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74화 (74/203)

# 74

현세귀환록

074. 재회(1)

모든 연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전세 버스 안에는 그간 친해진 KM그룹지주 신입 사원 동기들이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서영은 당연히 김세나와 함께 있었는데 둘 역시 연수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룹 연수에서는 워낙에 많은 인원과 많은 반이 있어서 강서영과 김세나는 서로 거의 볼 수 없었다.

하지만 30명밖에 안 되는 계열사별 연수에서는 반이 하나밖에 없었기에 숙소는 달랐음에도 같이 수업을 들으며 둘은 매일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매일 만나며 이야기를 해왔지만 아직 할 말이 많은지 서울로 가는 내내 수다를 떨었다.

다른 신입 사원들도 이 둘과 마찬가지로 연수원에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또 무슨 할 말들이 남았는지, 서울로 가는 내내 버스는 시끌시끌하였다.

김세나는 연수원에서 있던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강서영에게 말했다.

“서영아, 근데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거 같지?”

“뭐가? 아~”

김세나의 말에 강서영은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뒤 검지를 세우며 입을 가리며 말했다.

“쉿, 조용히 해. 혹시 모르니까. 괜히 오해 사고 싶지 않단 말이야.”

김세나의 의미는 강서영이 강민의 동생임을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강서영이 말하는 괜한 오해는 자신이 회장의 동생임을 감추고 연수를 받은 것이 신입 사원들은 감시하거나 그들을 기만했다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강서영은 연수원 초반에는 혹시나 누가 알아볼까 걱정했지만, 연수원에서 그녀의 모습은 어딜 봐도 재벌가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기에 한 번도 의심을 산 적이 없었다.

사실 대부분이 재벌의 가족이라고 얼굴이나 이름을 알지는 못한다.

단적으로 국내 1위 기업인 백산그룹의 손자 백지호만 해도 이아현이 일으킨 사건으로 한국대 경영학과에서는 그나마 좀 알려졌지만, 길거리에 돌아다녀도, 아니, 다른 과 학생들만 하더라도 그가 백산그룹의 손자인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강서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전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녀가 강민의 동생임을 아는 사람을 드물 것이다.

그렇기에 연수원에서도 보름 정도가 지나면서 강서영은 서서히 마음을 놓았고, 나중에는 그녀 스스로도 재벌이라는 인식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강서영의 손 모양에 김세나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넌 어느 부서로 가? 연수원에서 신입 사원 인사 면담했었잖아.”

“일단 전략기획실로 배치되었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 하긴…….”

강서영이 연수까지만 같이 받는다고 사전에 말했던 것을 김세나가 깜빡하고 물었던 것이었기에, 김세나는 외마디 탄성으로 상황을 이해했음을 알렸다.

원래 강민에게는 연수만 같이 받는다고 말했고, 아마 연수 이후에는 재단 이사장으로 갈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자신도 없었고, 이렇게 신입 사원으로 있는 것도 좋았다. 물론 아직 실무에 투입이 되지 않아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김세나에게 강서영이 되물었다.

“그런 넌 어디로 배치되었어?”

“브랜드팀으로 배치되었어. 홍보나 마케팅 이야기한 걸 들어주셨나 봐. 히히.”

“그럼 누가 말한 건데 안 들어주겠어. 헤헤.”

“그래, 고맙다, 강서영. 고마워. 히히히.”

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강서영에게 관심을 둔 장찬영은 둘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들의 바로 뒤에 앉은 장찬영은 강서영에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니? 연수까지 다 받고 퇴사할 생각인가? 그룹지주라면 나쁜 조건은 아닌데…… 어디로 갈 생각이지?’

장찬영 역시 전략기획실에 배치받았기에 강서영과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그런 말에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바로 물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말을 엿듣고 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출근하는 날 보면 알 수 있겠지…….’

강서영을 보고 있는 장찬영의 뒤에는 신애린이 다시 그를 보고 있었다. 만약 이들을 보고 있는 제삼자가 있다면 우스워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애린의 표정은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장찬영의 뒤에 앉은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무표정 뒤에는 굴욕적인 감정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티를 낼 만큼 그녀가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그런 표정은 장찬영을 공략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었다. 그녀가 한 달 넘게 공들인 남자에게 이렇게 퇴짜를 맞은 것은 그녀 인생에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남자가 그녀에게 먼저 관심과 호감을 표시하였고, 그렇지 않은 남자들도 그녀가 관심을 준다면 어렵지 않게 공략할 수 있었다.

장찬영 같은 철벽남은 그녀 인생에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장찬영이 동성애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하였는데, 강서영에게 은근히 호감을 표시하는 장찬영을 보고 동성애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수원에 있는 동안 그녀는 장찬영에게 세 번의 고백을 했고, 세 번을 다 거절당했다. 여태까지 그녀의 인생에 이렇게 굴욕적인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세 번째 고백할 때는 동기 중 누군가가 그 모습을 봐버려서, 동기들 사이에 알음알음 소문까지 나버렸다. 신애린이 장찬영에게 차였다고 말이다.

그 이후로는 신애린도 장찬영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장찬영을 포기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포기했다고 강서영이 장찬영과 잘되는 꼴을 두고 보기는 싫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은 남도 갖지 말아야 한다는 놀부 심보라고 할까?

신입 사원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에 버스는 서울역에 도착하였고, 이들을 인도했던 KM그룹지주의 지현기 대리가 버스 안에 있는 마이크를 잡았다.

“아, 아. 제 말 들리시죠?”

“네, 잘 들립니다~”

“흠흠, 연수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일주일간 집에서 푹 쉬시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일단 당일엔 부서로 바로 가지 말고 인사팀으로 오세요. 다 같이 인사 돌고 각 부서로 가실 테니까요. 알겠죠?”

“네~”

“그럼 두 달간 연수받는다고 고생하셨습니다.”

* * *

강서영이 집 앞에 도착한 시간은 점심때가 약간 넘은 시간이었다. 대문 앞에 선 그녀는, 오랜만에 가족들을 볼 생각을 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띵동띵동-

강서영이 벨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는데, 열린 문 안에는 그녀가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바로 정시아였다.

그녀를 본 강서영은 처음에는 집을 잘못 찾았는지 싶어 한걸음 물러나서 문의 형태와 집 위치를 다시 봤는데 다시 봐도 그녀의 집이었다.

자신의 집인 것을 파악하고 강서영은 조심스레 정시아의 정체를 물었다.

“누, 누구……?”

강서영이 약간 말을 더듬으며 누군지 물어보자, 정시아는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언니, 안녕하세요! 정시아라고 합니다. 서영 언니 맞죠? 어머님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인사를 마친 정시아는 강서영의 팔짱을 끼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동생처럼 그녀에게 말을 했다.

“언니 두 달간 집 떠나 있느라고 고생 많으셨지요? 어머님이 언니 온다고 맛있는 거 많이 하고 기다리세요. 얼른 들어가요. 히히”

정시아는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집안으로 이끌며 강서영이 가져온 여행 가방조차 그녀가 들려고 하였다.

“아, 이건 내가…….”

“아니에요, 언니. 당연히 제가 들고 가야죠.”

마당 안으로 들어가자 강민과 유리엘, 그리고 최강훈이 그녀를 반겼다. 가장 먼저 유리엘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서영아, 왔어? 고생 많았지.”

“고생은요. 재밌기만 했는데요, 뭐. 히히.”

그녀의 너스레에 강민 역시 고생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연수는 할 만했어?”

“응,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오빠한테 말할 게 있었는데.”

“그래, 일단 어머니께 인사하고 점심 먹고 이야기하자. 어머니 기다리셔.”

“아, 그래. 엄마부터 보러 가야지~”

강민 내외에게 인사를 한 강서영은 옆에 서 있는 최강훈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표정은 약간 복잡해 보였다.

최근 최강훈의 수련에 큰 진전이 없었는데, 그의 수련을 가로막는 가장 큰 이유가 강서영이었다.

그녀를 근접 경호하며 가까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강서영이 연수를 간다고 자리를 비우자 계속 그녀의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폐관 수련 때도 그녀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자 노력을 했었고 성취도 이루었다.

그런데 폐관에서 나온 이후로는 계속 그녀가 머릿속에서 아른거려 수련에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최근 정시아에게 맥없이 지는 일이 많았던 이유 중 하나도 그녀 생각에 집중을 못 한 것도 어느 정도 있었다.

아직 첫사랑조차 못해본 최강훈은 그것이 무슨 느낌인지도 모르고 속앓이만 하였는데, 지금 이 순간 강서영을 보고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알아차려 버렸다.

아직 사랑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녀를 이성으로 좋아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강서영 역시 연수원에 있는 동안 최강훈의 생각이 계속 났는데 오늘 그를 보니 그를 향한 감정이 단순한 호감이 아닌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떠나 있던 두 달간의 시간은, 서로 이성으로서 좋아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시간이 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각자의 생각만 확인한 것이지 서로의 생각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그렇게 보고 싶었던 둘이었지만 예전보다 더 어색한 말이 나왔다.

“누, 누나, 왔어요?”

“으, 응. 왔어. 너…… 너도 별일 없었어?”

“네…….”

연수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 장난도 치고 편하게 보였던 둘이었는데, 서로가 서로를 이성으로 인식한 순간부터 모든 것이 어색해졌다. 서로를 의식한다는 이야기였다.

시간이 지나면 더 애틋하게 되어서 돌아올 감정이지만 아직은 어색함만이 감돌았다.

강서영의 옆에서 여행 가방을 끌던 정시아는, 강서영이 어머니께 인사드리러 집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에 이제껏 끌고 왔던 여행 가방을 최강훈에게 넘기려고 하였다.

여행 가방을 넘기며 전처럼 최강훈에게 반말로 소리치려던 정시아는, 강서영과 최강훈의 어색한 인사에 목구멍까지 튀어나왔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둘이 인사를 나누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눈치 빠른 정시아가 이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아, 둘이……. 이런, 그럼 강훈이한테도 함부로 못 하겠는데…….’

최강훈과의 어색한 인사를 마친 강서영은 자신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만나러 강민 내외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만, 최강훈은 같이 들어가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강서영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그런 최강훈에게 정시아가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강훈…… 오빠. 이거 들고 가.”

정시아의 오빠라는 말에 최강훈이 갑자기 정신을 차리며 반문했다.

“오빠?”

“그래, 오! 빠!”

정시아는 이를 악물고 오빠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강서영과 최강훈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면 정시아가 최강훈을 대하는 모습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19살로 보이는 정시아가 20살이 넘은 최강훈에게 반말지거리를 하며 막 대한다면, 최강훈을 좋아하는 강서영이 그녀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정시아는 그것을 알고 미리 최강훈에게 호칭을 바꿔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 갑자기 왜 그러냐? 정시아?”

하지만 최강훈은 그런 정시아의 내심을 알 수가 없었기에, 갑자기 오빠라고 부르는 그녀가 이상한지 다시 물었다.

“아, 몰라. 앞으로 오빠라 부를 테니 그렇게 알아! 이건 오빠가 들고 들어가고! 흥!”

정시아는 여행 가방과 최강훈을 남겨둔 채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마당에 혼자 남아 있던 최강훈은 그 역시 여행 가방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이제 강서영과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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