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71화 (71/203)

# 71

현세귀환록

071. 수련(1)

주위가 온통 푸른 공간에서 도복을 차려입은 20대 초반의 남성과, 몸에 달라붙는 운동복을 입은 쇼트커트의 10대 후반의 여성이 마주하고 있었다.

벌써 한참 동안 대련을 했는지 남자는 약간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는데, 그에 비해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런 남자의 기색에 여자가 약간의 비아냥을 섞은 말투로 남자에게 말했다.

“최강훈, 벌써 지친 거야? 자주 쓰는 기술 몇 개만 파악하고 나니 이젠 별거 아닌데?”

“정시아! 그만 떠들고 집중해!”

“집중 안 해도 너 정도야 이젠 가뿐해서 말이야.”

“크윽…….”

두 남녀 중 남자는 최강훈이었고, 여자는 실비아였다. 실비아의 말이 사실인지 최강훈은 그녀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한데 최강훈은 그녀를 실비아라는 이름 대신 정시아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실비아의 클랜은 루시페르를 나온 이후, 강민의 휘하로 들어갈 때까지 유니온에서도 탈퇴한 그레이 울프 상태였다.

그래서 이능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기는 힘들었다. 이미 루시페르와 척을 진 상태이기 때문에 이능의 세계에서 활동하다 추적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루시페르가 마음먹고 찾고자 한다면 그녀의 클랜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클랜이 몇십 년간 루시페르의 시선을 피해 숨어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클랜이 루시페르에 그리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다는 반증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루시페르의 도망자들이 드러내놓고 이능 세계에서 활동하기는 힘들었다. 애써 찾으려 하지는 않았지만 눈앞에 얼쩡거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었다.

가명을 쓴다고 하더라도 이미 유니온에 자신들의 마나 파문이 기록되어 있기에 이능의 세계에서 활동한다면 그들이 누구인지는 바로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실비아의 클랜은 이능 세계의 일보다는 일반인들의 해결사와 같은 노릇을 하며 활동비를 충당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하지만 강민이 실비아의 클랜을 수하로 거두면서, 실비아를 포함한 그녀의 클랜원들에게 한국에서 정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신분을 주었다.

사실 강민과 유리엘은 그들의 마나 파문까지 바꿀 수 있었으나 굳이 그런 조치는 하지 않았다.

실비아의 클랜이 강민의 휘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루시페르 측에서 어떤 식으로든 조치할 것이 분명했고, 그 조치를 본 후 그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판단하려고 하였다.

또한 강민에게 그런 기술까지 있다는 것을 굳이 유니온에게 보일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신분 또한 유니온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요청하여 받았다. 즉, 실비아의 클랜은 더 이상 그레이 울프가 아니라 강민 소속의 유니온 멤버가 된 것이었다.

물론 유니온에서도 루시페르와의 관계가 있었기에 실비아의 클랜원들이 예전에 쓰던 이름을 사용하여 신분증을 만들지는 않고 모두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여 신분증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름의 전부를 바꾸지는 않았고, 대부분 이름을 그대로 두고 성만 바꾸는 정도의 수준으로 신분증을 새로 받았다.

다만, 실비아는 이름 전체를 바꾸기를 원했는데, 한국 출신인 만큼 이름 역시 한국 이름으로 하였다. 외모 역시 한국인이었기에 외국 이름보다 그것이 더 어울린다고 판단했을지도 몰랐다.

사실 그녀는 유니온에 처음 등록하는 것이라 굳이 가명을 쓸 것도 없었지만 클랜원들이 다 이름을 바꾸는 마당에 자신만 과거의 이름을 고집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두웠던 과거와 상징적인 단절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이름으로 바꿀 때, 성씨는 그녀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사용했던 성씨인 정 씨를 되살려 사용했다.

정 씨가 과거에 사용했던 성씨라는 이야기를 들은 강민은 이름 역시 과거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였는데, 실비아는 안색마저 변하며 과거의 이름은 극구 거부하였다. 그녀는 결국 실비아와 비슷한 어감의 시아라는 이름을 선택하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민이 과거의 이름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는데, 실비아는 약간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안 물어보면 안 되겠냐는 말을 하였기에 강민의 실소를 자아냈다.

아무튼 이렇게 강민의 수하가 된 정시아의 클랜은 일괄적으로 KM그룹 휘하에 있는 KM가드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민이 이능 세계의 이권에 개입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강민의 수하가 된 그들도 일반 세계에서의 직업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활용하기 가장 쉬운 직업이 경호원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일괄적으로 KM가드 소속으로 만들었다.

그동안 신분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용병처럼 암암리에 활동하며 생활비 및 혈액 팩을 구했던 클랜원들은, 그 모든 것을 강민이 해결해 주었기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더군다나 실비아와 말론도가 강민에게 완히 승복하여 수하를 자처하고 있었기에, 클랜원들에게 실비아가 맺은 피의 계약을 언급하지 않아도 그들 역시 자연스럽게 강민의 수하가 되었다.

물론 어디에서나 반골 기질이 있는 사람들은 있었기에 강민이 가벼운 무력시위를 하는 사소한 이벤트는 있었다.

그렇게 KM가드 소속으로 1달여간의 기본 경호 훈련을 거친 그들은 KM가드의 스페셜팀으로 편성되어 요인 경호 및 침투 방어 등 심화 훈련을 받을 예정이었다.

클랜 리더였던 정시아 역시 스페셜팀의 리더를 맡으며 경호 훈련을 소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강민의 본가에 가서 최강훈을 만난 이후 상황은 약간 달라졌다.

그녀가 최강훈을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시아는 깍듯이 강민을 마스터로, 유리엘을 유리 님이라 부르며 철저하게 수하로서 행동하였다.

하지만 최강훈이 강민과 함께 있게 된 뒷이야기를 알고 나서부터는 그 눈빛이 달라졌다.

특히 최강훈이 강민과 함께한 지 일 년도 되기 전에 C+급에서 B급까지 급성장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자신 역시 강민과 함께 있으면 어쩌면 공작급의 뱀파이어에 오르는 그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강민은 정시아를 가족들에게 소개할 때 최강훈을 소개할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가신 지인의 딸이라고 말한 것이 그녀가 행동을 달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정시아는 최강훈 역시 돌아가신 지인의 제자라는 타이틀로 강민의 집에 머무르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정시아는 어느 순간부터 KM빌딩 인근의 숙소가 아니라 강민의 본가에 자주 나타났다.

그러곤 강민에게는 오빠, 유리엘에게는 언니라 부르면서 집에서 같이 머물기를 원하였다.

특히, 한미애를 집중 공략했는데 한미애에게 어머님이라 부르는 등 갖은 애교를 부리며 마치 친딸처럼 굴며 한미애가 자신의 편이 되도록 하였다.

한미애 역시 강서영과는 달리 애교 많은 정시아가 딸처럼 살갑게 굴자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잘해주었다.

더군다나 강서영이 KM그룹 신입 사원 연수를 받고 있느라 한 달 넘도록 그녀를 못 보고 있어 딸 같이 굴며 그녀에게 애교 공세를 부리는 정시아가 더욱 기꺼웠다.

정시아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기저에는 이런저런 계산보다는 단순히 강민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그녀의 본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는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뱀파이어 세계에 있던 정시아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히 측정할 수도 없는 강자인 강민에게 본능적으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마스터와 수하로 이미 설정된 둘 관계를 과감하게 깨고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시도를 하는 것이었다.

사실 정시아는 클랜 리더로서의 카리스마보다는 소르빈의 양딸로 있을 때부터 그런 애교에 강한 면을 보였다.

다만 소르빈을 잃고 클랜의 리더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런 모습을 애써 감추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강민이라는 강자에게 기댈 수 있는 수하의 입장이기에 더 이상 리더라는 부담감 없이 그녀 본연의 성격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애교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결국 한미애 공략에 성공한 정시아는, 한미애가 원하고 강민과 유리엘이 묵인하여 그녀 역시 최강훈, 한수아와 비슷한 명목으로 강민의 집에 같이 살게 되었다.

한편 헤이안과의 일 이후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집중적인 폐관 수련을 마친 최강훈은, 결국 C급의 벽을 넘어 B급으로 올라섰다.

강민의 도움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20대 초반에 B급의 경지에 오른 것은 엄청나게 빠른 성장인 것이 분명하였다.

애초에 이를 알고 강민의 옆에 있으려고 했던 정시아는 강민의 집에 머물게 된 이후 최강훈에게 대련을 요청하였다.

강민 역시 강대한 힘만 얻었지 아직은 그것을 다루는 것이 부족한 정시아와, 최근 실력이 급성장한 최강훈의 대련은 각자가 얻을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대련을 허락하였다.

대련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능력 등급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수련해온 백록원의 각종 비기를 통하여 최강훈이 전투 경험이 부족한 정시아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정시아와 최강훈의 등급 차이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정시아가 말론도에게서 점점 뱀파이어의 기술 및 체술을 배워 익혀가며 최강훈과의 대련을 통해서 무공에 대한 대응 방법까지 몸에 붙이자, 마나 등급이나 신체 능력 자체가 떨어지는 최강훈은 그녀를 이기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결국 대련을 시작한 지 열흘 만에 정시아에게 역전을 당한 최강훈은 이제는 그녀를 이기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지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정시아는 뱀파이어의 고유 기술은 봉인하고 신체 능력만을 가지고 최강훈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하여도 최강훈이 이기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신체 능력과 마나량에서 워낙에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첫 대련 이후 한 달째인 오늘도 정시아가 사방을 번쩍이며 날아다니는 것을 최강훈이 막는데 급급한 상황이었다.

약간 힘들어하는 최강훈에게 숨돌린 시간을 충분히 줬다고 생각한 정시아는 다시 공세를 시작하려 하며 그에게 말했다.

“강훈아~ 간다~”

“오빠라고 부르라 했지!”

“오빠는 개뿔~ 네가 민이 오빠처럼 강해지면 생각해 볼게~!”

최강훈은 정시아가 뱀파이어인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이능의 세계에 있는 최강훈에게 강민이 굳이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최강훈 역시 정시아가 자신보다 훨씬 많은 나이인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시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19살로 소개하면서 그 나이대의 소녀처럼 행동하며 자신을 그렇게 보아주길 원했기에, 최강훈 역시 강민의 다른 가족들처럼 그녀를 19살 여고생처럼 대하였다.

그러나 정시아는 그런 최강훈에게 실제 나이를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유독 그에게는 오빠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특히, 대련을 시작하고 그녀가 최강훈을 이기기 시작하면서 이런 현상은 더 심해졌다.

이는 호감 가는 상대에게 그 감정을 들킬까 봐 호감을 반대로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뱀파이어로서는 이제 갓 성인으로 인정받을 나이이지만, 이미 100여 살에 가까운 정시아에게 최강훈은 한참 어리게만 보이는 상황이었다.

물론 뱀파이어에게 신체적인 나이는 크게 상관없었지만, 자신보다도 약한 최강훈에게 정시아는 큰 호감은 없었다.

다만 정시아가 최강훈을 견제하면서 못살게 구는 실제 이유는, 최강훈이 비록 강민과 형, 동생 하는 사이지만 최강훈이 실질적으로는 강민의 첫 번째 부하나 마찬가지인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부하인 최강훈이 두 번째 부하인 자신에게 텃세를 부리기 전에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기를 꺾기 위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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