표정으로 말하자, 유리엘 역시 재미있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서영이는 평생 혼자 살아야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할 거면 그냥 서영이를 포기하라고 말하는 게 나을걸요?”

    “그럼 포기하라고 할까?”

    강민이 강서영의 반응을 보며 유리엘에게 말하자 강서영은 아까보다 더 크게 고함을 질렀다.

    “안돼! 오빠!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혼삿길 막을 거야?!”

    강서영은 최강훈의 충성심을 알았다. 강민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지만 실제로는 강민을 은인으로 모시고 충성을 다한다는 것을 강서영도 알고 있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강민이 최강훈에게 그녀를 포기하라 한다면 최강훈은 강민에 대한 충성심으로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강서영은 고함을 치며 강민을 막았던 것이었다.

    유리엘은 강서영의 반응을 재미있어했다. 그러면서 강서영에게 윙크하며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강민에게 했다.

    “그래도 강훈이 정도면 나쁘지 않죠. 의지 견정하고 책임감도 있고요. 외모도 뭐…… 그 정도면 됐죠. 호호호.”

    유리엘이 최강훈의 칭찬을 하자 강서영은 유리엘을 보며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건 그렇지. 강훈이라……. 내가 따로 한번 이야기해 봐야겠네.”

    “오빠!”

    “포기하게 하려는 건 아니고, 얼마나 널 생각하는지 한번 보긴 봐야겠어. 얼마만큼의 마음으로 널 만나려는 것인지 말이야. 오빠로서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 그렇지…….”

    강민의 말에 강서영도 반발하지 못했다. 여동생을 가진 오빠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서영의 오빠는 평범한 오빠가 아니었다. 여동생을 위해서 수백 조 규모의 회사를 만들었고, 필요하다면 세상도 박살 낼 수도 있는 오빠였다.

    으드득.

    어디서 이가는 소리가 들렸고 최강훈은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한 것이 꼭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마나를 일깨운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지금 이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강민이 분위기를 전환하여 강서영에게 물었다.

    “이 이야기는 오빠가 먼저 꺼냈잖아! 아무튼 이번에 신입 사원 연수받으면서 생각한 건데 나 당분간 신입으로 회사 다니면 안 될까? 많이 생각해 봤는데, 어차피 내가 회사 시스템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어야 나중에 높은 위치에 올라가도 그런 시스템에 어긋나지 않게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강민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고 하자 강서영은 서둘러서 말을 이었다.

    “물론 오빠가 전에 말한 것도 생각해 봤어. 다른 사람들이 내가 오빠 동생인 걸 알게 되면 신입 사원으로 있을 수 없겠지. 근데 신입 사원 천 명이 있는 곳에서 연수를 받아도 내가 오빠 동생인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 굳이 걱정 안 해도 되지 않겠어?”

    강서영은 연수에 들어가기 전에도 신입 사원으로 회사에 들어오고 싶다는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때 강민은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람들이 강서영의 정체를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신입으로는 있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하지만 강서영은 지금 연수원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은 낮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이사장보다 신입 사원의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강서영밖에는 없을 것이다. 강민은 높은 자리를 준다고 해도 낮은 자리부터 시작하고 싶어하는 강서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해.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돼.”

    “정말? 나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강서영의 생각과 다르게 강민은 너무 쉽게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강서영은 강민이 약간은 반대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강민이 그녀가 신입 사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던 이유는, 신입으로 들어갔다가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길까 봐 반대했던 것이었다.

    처음부터 높은 자리에서 그녀의 뜻을 펼칠 수 있는데 굳이 낮은 자리에서 마음 상해가며 일을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강서영의 말대로 회사의 시스템을 파악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시스템에 맞지 않는 일을 하여도 강민에게는 관계가 없었다. 시스템을 그녀에게 맞추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의 전제는 강서영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강민은 그녀가 쉽고 편한 길을 걷기를 바랐으나, 강서영이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따르게 할 생각은 없었다.

    강서영이 신입 사원부터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강민은 그럴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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